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노스라이드의 부길드장으로서. 루스는 본의 아니게도 에리얼과 베르트발드의 인연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인연뿐이 아니라 대부분의 정보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가 길드원이 되어 정식으로 맡은 임무 또한 공녀에 대한 정보 수집이었으니까.
얀셀 백작의 사찰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아이기스 공녀의 파혼이 어떤 배경으로 이루어진 건지, 그들이 단순히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까지 모두 루스의 머릿속에 담겨 있었다.
공녀에 대한 베르트발드의 집착은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루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찻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인께서는 다른 사람과 결혼했어도 잘 사셨을 겁니다.”
“의미 없는 가정이네요. 백작님 외에는 받아줄 사람도 없었는걸요.”
자조 섞인 웃음을 듣고서 루스가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원래대로였다면 파혼당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쓸데없는 가정은 아니죠.”
달그락, 차받침에 내려앉은 찻잔이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파혼이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에리얼이 미간을 찡그렸다.
“…루스. 꼭 뭔가를 아는 것처럼 말하네요.”
티 테이블을 바라보던 에리얼이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루스 콘텔라렌. 정체가 뭔지 궁금해 바이올렛에게 물었을 때 청새매의 단장으로 현재 길드를 이끄는 실질적인 리더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다부진 체격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문득, 저택을 떠날 때 바이올렛이 한 말을 떠올렸다.
「모르는 거 있으면 이놈한테 물어봐. 웬만한 건 다 알고 있거든.」
그 말대로 눈앞의 무뚝뚝한 남자는 모든 화제에 대해서 물 흐르듯 대답했다. 루스의 화법은 밑바탕에 확실한 논리와 정보를 깔고서 선포하듯 말을 읊는 스타일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담담한 태도에서 거짓말이나 농담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내게 무슨 말을 이끌어 내고 싶은 거지? 속내를 가늠하던 에리얼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루스는 백작님만큼 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죠? 그럼 파혼 얘기 하는 거 싫어하는 것도 잘 알 텐데 왜 그런 말을 꺼내요?”
“그건.”
“난 루스가 싫지 않은데 이런 이야기는 루스를 싫게 만들어요. 나에 대해서 대체 뭐가 못마땅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분간 같이 있어야 하니까 서로 좋은 얘기만 하도록 해요. 알겠죠?”
부드럽게 타박하며 에리얼이 루스의 잔에 차를 따랐다. 그녀답지 않은 단호한 어조에 루스 또한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머쓱하게 대꾸하며 루스가 제 뺨을 쓱쓱 쓸었다. 새까만 눈동자 속에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정보원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정보를 찾아 의뢰인에게 넘겨주는 것뿐이다. 가진 정보를 제멋대로 해석해서 쏘삭이는 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금기였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룰을 어긴 적이 없었는데.
…하지만 에리얼을 보고 있으면 씁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뱀 같은 얀셀 백작과 눈앞의 토끼 같은 여자는 아무리 봐도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어울리고 자시고를 떠나서 백작은 여자를 속이고 기만해 제 것으로 만들었다.
정보에 있어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옳고 그름을 걱정하는 건 제 몫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에리얼이 자신과 같은….
“복숭아 냄새.”
코를 킁킁거리던 에리얼이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울했던 인상이 밝아지고, 그녀의 시선이 먼 곳으로 옮겨감과 동시에 루스의 상념도 모래처럼 흩어져버렸다.
“오늘 납작 복숭아 따서 잼 만든다고 했는데. 부엌에서 나는 냄새인가 봐요.”
우와 냄새 좋다 하며 에리얼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한 박자 늦게 자리에서 일어난 루스가 속으로 자신을 타박하며 느릿느릿 발을 움직였다.
발치를 따라 이어지던 시선이 문득 바닥에 떨어진 물건에 닿았다.
“…웬 목걸이지.”
실이 끊어져 이리저리 흐트러진 목걸이였다. 데구루루 바닥을 구르던 비즈가 루스의 발에 부딪혀 반대쪽으로 다시 데굴데굴 굴러갔다.
표정 없는 얼굴로 비즈를 쳐다보던 루스가 이내 주섬주섬 잔해들을 줍기 시작했다. 눈에 익다 싶더니만, 방금 전까지 에리얼이 차고 있던 목걸이였다.
“칠칠맞지 못하게 끊어진 것도 모르고… 하여간.”
작게 투덜거리며 손안에 담긴 투명한 비즈들을 바라보았다. 작지만 알알이 빛을 내는 보석들이 왠지 모르게 그녀의 잿빛 눈을 떠올리게 했다.
* * *
루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막상 에리얼의 머릿속은 그가 중얼거린 말로 꽉 차 있었다.
베르트발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고 말했지. 그리고 곧장 파혼 이야기를 꺼냈다.
원래대로라면 파혼할 필요가 없었다니….
그 말은 꼭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파혼을 조장했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마도.
“아니, 아니지.”
백작님이 무슨… 말도 안 돼.
속으로 읊조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귀족들의 결혼이라는 게 워낙 많은 이해타산이 얽혀 있는 만큼 에리얼이 파혼당한 이유 또한 여러 가지였다. 새로운 약혼녀가 생겨서, 혹은 갑자기 가세가 기울었다든가 비리로 고발당해 작위가 박탈되든가.
