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붉은빛이 섞인 보라색 노을이 수평선을 오색찬란하게 물들였다.
바닷가에 인접한 정원은 초목 대신 새하얀 모래와 서부에서 채취한 커다란 바위로 하얀 스톤 가든을 이루고 있었다. 일몰이 지나 어둠이 차츰 밀려드는 정원에 새하얀 백열석이 은은한 빛을 뿌렸다.
“바다로 내려가는 길이 영 가파르지 않나.”
벤치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던 베르트발드가 턱짓으로 계단을 가리켰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곱게 깔린 모래를 보고 있던 바이온이 계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년에 새로 정비하시지 않았습니까. 계단이 작아져서 걷기 편하던데요.”
“몸도 작고 발도 작아서 위험하지 말라고 공사한 건데. 생각해보니까 어차피 위험해서 바다 근처는 혼자 다니지도 못하는데 왜 공사했을까 모르겠어.”
멀쩡한 사람들이야 산책로로 활용하기 좋겠지만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에리얼에게 계단 길은 영 불편하고 위험할 터였다. 좀 더 길게 경사로를 낼까 고민하던 베르트발드는 그냥 자신이 안고 왔다 갔다 하는 게 나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리를 꼬고 차분한 눈길로 계단을 다시 쳐다보았다. 길게 뻗은 다리가 파도 소리에 맞춰 살짝살짝 흔들렸다. 내일은 아침 일찍 청사에 다녀와서 에리얼과 모래놀이를 할까. 나른한 얼굴로 내일 일정을 상기하던 찰나였다.
“부르셨습니까.”
루스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을 건네며 베르트발드 앞에 섰다. 베르트발드는 옅게 미소 띤 얼굴로 루스를 한 번 쳐다본 다음 몸을 일으켜 계단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터벅거리는 발소리가 파도 소리와 섞여 둔하게 허공을 울렸다. 난간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던 베르트발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택에 무슨 일 있었나?”
“예?”
“아까 부인과 이야기 나누다가 뭔가 숨기는 기색이 있는 것 같아서 신경 쓰이더군. 계속 붙어 있던 자네라면 잘 알겠지 싶어서.”
뒷짐을 진 채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루스는 뒤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짧게 고민했다.
「현자님 만났다는 거, 백작님께는 절대 말하시면 안 돼요.」
신신당부하던 에리얼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루스는 들리지 않도록 작게 숨을 내뱉고 대답했다.
“저택에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보다 북부에서 현자는 찾으셨습니까.”
묘한 눈길로 루스를 쳐다보던 베르트발드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바뀐 화제에 편승했다.
“아쉽게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어. 돌아오기 전까지는 거취를 찾을 수 없을 거라는군. 붉은 머리에 붉은 눈, 베넥 모그니드란 사람인데… 사례는 얼마든지 할 테니 최대한 빨리 수배해줘.”
“알겠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대꾸하며 루스가 속으로 혀를 찼다.
모그니드는 에리얼과 대화를 마친 후 마도체인지 뭔지를 찾아서 돌아온다고 제국을 떠난 상태였다.
찾는다면 찾을 수는 있겠지만 어차피 알아서 저택에 돌아온다는 사람을 찾을 생각은 없었다. 루스는 형식적으로 대꾸한 뒤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백작님. 왜 부인께 현자를 찾는 걸 함구하고 계시는 겁니까.”
모그니드를 만나기 전까지 에리얼은 베르트발드가 현자들을 찾고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설야의 축복인지 뭔지를 가지러 갔다고만 알고 있던 터라 모그니드에게 내막을 들었을 때 감동받은 듯 눈물을 글썽였다.
이 부부는 뭐 이렇게 서로 숨기려고 애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별로 중요한 일인 것 같지도 않은데.
못마땅한 얼굴로 루스가 묻자 베르트발드가 눈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냥. 괜히 희망 가졌다가 혹여 찾지 못하면 실망할 것 아닌가. 남편으로서 체면도 있고.”
“부인께서 그런 일로 실망하실 분 같지는 않습니다.”
“음. 꽤나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에리얼과는 좀 친해졌나.”
“하하… 글쎄요.”
말끝을 흐리며 루스가 은근한 미소를 떠올렸다.
“무척 발랄한 성격이신 것 같더군요. 나이답지 않게 어린애 같은 면도 있으시고.”
고개를 돌려 루스를 힐끔 쳐다본 베르트발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발걸음을 멈췄다.
“자네 화법이 꽤 묘한데. 칭찬인가 욕인가.”
“당연히 칭찬입니다. 백작님께서 하도 금이야 옥이야 하시길래 왜 그러나 싶었는데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더군요. 무척 활기차고 밝은 분이십니다.”
“…하. 자네가 여자 칭찬하는 건 처음 듣는데.”
부인 칭찬에 괜히 머쓱해진 베르트발드가 입가를 가려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단속했다. 내리뜬 눈으로 바닥을 한 번 쳐다본 다음, 평소처럼 태연한 얼굴로 돌아와 다시 루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내가 워낙 미인이니 자네가 그리 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 그래, 귀엽지. 그러니 눈 높은 내가 절절매며 따라다닌 것 아니겠나.”
한 손은 주머니에 꽂고 한 손은 계단 난간을 톡톡 두드리며 베르트발드가 차분한 목소리로 에리얼의 매력을 읊었다.
외모가 훌륭한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성격도 까탈스럽지 않고 차분하며 의외로운 면에 매번 깜짝 놀란다는 둥, 하지만 좋은 가문에서 자란 여자니만큼 필요할 때에는 누구보다 우아해진다는 둥, 손재주가 좋아서 못 다루는 악기가 없고 뜨개질은 얼마나 잘하는지 고급 수예점에서 파는 것 같다는 둥 루스도 익히 아는 사실들을 주절주절 나열하기 시작했다.
