125화
아기를 가질 수 있다면.
아무 걱정 없이 지칠 때까지 사랑을 나누고 배 속에 자리한 축복을 기뻐할 수 있다면.
자신처럼 불운한 아이가 태어날까 전전긍긍할 필요 없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아기를 낳고, 아기의 예쁜 눈을 마주 볼 수 있다면….
…바란 건 고작 그뿐인데.
차별당하고 불이익에 순종하는 삶은 늘 일상이었다. 항상 체념하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자신만의 착각이었다.
도저히 체념할 수 없는 마음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간절한 마음을 체념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괴롭고 힘든 일이라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왜… 나한테만 이런….”
눈물이 멈추지가 않았다. 에리얼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에 루스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손을 쥐락펴락했다. 난처한 심정에도 아랑곳없이 그녀의 울음소리는 잦아들 줄 몰랐다.
삐잇, 삣-
눈물을 멈춘 건 누구의 위로도 아닌 작은 새소리였다. 상체를 들썩이며 엉엉 울던 에리얼이 퍼뜩 몸을 일으켜 젖은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앗, 아… 미, 흑, 미안해….”
아기 오리가 잠에서 깬 건지 무릎에 놓여 있던 담요 더미에서 삑삑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리얼은 재빨리 루스가 덮어줬던 재킷을 당겨 눈물 콧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냈다.
“우, 울려고 한 거 아니었는데… 창피해라.”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에리얼이 허겁지겁 재킷으로 얼굴을 가렸다. 측은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루스가 눈치껏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감정을 삭인 에리얼이 목을 가다듬고서 쉰 소리로 말을 읊었다.
“아무튼… 심란해서요.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백작님께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괜히 백작님께 걱정을 끼쳐드리는 건 싫어요. 그러니까.”
“말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십시오.”
루스가 정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에리얼은 고맙다고 해야 하나, 다시 한번 말하지 말아달라 강조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한결 밝아진 얼굴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넸다.
세차게 땅을 두드리던 빗줄기가 어느새 안개비처럼 가늘어졌다. 초록의 싱그러움이 만연한 정원과 달리 파고라 안은 괴괴한 침묵으로 가득 차 세상과 동떨어진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울음을 삼킨 에리얼이 코를 훌쩍이며 오리가 들어있는 담요를 들춰 올렸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오리를 손가락을 슬슬 쓸어내리며 속상하다느니 화난다느니 하는 혼잣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루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 있는 에리얼을 보며 뭐라 위로해야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울하면 온갖 행패를 부리는 바이올렛과 달리 에리얼은 시든 꽃마냥 축 처져있기만 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안절부절못했다. 원체 여자에게 면역이 없는 만큼 우울한 여자를 달래는 법 따위를 알 리도 없었다.
위로라는 게…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여자들은 이럴 때 뭘 좋아하지.
맛있는 거? 지금 당장 가지러 갈 수 없으니까 빼고.
칭찬하기…는. 성격상 무리고.
놀아주기… 애도 아니고 이건 좀.
비가 그친 정원에서 상쾌한 풀 내음이 솔솔 풍겨왔다. 멍하니 정원을 훑어보던 루스가 문득 시선을 멈춰 뚫어져라 한 점을 응시했다.
…저거.
그래. 저거다.
홀린 듯 에리얼 쪽으로 손을 뻗은 루스가 그대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루, 루스?”
갑자기 끌려 일어난 에리얼이 담요를 감싸들고서 놀란 눈으로 루스를 돌아보았다.
“루스! 저기! 손! 손이!”
“…….”
“루스…! 손 잡아도 돼요? 지금 나 잡고 있는데요?”
루스는 에리얼을 돌아보지 않고 손목을 붙든 채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높이 올려묶은 루스의 머리카락이 에리얼의 시야에 어른거렸다. ‘루스? 루스? 어디 아픈 거예요?’ 당황하는 에리얼과 달리 루스는 태연한 얼굴로 정원 구석에서 걸음을 멈췄다.
만개한 꽃밭을 바라보던 루스가 신중하게 꽃 한 송이를 손으로 잡아 뜯었다. 그리고 그대로 건넬까 아니면 예쁘게 장식해줄까 고민하다가 에리얼의 손바닥을 펴 꽃줄기를 올려두었다.
“크로커스가, 참 예쁘게도… 피었습니다만.”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노력했건만 튀어나온 목소리는 책을 읽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큼큼거리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루스가 조금 더 그윽한 분위기로 입을 열었다.
“부, 부인은 우는 것보다. 웃는 게 더 잘 어울리니까. 좀, 웃고 사세요.”
베르트발드처럼 은근하게 말하려 했는데 막상 이어진 목소리는 좀 전보다 더 서툴고 엉망진창이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까지 더해 풋내기도 이런 풋내기가 없었다.
루스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아래로 떨군 채 에리얼의 손을 움켜쥐어 억지로 꽃을 쥐게 했다. 놀란 얼굴로 루스와 제 손을 번갈아 쳐다보던 에리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고… 고마워요, 루스.”
위로하려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에리얼이 방긋 미소를 피어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어머나.”
