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정숙한 부인으로서 외간 남자에게서 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1초, 그러고 보니 루스가 내 호위였구나 하고 납득하는 데 1초, 자는 모습 어쩌고 운운했던 걸 보니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가 본데 하고 의아해하는 데 1초가 걸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렇게 살금살금 움직이는 걸 보니 대체 무슨 일인가 싶은 호기심으로 생각이 귀결되었다.
가만히 눈동자만 굴려 루스의 동태를 살폈다. 들어올 때처럼 소리 없이 문을 닫은 루스는 발소리는커녕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서 은밀히 침대로 다가왔다.
뭘까. 진짜로 엉큼한 짓이라도 하려는 걸까?
우두커니 앉아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던 중 코를 막고 있던 숄이 툭 하고 무릎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기척을 눈치챈 루스가 에리얼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헉!”
커다란 상체가 움찔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가 바닥에 투두둑 떨어졌다. 에리얼을 보고 헉, 허억 하더니 바닥으로 시선을 돌린 후에도 헉! 허억! 하고 끊임없이 신음이 이어졌다.
루스가 쉴 새 없이 바닥과 에리얼을 번갈아 보며 헉헉거리더니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들어 가슴을 꾸욱 눌렀다.
붉은 파동 위로 까만 손바닥 모양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진정된 듯, 그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유, 유유유령인 줄 알았네.”
“루스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 아니 주무시는 줄… 아니 이거 전해주러… 아니. 원래 그렇게 기척이 없으세요? 무슨 우리 길드 암살자보다 인기척이 없… 어라?”
발끝부터 시선을 올려 에리얼을 쳐다보던 루스가 에리얼의 얼굴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날카롭게 치켜올라 간 루스의 눈매 속으로 코와 입, 슈미즈까지 온통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는 에리얼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아니, 무슨…! 무슨 코피를 이렇게 흘려요? 어디 아프십니까?”
“코피요?”
“맙소사! 옷도 얼굴도 엉망이네 아주.”
루스가 쯧쯧 혀를 차며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직접 닦아주려다가 결벽증 때문에 그것까지는 무리라는 듯 떨떠름한 얼굴로 에리얼의 무릎 위에 손수건을 툭 떨궜다.
그러자 에리얼이 고개를 들어 놀란 표정으로 루스를 바라보았다. 하도 털털해 보여서 섬세함 따위는 없을 줄 알았는데, 손수건을 갖고 다니다니 꽤 의외였다.
손수건을 써도 될지 그냥 젖은 숄로 얼굴을 닦을지 고민하다가 손수건을 들어 코를 슥슥 문질렀다. 하얀 손수건이 시커먼 액체로 인해 천천히 검게 물들었다.
“아… 이거. 콧물인 줄 알았는데 피였구나.”
그럼 아까부터 흐르던 게 전부 코피였던 건가?
얼굴을 닦는 손길이 영 어설퍼 보였는지 루스가 ‘어휴, 이리 줘 봐요.’ 하더니 손수건을 뺏어 들고 조심스레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지금은 얼추 멈춘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습니까? 어디 몸 안 좋으세요?”
“소파에서 일어나다가 넘어졌어요. 다리가 엉켜서… 그때 다쳤나 봐요.”
“…씻고 옷을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군요. 달리 다치신 곳이 있을지도 모르니 하녀들을 부르겠습니다.”
“아! 괜찮아요. 부르지 않아도 돼요. 지금은 아프지 않아요.”
에리얼이 다급히 루스를 만류하며 괜찮다 거듭 호소했다. 모두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인데 목욕이니 옷 시중이니 하며 하녀들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모습을 에바가 본다면 또 어디 병난 게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 게 분명했다.
대충 물을 적셔 얼굴을 닦고 옷장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슈미즈로 갈아입었다. 다시 침실로 돌아오니 루스가 바닥에 떨어진 뭔가를 줍고 있었다.
손톱보다 작은 무언가가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작고 동그란… 아마도 구슬 같았다. 루스 곁에 쪼그려 앉은 에리얼이 더듬더듬 손을 뻗어 구슬 하나를 집어 들었다.
“뭐지? 보석인가요?”
“아까 낮에 부인께서 떨어뜨리신 목걸이입니다.”
“아! 목걸이! 어디 갔나 한참 찾았었어요. 어디서 찾았어요?”
“정원에 떨어져 있던 걸 주웠습니다. 끈이 약했나 봅니다.”
액세서리에 큰 관심이 없어서 목걸이를 잃어버린 줄도 몰랐다. 저녁나절, 옷 시중을 들던 비에타가 ‘에메랄드로 만든 귀한 목걸이인데 대체 어디에서 잃어버리신 거냐’며 한탄할 때가 되어서야 목이 휑하다는 걸 알아챘다.
“이거 돌려주려고 방에 들어온 거예요?”
루스가 목걸이의 잔해를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손을 탁탁 털었다.
“귀한 물건인 것 같아서 직접 전해드리려고 했습니다. 설마 아직까지 안 주무시고 계실 줄은 몰랐지만. 어서 주무세요.”
루스가 턱짓으로 침대를 가리키며 얼른 자라는 듯 눈치를 줬다. 에리얼은 잠자코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었다.
차분하게 에리얼을 살피던 루스가 램프를 끄기 위해 협탁 근처로 다가왔다. 그러다 그녀의 뺨을 쳐다보고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흐끅거리는 소리가 날 때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얼마나 울었길래 뺨이 이래요.”
