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루스가 천천히 입매를 끌어당겼다. 가늘게 뜬 눈매 속에 붉은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품고 에리얼을 투영했다.
“부인, 꽤 철이 없으시군요. 앞이 안 보이니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 거고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저주받았다며 돌을 던졌을 텐데요. 공작가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진작에 죽었을 겁니다.”
“그러게요… 그때는 앞뒤 분간 못 하고 집을 나가고만 싶었나 봐요. 가문의 허울이 너무 무거워서 그냥 싫었던 거예요. 그게 저를 보호하는 줄도 모르고… 참. 철이 없었죠.”
“…….”
“감사하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아버지께 괜한 말을 했나 봐요. 난 대체 언제쯤에야 어른이 되려나.”
담담하게 돌아온 답변에 루스가 할 말을 잃고 어버버거렸다. 자신을 비하하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에리얼 스스로를 타박하기 위한 말인 듯싶었다.
이런 타이밍에서는 잔소리보다 공감해주는게 낫겠지. 결론을 내린 루스가 크흠, 헛기침을 내뱉고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뭐… 그런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이상, 귀족가에서 태어났든 평민가에서 태어나든 스스로의 쓸모에 대해서 자책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돌이켜보니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군요.”
“비슷한 경험이요?”
길게 숨을 내쉰 루스가 침대 근처로 바짝 다가와 에리얼 옆에 털썩 앉았다. 몸을 숙여 오른쪽 바지를 걷어 올리며 조금 어두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길드 소속의 단원들은 고아 출신이 꽤 많습니다. 저도 뒷골목에서 구걸로 연명하던 걸 바이올렛 님이 거둬주셨죠.”
“루스가요? 구걸을 해요?”
틱틱거리는 태도는 둘째치고 루스는 교양 있는 말투와 신사적인 행동으로 뒷세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잘나가는 귀족 집안의 둘째 도련님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데 구걸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의심 섞인 눈초리를 던지자 루스가 ‘못 믿겠죠?’ 하고 되받아쳤다. 그리고 바지를 아예 무릎까지 접어 올리더니 오른쪽 다리를 살짝 올려 에리얼 쪽으로 들이밀었다.
“여기 만져보세요.”
“다리를요? 여길 왜… 아니, 만져도 돼요? 사람하고 닿는 거 싫어하잖아요.”
“무릎 아래로는 괜찮습니다. 여긴 살이 아니니까요.”
살이 아니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망설이던 에리얼이 천천히 손을 내려 루스의 무릎을 만졌다. 손을 대자마자 엇, 탄성을 내지르며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루스를 쳐다보았다.
“무… 무릎이 딱딱해요. 이거, 이거 혹시.”
“예. 의족입니다.”
에리얼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떠졌다. 안 그래도 동그란 얼굴에 눈마저 동그란 게 웃겨서 루스가 저도 모르게 푸훗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곱절로 당황한 에리얼을 내버려 두고 루스는 들이밀었던 다리를 다시 아래로 떨궜다.
“이쪽. 허벅지 중간쯤부터 다리가 없거든요. 한 다섯 살 때쯤이었나.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아마 사고로 다리가 이 모양이 됐었을 겁니다.”
“어머나… 어쩜 좋아. 전혀 몰랐어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자연스럽죠? 뭐 요즘은 의족도 잘 나오고, 익숙해졌으니까요.”
태연하게 대꾸하며 루스가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데 부모는 사고당한 아들이 영 버거웠나 봅니다. 그렇게 부모에게 버려지고… 구걸한 지 한 2년 됐던가. 바이올렛 님이 끌고 가서 다리를 맞춰주셨죠. 그렇게 사람 구실하면서 어찌어찌 살긴 했는데.”
새카맣던 루스의 눈동자 속에 더욱 침침한 어둠이 퍼져나갔다.
스스로는 비극이라고 치부하지 않는 과거지만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가라앉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말입니다. 막상 다시 다리가 붙으니 남의 종 노릇하기가 짜증 나더란 말입니다. 예. 부인이 말씀하신 것처럼 혼자 나가살면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고.”
“맞아요, 맞아. 혼자 잘 살 수 있을 거 같고.”
“부인과 다른 점이라면… 저는 실제로 도망쳤다는 거겠네요. 길드의 수임료를 몽땅 챙겨서 수도 밖으로 도망쳤죠.”
에리얼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헉. 그럼 어떻게? 어떻게 됐어요?”
“지금 길드장에게 꼼짝 못 하는 거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바로 붙잡혀서 종신 노예로 살고 있죠.”
흉흉한 내용과 달리 루스의 어조는 고저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맞아 죽지 않은 게 다행이죠.’ 하고 루스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자립심의 발현이 아니라… 반항심의 일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바이올렛이 날 아끼는구나’ 하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도망가면 걱정해주겠지, 찾아주겠지 하는 게 본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반항심….”
“왜, 진짜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응석 부리고 싶어지잖아요. 되도 않는 짓 하면서 그 사람에게 내가 어떤 의미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던 거죠.”
“…아아. 무슨 말 하는지 알 것 같아요.”
무릎 근처를 손으로 쓸어내리던 루스가 에리얼을 마주 보고 픽 웃었다.
“부인께서는 그래도 착하시네요. 생각만 했지 결국 실현한 적은 없잖습니까. 가족들을 골탕 먹인 적이 한 번도 없다니… 과연 귀족은 다른 건가.”
“착하기는요. 그냥 루스만큼 용기가 없었던 거죠.”
쿡쿡 웃으며 대답하던 에리얼이 갑자기 떨떠름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문득, 그녀의 기억 속에 루스와 비슷한 짓을 했던 일이 떠올랐다.
“가족들을 시험해 본 적은 없는데… 백작님에게 비슷한 짓 한 적 있는 것 같아요.”
