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아름다울수록 가시가 있다는 말이 사내놈에게도 해당될 줄은 몰랐다. 유젠은 입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작게 혀를 찼다.
벽난로 불빛을 바라보던 베르트발드가 뒷짐을 진 채 유려한 미소를 떠올렸다. 타닥, 장작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각하께서도 바쁘실 테니 본론만 여쭙겠습니다. 톨르트가 산맥 북쪽, 나흐트필에 가려고 합니다만 산에 올라가려면 각하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허가를 부탁드립니다.”
“나흐트필은 왜?”
베르트발드는 에리얼이 말해준 의식을 떠올렸다.
“설야의 축복… 이라고 하던가요. 성수를 받으러 갈까 합니다. 마시면 눈이 낫는다고 해서 결혼 전까지 매년 마셨다고 하던데, 올해는 제가 선물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현자니 뭐니 하며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 필요는 없었다. 마법사 이야기가 나왔을 때 대부분의 반응이 어떻던가. 당장 베르트발드 자신만 해도 코웃음을 치며 헛소리로 치부했었다.
이제는 신화로만 남겨진 것들. 유젠에게 이야기해봤자 미친놈 취급이나 받고 말겠지.
“성수를 받으러 간다고….”
유젠이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비스듬히 고개를 세웠다. 미간을 좁힌 채 골몰하는 모습에서 어딘가 마뜩찮은 기색이 느껴졌다.
“성수는 내가 구해다주겠네. 기별을 넣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갖다 줄 수 있으니 자네는 성에서 기다리게.”
“굳이 신경 써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왜? 꼭 직접 가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변명을 이어가려던 베르트발드가 유젠과 얼굴을 마주한 순간 묘한 기색을 눈치채고 입을 닫았다.
유젠은 한껏 미간을 찡그린 상태로 한쪽 입꼬리를 슬그머니 끌어당겼다. 웃는 건지, 아니면 화를 내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턱 근처를 배회하던 손이 벽난로 옆의 부지깽이로 이동하고, 유젠은 느린 손길로 벽난로의 재를 긁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허가할 수 없네. 그 산은 아무도 못 가. 자네도, 나도.”
* * *
새해를 맞이한 백작가에서는 액막이 축제가 한창이었다.
앞치마와 주머니에 나뭇가지를 꽂고 다니던 사용인들은 새로운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새하얀 백참나무 가지를 들고 ‘좋은 한 해 되세요.’ 하며 상대의 어깨를 두드리기 바빴다. 장난스레 인사를 건네는 사용인들의 얼굴 위로 새해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흘러넘쳤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 반하듯 에리얼은 시들어가는 시금치처럼 축 처진 꼴로 정원 벤치에 널브러져 있었다.
“부인.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곁을 지키고 있던 루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벤치 뒤로 고개를 홱 꺾은 채 늘어져 있던 에리얼이 미간을 찡그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조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새벽에 잘 계시는지 확인했을 때는 잘 주무시고 계셨던 것 같던데요. 잠버릇은 좀 험하신 것 같았습니다만.”
에리얼이 켁, 개구리가 짜부라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나 이상한 잠버릇 없는데요. 엄청 얌전하게 자는데… 아니, 그보다 함부로 방에 들어오면 안 돼죠. 루스가 나한테 허물없어진 건 다행이지만 아쉽게도 난 유부녀인걸요.”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이상 없나 확인하려고 잠시 들어갔을 뿐입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씹듯이 내뱉고서 루스가 활활 타는 듯한 눈으로 에리얼을 노려보았다.
맹한 것 같으면서도 한 마디도 안 지는 게 영 못마땅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에리얼은 그의 못마땅한 표정을 볼 수 없어 ‘아 그런가.’ 하고 말 뿐이었다.
졸린 얼굴로 앞을 응시하던 에리얼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자꾸 그 꿈을 꿔서 잠을 설치네요. 또… 같이 자다가 혼자가 되니까 영 잠이 안 와요. 요즘은 연락도 잘 안 하시고. 바쁘신 걸까요.”
“얀셀 백작 말입니까?”
“네.”
뚫어져라 에리얼을 쳐다보던 루스가 희미하게 미간을 구기며 질문을 던졌다.
“신기하네요. 부인은 그 남자가 좋습니까?”
에리얼이 벤치에 기대놨던 지팡이를 붙잡았다. 날아온 질문은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울만치 노골적이었다. 질문의 의도를 가늠하던 에리얼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좋아하죠.”
“왜요?”
“남편이니까요.”
루스가 찡그린 눈매를 들어 에리얼을 쳐다보았다. 붉은 눈동자 속에 출처를 알 수 없는 고까운 감정이 차올랐다.
“귀족들에게 결혼은 의무 아닙니까. 결혼 전부터 정부를 끼고 있는 귀족들이 태반이고요.”
“에이… 백작님은 안 그러세요.”
“여자관계 깨끗한 건 인정하겠습니다만 그렇게 철석같이 믿을 만큼 깨끗한 사람도 아닙니다. 부인께서는 부군을 잘 모르고 계시는군요.”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가 또 화가 나서 시비를 거는 걸까. 에리얼은 지팡이로 바닥을 두어 번 톡톡 두드린 다음 평온을 가장하며 물었다.
“루스는 백작님을 잘 아나요?”
“어린 시절부터 마주쳐서 아마 부인보다는 더 잘 알 겁니다.”