퉁퉁 부은 눈을 가리키며 루스가 쯧쯧 혀를 찼다. 무의식적으로 눈가를 비비적거리던 에리얼이 위화감을 깨닫고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 우는 소리 들렸어요?”
“…아니요.”
“혹시 루스, 계속 문 앞에 서 있던 거예요?”
루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다 다시 홱, 고개를 돌려 에리얼과 시선을 맞췄다.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지만, 주무시는 동안 목걸이를 놔두고 가려다가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것뿐입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조용하길래 드디어 주무시는구나 하고 들어온 거였고요.”
코에 숄을 쑤셔 박고 멍하니 앉아 있던 때를 말하는 듯싶었다. 차분하던 에리얼의 얼굴 위로 스멀스멀 경악의 빛이 퍼져나갔다.
설마 아버지와의 나눈 대화도 다 듣고 있었던 걸까. 아무 생각 없이 냅다 내지른 말들이 얼마나 많은데. 패륜아가 따로 없었는데.
해명을… 해명을 해야 해.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 반지. 분명 나 혼자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는 걸로 보였을 텐데. 미친 여자라고 오해하는 거 아닐까?
허옇게 일어난 뺨에 천천히 홍조가 퍼져나갔다. 달궈진 뺨을 식힐 새도 없이 에리얼이 손을 휘휘 저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 호, 혼잣말한 게 아니고! 미친 게 아니라!”
“…예에….”
“바바반지를! 반지가! 그 뭐냐 그, 마법의 반지가 있거든요?”
“격고의 반지겠죠. 경매 출품 리스트를 확보해 백작님께 넘긴 사람이 저니까 변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리얼이 입술을 말아 물며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매장에서 어렵게 구한 물건이라고 들었는데 그 정보를 알려준 사람이 루스인 모양이었다.
다행히 미친 사람 취급은 면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것도 잠시, 루스가 묘한 눈빛으로 에리얼을 바라보며 흘리듯 말문을 뗐다.
“부녀 사이가 좋으신 줄 알고 있었는데요.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네?”
“그, 아버지께 하는 단어가 워낙 과격하시길래.”
허억, 역시 다 듣고 있었구나!
뭐라고 둘러대면 좋을까 고민하던 에리얼이 어색하게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게, 저기… 아버지를 그렇게 싫어하는 건 아닌데. 그냥 뭐. 부모 자식 사이에 이럴 때도 있죠. 루스도 부모님과 싸울 때 있잖아요, 그쵸?”
“저는 고아라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싸늘한 침묵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아이고, 이걸 어쩜 좋아. 차라리 말을 하지 말걸!
이불을 쥐어뜯던 에리얼이 ‘미안해요.’ 하고 사과하자 루스가 놀란 듯 어깨를 움찔했다.
“사과 받으려고 드린 말씀은 아니고… 음. 뭐 집안마다 각자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냥, 겉으로 보기에는 부녀 사이가 좋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체면이 있으니까 밖에서는 사이좋은 척해요. 엄청 가식적이죠….”
루스는 고개를 삐딱하게 세운 채 유젠 아이기스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으로 나열했다.
성격적 특성에 저돌적임, 오만함, 독선적임이 쓰여 있었는데, 실제로 만났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하긴. 공작님께서 성격이 꽤 강한 분이신 것 같긴 했습니다. 그런 분이 아버지라면 감당하기 좀 힘들겠네요. 그래서 부인께서 공작님과 성격이 정반대인 건지….”
“그쵸? 저는 아버지처럼 무뚝뚝하고 이기적이지 않거든요. 착해요.”
“아… 아니다. 공작님과 부인, 둘 다 저돌적인 면은 좀 닮은 것 같기도 하네요. 독선적… 이건 어떠려나. 비슷하려나.”
담백한 비아냥에 에리얼이 미간을 추어올리며 물었다.
“루스… 나 칭찬하려는 거 아니었어요?”
루스는 대꾸 없이 바닥을 쳐다보았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달이 밝네요.’ 하고 말을 돌렸다. 능청스러운 태도에 에리얼이 허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루스가 바닥으로 떨군 시선을 들어올려 에리얼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시무룩한 표정이 퍽 재미있어 저도 모르게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역시 이 여자는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루스는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단속하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여하튼, 계속 생각해봤자 우울하기만 하면 생각을 끊어내는 게 답입니다. 그게 자괴감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 그렇죠. 그러니 부인께서는 공작님이고 뭐고 그만 생각하시고 이만 주무시죠.”
루스는 창가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침대 기둥에 묶여 있던 커튼을 풀어 내렸다. 침대에 내려앉던 푸른 빛이 조금 더 어두운 빛으로 농담을 달리했다.
푸른 비단이 덧대어진 이불 아래, 희다 못해 창백한 피부의 에리얼이 오늘따라 유독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루스는 커튼을 옆으로 잡아당기며 달빛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했다.
“어렸을 때 그런 생각한 적 있어요.”
이불 끝을 바라보고 있던 에리얼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불분명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너무너무 밉다가… 나중에는 다른 것도 다 싫어지더라고요. 공작가에서 태어나지 않았었으면 좋았겠다고. 가족도 부모도 다 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어요. 아무도 없는 데서 그냥 나 혼자 살아가고 싶다고… 내 힘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자주 있었어요.”
“흠.”
“아, 물론 티 낸 적은 없어요. 그냥… 다른 사람들에게 짐만 된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차라리 부모 없이 태어났다면 나 혼자 잘 살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죠.”
“…허. 저처럼?”
“루스처럼.”
루스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모호한 눈길로 에리얼을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