에리얼의 눈앞에 어두운 회색으로 존재하고 있던 루스의 그림자가 천천히 핏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중심, 명치 부근부터 시작된 붉은색이 천천히 상체를 잠식해나가더니 이내 손끝과 발끝, 머리까지 온몸을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방금 전까지 눈을 가리고 있던 회색은 온데간데없이 베르트발드처럼 어두운 붉은색으로 가득 찬 인영이 남았다.
생전 처음 보는 현상에 에리얼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뜬 눈으로 눈앞의 실루엣을 쳐다보았다.
극적인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 에리얼의 시선과 달리 실제로 루스의 외양은 어떤 곳도 달라진 곳이 없다.
다만, 단 하나.
늘 무뚝뚝한 표정이 자리했던 얼굴에 그답지 않은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핏빛 인영이 또 하나 늘어났다는 사실에 에리얼이 놀란 것도 잠시뿐, 늘 옆을 지키고 있던 익숙한 핏빛 그림자의 귀환으로 에리얼의 호기심은 종말을 맺었다.
에리얼은 ‘뭐 파란색인 사람도 만났는데 붉은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난 게 대수겠어.’ 하며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정작 놀라움을 일으킨 당사자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잠 못 이루는 밤을 이어가고 있었다.
“미쳤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루스가 신경질적인 손길로 허리춤의 검을 거머쥐었다. 단단하고 차가운 검 손잡이 끝, 뭉툭하게 닳은 폼멜의 감촉에 흔들리던 이성이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다.
고작 손목 한 번 잡았을 뿐인데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살집 없는 가느다란 손목은 색기 따위 하나도 없는, 마른 나뭇가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피부는 좋더라만은.”
굳은살 박인 단단한 손가락 아래로 부인의 매끈한 살결이 스쳐 지나갔다. 붙잡힌 손목으로부터 은은하게 느껴지는 체온은 늘 상상하고 있던 부인의 체온보다 훨씬 따뜻했다.
다시 떠올리니 명치 부근이 뻐근하게 아려왔다.
“아오… 관두자, 관둬.”
루스는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려둔 채 마뜩찮은 기분으로 집무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날. 비 오는 날 이후로 루스는 에리얼을 볼 때마다 보이지 않는 실로 사지가 결박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고 가까이 다가가는 건 엄두도 내질 못했다. 뿐만 아니라 제 마음대로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어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간질간질하면서도 답답한 기분에 발을 쾅쾅 구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 맹한 여자 때문에 이 지경이 됐나 싶어 한 대 쥐어박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앞에 그녀가 보이지 않으면 기분이 저조했다. 물론, 앞에 있어도 기분이 안 좋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며칠이 흘렀다. 알 듯 모를 듯한 감정의 정체를 깨달은 건 어젯밤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에리얼은 아기 방에 들어가 한참을 나오질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루스가 들어가 보려 했으나 베르트발드가 그를 제지하더니 조용히 혼자 방으로 들어갔다.
잠든 에리얼을 안고 나온 베르트발드는 그녀가 쥐고 있던 뜨개질감을 내려다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이한 유대감이 에리얼과 베르트발드를 휘감고 있었다. 베르트발드가 사라진 후에야, 루스는 그 유대감이 부부 두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애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에리얼에게 느끼고 있던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좋아할 사람이 없어서 백작의 여자를 좋아하다니… 루스. 네가 사람이냐.”
짜악! 뺨을 후려치자 시큰거리는 통증이 살갗에 휘몰아쳤다. 답답함이 가시질 않아 다시 찰싹찰싹 다른 쪽 뺨을 후려갈겼다.
지나가던 하녀가 그 꼴을 보고 사색이 되어 후다닥 멀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스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뺨을 두드렸다.
백작 놈은 눈치가 빠르니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지.
그렇게 집무실 앞에 서서 문고리를 붙잡았다. 문을 당기려던 순간, 기다렸다는 듯 벌컥 문이 열렸다.
“부길드… 아니, 콘텔라렌 경.”
문을 열고 튀어나온 사람은 백작의 호위인 바이온이었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부딪혔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바이온이 곤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잘 만났습니다. 혹시 백작님 어디 가셨는지 모르십니까?”
* * *
거친 바닷바람이 절벽을 훑고 지나갔다.
바다를 등지고 있는 저택 뒤, 왼쪽으로 나 있는 정원을 쭈욱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숲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애매한 작은 삼림이 나타난다. 숲을 오르다 보면 절벽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타나고 오솔길을 끝까지 걸어나가면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바람의 절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와. 바람이 엄청 불어요.”
수풀을 벗어나자마자 거센 바닷바람이 에리얼을 휘감았다. 앞서가던 베르트발드가 에리얼의 손을 붙잡고 걸음을 늦췄다.
“올라가는 길은 바람이 거셉니다. 저기, 끝에 커다란 나무 보이십니까.”
“네.”
“지대가 높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나무가 있는 곳까지 가면 신기하게도 바람이 거의 불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위험하니까 이리 와요.”
베르트발드가 상체를 숙여 에리얼이 쓰고 있던 보닛의 리본을 꼼꼼하게 다시 묶었다. 그리고 훌쩍 에리얼을 안아 들고서 나무가 있는 끝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