“얀셀 백작에게요?”
“네. 몇 개월 전에… 조금 오해가 있긴 했는데. 어쩌다 보니 가출해서 북부로 도망치려고 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베르트발드가 자신을 버린 거라고 생각해 북부로 떠나려고 했었다. 놀랍게도, 그때의 심정이 지금 루스가 말한 것과 아주 흡사했다.
루스는 가출이라는 단어에 놀랐는지 ‘허.’ 하고 탄식을 내뱉고서 물끄러미 에리얼을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대범하시네. 그래서요? 중간에 잡혔죠? 그 인간에게 찍혀서 도망친 사람 한 번도 못봤는데.”
“잡혔다기보다는… 제가 스스로 돌아간 거지만요.”
베르트발드가 바다에 빠지는 꿈을 꾼 이후. 항구에서 그를 보자마자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 생각없이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라흐주의 주인이고 이곳의 영주였다. 자신이 아니었어도 주변의 누군가가 반드시 그를 살렸을 것이다. 굳이 자신이 몸을 날릴 필요는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 깊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너무 특별했으니까.
“출발하기 싫어서 미적거리고… 혹시 떠나지 말라고 찾아오지 않았을까 싶어서 선박 수속도 엄청 느리게 받고. 그러네요. 저도 백작님이 찾아와주기를 바라면서 떠난 거였나 봐요.”
“그래서 백작이 찾아왔습니까?”
“네. 항구까지 찾아오셨더라고요. 막 달려오다가 바다에 빠지시고.”
“…진짜요?”
“네.”
“백작이 그랬다고? 진짜?”
에리얼이 고개를 끄덕이자 입꼬리를 씰룩거리던 루스가 이내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박장대소 했다. 그러다 민망한 듯 입술을 깨물고 움찔거리다가 다시 못참겠다는 듯 어깨를 떨며 웃음을 흘려댔다.
“진짜 웃기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도 마차 타고 다니는 집정관께서 부인 찾아서 달려가다 바다에 빠져요?”
루스가 아는 베르트발드는 콧대를 쳐올린 채 귀족 놀이에 심취해 있는, 거만하기가 하늘 끝까지 닿아 있는 인물이었다.
바이올렛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루스와 악연으로 엮인 베르트발드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참 한결같이 재수없었다.
늘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채 눈짓으로만 이것저것 지시해대고 모략을 꾸밀 때 외에는 시종일관 무뚝뚝한 표정을 고수하는, 푸른 피 중에서도 아주 악질적인 푸른 피였다.
그런데 뭐?
세상만사를 돈과 권력으로 짓누르려는 인간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그런 추태를 부리다니.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다.
루스는 파르르 떨리는 입매를 꾹 말아 물고서 베르트발드의 뺀질뺀질한 낯짝을 떠올렸다.
반짝거리는 금발을 느슨하게 뒤로 넘긴 채 반쯤 내리뜬 눈으로 상대를 내려다보는 그 오만한 얼굴. 짙푸른 눈동자에 상대의 동요가 비칠 때마다 슬쩍 입꼬리를 위로 올리는 그 모습.
늘 상황을 주도하는 게 자신이라는 걸 상대방에게 확인시키려는 고약한 인간. 하지만 그 반반한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잔뜩 떠올라 있을 걸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번져 나왔다.
그 목각 인형 같던 인간이 이런 맹한 여자한테 홀릴 줄이야. 그렇게까지 대단한 미인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나 참, 남한테 휘둘리는 거 그렇게 싫어하는 백작이 어떻게 그랬을까. 사람 일은 알 수 없다더니 정말이네요. 역시 아무리 잘난 남자라도 여자한테 눈이 멀면 다 똑같아지는….”
키득거리며 고개를 들어올린 루스가 우연찮게 에리얼과 시선을 마주쳤다.
스르르 입이 다물어지고, 아무 생각없이 흘러나오던 말들이 갈 길을 잃고 다문 입 속에서 바스라졌다.
“그런 식으로 백작님을 시험할 건 없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좀… 부끄럽네요.”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에리얼이 천천히 아래로 시선을 떨궜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묘한 표정으로 아래를 쳐다보는 하얀 얼굴이 어둑한 방 안에서 홀로 고고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전히 불그스레하게 물들어 있는 눈매가 얄쌍하게 위로 올라간 눈꼬리와 어울리지 않게 처연한 느낌을 부여했다. 반사광마저 부옇게 흐린 잿빛 눈동자는 어둠을 묽게 희석해놓은 것처럼 보여 이질적이면서도 어딘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뿜어냈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미인도 아닌데.
흔들리던 눈동자가 천천히 그녀의 얼굴 아래로 이동했다. 새까만 동공 속으로 제 손목보다 더 얇아 보이는 가느다란 목덜미가 흔적을 남겼다. 길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하얀 살결을 부각시켜 금욕적이면서도 야릇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미인도… 아닌데….
목 부근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황급히 떨궜다. 티끌한 점 없는 쇄골 아래, 봉긋 솟아오른 가슴이 얇은 슈미즈로도 감춰지지 않을 만큼 풍만한 곡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몸은 비쩍 말랐는데 어떻게 볼살과 가슴만 저렇게 포동포동할까. 다른 건 다 조그맣던데.
아… 아니지. 이제보니까 눈도 엄청 크네. 코는 작아서 내 취향은 아니지만… 뭐. 나름 귀여운가.
눈동자가 이상해서 잘 몰랐는데 속눈썹 숱 되게 많다. 북부 여자들은 추워서 털이 많다고 들었는데, 눈썹이나 속눈썹도 저렇게 진하구나. 역시 미인이 많은 북부 출신….
…허어. 미인… 아니었던 것 같은데.
미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