“루스가 보는 백작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혼하고 싶어지실 텐데요.”
손을 뒤로한 채 정중히 서서 하는 말이라기에는 다소 거칠고 경박한 언사였다. 에리얼은 고개를 한껏 위로 올려 루스의 얼굴로 시선을 던졌다.
“루스는 못마땅한 게 참 많네요. 강박증을 인정하는 게 힘든 일이라는 건 알지만, 애먼 곳에 화풀이하는 건 좋지 않아요.”
“…예?”
“그런 건 마음의 문제래요. 저도 얼마 전까지 비슷한 일로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남을 미워하는 건 아무 도움도 안 돼요. 화가 날 때에는 좋아하는 걸 떠올리면서….”
“아니, 아니요. 무슨, 강박증이요?”
에리얼이 대답 대신 두 손을 비벼 씻는 시늉을 했다. 양손으로 제 몸을 끌어안았다가 히익,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X자를 만들기도 했다.
발칵 화를 내고자 했던 루스가 이어지는 마임에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 꼴을 쳐다보았다. 시선을 응수하며 에리얼은 애써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불안 장애였는데 약 먹고 좋은 생각 많이 하고, 푹 쉬니까 나았어요. 그러니까 루스도 기왕 저택에 있게 된 거 그냥 쉰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좀 내려놔요. 좋게좋게 생각하다 보면 강박증도 사라질 거예요.”
“…강, 강박증.”
“우리 같이 차 마실까요? 그 꽃 차 루스도 좋아하죠? 망고 케이크도 엄청 맛있게 먹던데 갖다 달라고 할까요?”
에리얼이 활짝 웃으며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게 좋아요? 뭐 먹고 싶어요?’ 물어보는 꼴이 딱 토라진 어린아이를 달래는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대체 어디부터 트집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던 루스가 후다닥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할 말은 많지만 우선 정정하자면 전 강박증이 아닙니다.”
“아닌가요? 계속 손 씻고 남이 만지면 싫어하고 물건 흐트러지는 것도 엄청 싫어한다고 들었는데요.”
“…병이라고 할 만큼 심한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뭐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하지만 애먼 곳에 화풀이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저는 부군에 대해서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리고!”
하아, 길게 한숨을 내뱉은 루스가 짓씹듯이 말을 이었다.
“저는 망고 케이크보다는 복숭아 케이크가 더 좋습니다.”
놀란 얼굴로 그의 말을 경청하던 에리얼이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즉시 하녀들에 의해 티 세트가 차려지고 복숭아 케이크와 망고 케이크가 루스 앞에 놓여졌다.
딱히 차를 마시고 싶어 말을 덧붙인 건 아니었으나 루스는 속이 타는 걸 삼키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용소화인지 용설란인지 영 어려운 이름의 꽃 차가 달콤한 향을 풍기며 답답함에 들끓는 속을 달래주었다.
“전 백작님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어요.”
투명한 유리 포트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에리얼이 살짝 웃었다.
“루스의 말처럼 아마 저보다 루스가 더 백작님을 잘 알겠죠. 저는… 가문만 보고 이루어진 결혼이었으니까.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백작님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몰랐어요. 백작님이 하시는 일도, 영지 일도…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했어요.”
여러 번 파혼을 겪으면서 상대를 알아보는 게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얀셀이라는 이름은 종종 듣긴 했지만 그저 사교계에서 꽤 이름 있는 남자에게 팔려가는구나,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결혼했다. 애초에 결혼이란 게 에리얼의 의사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때는… 파혼에 지쳐서.
내세울 거라고는 아이기스 공녀라는 허울 하나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외면당한 것 같아 자괴감에 몸부림칠 때였다. 혼담도 뚝 끊겨 더 이상 앞길이 요원해졌을 때쯤, 구세주처럼 등장해 청혼장을 던진 사람이 베르트발드였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때는 그를 알고 싶은 마음도, 의지도 없었다. 그저 집을 떠나 제 쓸모를 증명하고 싶었다.
회색으로만 가득 차 그 어떤 감동도 주지 못하는 시야처럼 에리얼의 미래도 탁하고 어둡기만 했다. 결혼 생활도 그 미래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식이 끝나면 더 이상 얼굴도 마주치지 않겠지.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별장 같은 데로 내쫓길 테고, 그다음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매일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될 것이다. 긴 하루를 보낸 뒤 쓰러지듯 잠들어, 꿈속에서 안식을 찾는 그런 침침한 미래가.
“…그때는 그랬는데.”
어둠에 잠긴 미래를 구제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베르트발드였다.
처음에는 동정인가 싶어 의심했지만 그는 진심으로 에리얼을 아꼈다. 게다가 일방적으로 베풀기만 하는 게 아닌, 여자로서의 에리얼을 갈구해주었다.
“사실, 지금도 백작님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어쩔 수 없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좋지 않은 일은 의도적으로 숨기시니까… 하지만 그건 저도 똑같으니까 비난할 수는 없어요.”
좋아하는 만큼 부끄러운 일면은 숨기고 싶은 마음. 사람이라면 모두 갖고 있는 본능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것처럼 베르트발드 또한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깨끗한 일만 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걸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딱 알 만큼만 알아요.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잘 살 정도로만. 물론 표면적인 정보는 루스가 훨씬 더 많이 알겠지만….”
“아니, 아니오. 제가 말씀드린 건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답답한 마음에, 루스가 복숭아 케이크를 포크로 뭉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