묵묵히 뒤따라오던 바이온이 어느새 끼어들어 정원의 오리도 마님이 손수 키우셨다는 둥 글은 못 읽지만 목소리가 예뻐 낭독 솜씨가 훌륭하다는 둥 주군에 말에 맞장구를 치며 한몫 거들었다.
루스는 물음이 던져질 때마다 적당히 대꾸하며 지루한 내색을 숨겼다. 실상 루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건 에리얼의 칭찬 따위가 아닌 다른 문제였다.
주절주절 이어지는 목소리들을 뒤로한 채, 루스는 현자와 에리얼이 만났던 그날을 머릿속에 재차 상기했다.
* * *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고. 일단 눈을 뜰 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확인해볼까요.”
모그니드가 은은한 웃음을 입꼬리에 단 채 평온한 어조로 물음을 던졌다. 예상치 못한 본론에 에리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그니드의 말에 놀란 건 에리얼뿐만이 아니었다. 루스는 저도 모르게 함구하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설마 당신이… 해제술사인 건가? 백작이 찾고 있다던 그 현자. 해제술사가 정말 당신이야?”
“맞습니다.”
“어떻게… 분명 나이가 엄청 많은 사람일 줄 알았는데.”
모그니드가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 자락을 정리하며 살풋 웃었다.
“마법사나 현자라고 하면 대부분 그런 이미지들을 떠올리시나 봅니다. 썩 틀린 말도 아니지요. 저는 마력 각성을 일찍 해서 유난히 젊은 편입니다.”
루스는 신기한 눈초리로 모그니드를 쳐다보았다. 젊은 것도 젊은 거지만, 가장 의아한 건 따로 있었다.
“이상하군. 해제술사 본인은 북부에 있고 제자를 보낼 거라 생각했거든. 현자들은 본거지를 잘 떠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건 추구하는 분야마다 다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연구에 매진하는 것보다 저주 대상자를 직접 만나는 게 훨씬 의미가 있기에 여기저기 많이 떠돌아다니는 편입니다. 어쩌다 보니 한 일 년 동안은 북부 바깥으로 나간 적 없지만 말이지요.”
이런저런 궁금증이 루스의 입 속을 떠돌았다. 그러다 문득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제술사가 여기 있다면, 해제술사를 찾으러 간 백작은 어떻게 된 거지?
“당신 만나러 백작이 북부로 떠났는데… 지금쯤 나흐트필에 도착했을 텐데. 왜 여기까지 직접 온 거지?”
“…백작님이요? 저는 바이올렛 님 서신을 받고 바로 남부로 내려온 겁니다만.”
어리둥절한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설마 길이 엇갈린 건가. 루스가 바이올렛의 전언을 물으려 한 찰나였다.
“잠깐, 잠깐만요.”
에리얼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백작님은 설야의 축복 받으러 북부로 간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현자님을 찾으러 갔다는 말이에요?”
“…아.”
“그리고 저분이 현자님이라는 거고? 마법사… 맞아요?”
루스가 눈을 홉뜬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에리얼을 쳐다보았다. 동시에 당혹스러운 분위기를 기민하게 감지한 모그니드가 무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왜 거짓말을….”
에리얼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자신을 속이고 북부로 간 베르트발드, 그리고 여태까지 그 사실을 숨기고 있던 루스.
…아버지가 마법사 찾으러 온 거라고 운운하던 게 이거였구나.
화를 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베르트발드의 입장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니 만나러 간다고 했다가 못 만나고 와서 자신을 실망시킬까 봐 미리 배수진을 친 것일 터였다.
실제로도, 그가 만나러 갔다는 해제술사가 북부가 아닌 제 앞에 나타난 걸 보면 그의 선택이 틀린 건 아니었다.
감정은 제쳐두고 에리얼은 가장 큰 궁금증을 먼저 풀기로 했다.
“그쪽이… 현자님이. 그 서번트라는 아저씨가 말한 진짜 마법사라는 건가요?”
모그니드가 눈을 크게 키워 놀란 표정을 떠올렸다. 서번트라는 아저씨라니.
“부인. 혹시 똑같은 저주에 걸린 사람을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네. 그분이 마법사를 찾으면 눈이 보일 수 있을 거라고 해서 현자님을 찾고 있던 거였어요.”
모그니드가 떨떠름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신기하군요. 저주에 걸린 사람은 굉장히 보기 드문데. 저도 부인을 포함해 여태까지 세 명밖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세 명이요? 저 같은 사람이 세 명이나 더 있다고요?”
떨리는 물음에, 모그니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자가 직접 눈앞에 있다는 걸로도 충분히 놀랄 일인데 자신과 같은 사람을 세 명이나 만났다는 말에 에리얼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저도 모르게 다리가 휘청인 순간. 루스가 깜짝 놀라 에리얼의 뒷목깃을 붙잡아 올렸다.
“부인!”
결벽증 때문에 차마 손대지는 못하겠고, 대신 옷깃을 잡아 에리얼을 부축하려는 의도였지만 목을 감싸고 있던 옷깃이 워낙 뻣뻣해서 에리얼의 목을 조른 셈이 되었다. 까치발을 들고 켁켁거리던 에리얼이 손을 파닥거리며 힘겹게 말을 토했다.
“괜, 괜찮, 켁, 놔, 놔주세요.”
“아니, 저! 쓰러지실까 봐!”
“안 쓰러, 으으! 놔 주, 윽!”
재빨리 손을 놓자 에리얼이 쿨럭거리며 기침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