타이밍이 묘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제각각 어쩔 수 없는 사정이었다. 누군가가 작정하고 훼방 놓기에는 지나치게 스케일이 큰 일들이었다. 누가 계획했다고 해도 우스운데, 그걸 베르트발드같이 아쉬운 것 하나 없는 사람이 그랬다니.
“말도 안 돼.”
창가에 놓여 있던 보석함에서 격고의 반지를 꺼내 들었다. 가운데 박힌 사파이어가 달빛을 반사해 푸르게 빛났다. 반짝반짝 빛이 부서지는 모습을 감상하던 에리얼이 조심스레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오늘은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럼에도 끼고 있으면 그와 이어져 있는 것 같아서 조금 위로가 되었다. 손가락으로 반지를 더듬다가 사파이어 부분을 동그랗게 덧그렸다.
뚜우, 뚜우, 솔부엉이 우는 소리가 파도 소리와 함께 귓가를 스쳤다.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차게 식고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렇게 밤의 정적에 조금 더 익숙해졌을 때쯤.
갑자기 머릿속에 후우웅, 거센 바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응?”
-…음?
듣는 것만으로도 한기가 느껴지는 북부의 바람 소리 너머,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착각이 아니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안절부절못하던 에리얼이 사파이어에 손가락을 대고 말을 이었다.
“백작님?”
-에리얼?
깜박거리는 눈꺼풀 아래, 불투명한 잿빛 눈동자가 조금 더 맑은 빛으로 반짝였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가고 발랄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와. 진짜 백작님이다.”
-…그러네. 진짜 에리얼이네.
하아, 짧은 숨소리와 함께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주머니에 넣어놨다가 혹시나 싶어서 끼워봤는데. 운이 좋았네요. 오늘은 기다리지 말라고 했는데… 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요?
“그냥 조금, 잠이 잘 안 와서요. 백작님은 뭐 하고 계셨어요?”
-음….
끄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나직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어쩌다 보니 각하와 대작하게 되어서 말입니다. 정신 차리려고 발코니에 나왔습니다. 생각보다 술이 엄청 세시네요. 이대로는 못 이기겠는데.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어딘지 평소와 다르다 싶더니 공작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모양이다. 에리얼이 미간을 좁히며 반지를 누르고 있던 손가락에 꾹 힘을 주었다.
“아버지 따라서 술 드시면 안 돼요. 엄청… 드실 텐데. 백작님 몸 상하면 어떻게 해요.”
-아… 이런. 어쩌죠. 이미 너무 많이 마셔서 쓰러질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갑자기… 잠이… 쏟아지는….
“헉! 겨, 겨울에 거기서 주무시면 죽어요…!”
-남부 출신이 북부에서 얼어 죽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으려나….
점점 작아지다가 꺼질 듯 들려온 목소리에 에리얼이 발끝을 오므린 채 허벅지를 달달 떨었다.
이 시기의 북부는 연어를 걸어두면 삼십 분도 안 되어서 흉기로 변할 만큼 추위가 엄청났다. 탄탄한 몸집의 베르트발드라면 연어보다는 좀 더 늦게 얼겠지만 몇 시간이나 발코니에 있으면 쓰러진 모양 그대로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으음, 으으음, 끙끙대는 신음을 들은 베르트발드가 들릴 듯 말듯 목을 울렸다.
-농담도 못 하겠네. 각설하고. 좋은 소식이 있고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떤 거부터 전해줄까요.
“…나쁜 거 먼저 듣고 좋은 걸로 희석할래요.”
잠시만요, 소리가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배경처럼 이어지던 바람 소리가 사라지고 타닥거리는 장작불 소리가 자리를 대신했다.
실내로 들어온 걸까. 적어도 발코니에서 얼어 죽지는 않겠구나 하며 에리얼이 속으로 안도할 때였다.
-각하께서 산에 올라가면 안 된다고 결사반대를 하십니다. 저뿐만 아니라 각하께서도 못 올라간다고 으름장을 놓으시네요.
“이상하네요. 원래 이 시기에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개방할 텐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흐릿한 말미에서 씁쓸한 감정이 느껴졌다.
-안 된다고만 말씀하셔서 올라가고자 한 이유를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으시더군요. 그래서 설득하다가….
솔직한 이유? 성수 가지러 간다고 하더니 이유가 따로 있던 건가?
의문이 들었지만 어차피 설야의 축복과 관련된 일이겠거니 생각하며 에리얼은 담담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술을 꺼내오시길래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이렇게 됐네요.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베르트발드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건 현재진행형이고. 일주일 뒤에 돌아갈 테니 그 전까지 어떻게든 설득해봐야겠죠. 일단 나쁜 소식은 이렇습니다.
“그럼 좋은 소식은요?”
-좋은 소식….
짤막한 침묵 뒤로 유리가 어딘가에 부딪히는 듯이 맑은 소리가 났다.
뭔가를 마신 것 같은데… 술인가? 에리얼의 추측은 조금 더 낮아진 그의 목소리로 확신이 되었다.
-아… 생각해보니까 이건 나한테만 좋은 소식인가.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을 드디어 가보게 되었거든요.
“어디를요?”
-당신 방.
너무 태연히 얘기하길래 잘못 들었나 싶었다. ‘설마 제 방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되물으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