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린 음성이 뇌리를 가득 메웠다. 분명, 귀가 아닌 머릿속에 전달된 목소리였음에도 귓가가 화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백작님한테 뺏겼어.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의 말을 되씹던 에리얼이 망설임을 거두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백작님도요. 다른 사람들한테 너무… 상냥하게 굴면 안 돼요.”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냥해 보입니까.
“그야 사교계에서도 워낙 유명하셨으니까.”
베르트발드가 웃음을 흘리며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신사에게 매너란 테이블 냅킨과 같습니다. 딱히 없어도 식사하는 데 문제는 없지만, 갖추지 않으면 교양 없다는 비난을 받지 않습니까. 결국 상냥한 모습도 탈착 가능한 허울일 뿐이지요.
끄는 듯한 목소리에 설핏 염세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베르트발드는 곧장 경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중에게 예의를, 그러나 진심은 단 한 사람에게. 극작가 칼 베인슈너의 명언이지요. 제 지론이기도 합니다만… 제가 진심을 내보일 단 한 사람은 누구인 것 같습니까.
나긋하게 이어지는 문장 끝에 실낱같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에리얼은 붉어진 눈가를 가리려 반사적으로 눈매를 슥슥 문질렀다. 볼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괜히 부끄러웠다.
대답을 바란 게 아니었던 듯 베르트발드는 작게 웃으며 그만 가보겠습니다 라고 마지막 전언을 남겼다. 동시에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소음들이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훅 하고 사라졌다.
웅성거림도, 파도 소리도 모두 사라져 텅 빈 뇌리에 그의 음성들이 여열처럼 남아 있었다. 에리얼은 뜨거워진 뺨을 문지르다가 양 무릎 사이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아으.”
쌓이고 쌓인 대화들이 허용 범위를 넘어 밖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다.
여기,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정말 심장 소리는 맞는 걸까. 그가 건넨 문장들이 형태를 이루어 심장을 대신해 달각달각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가슴 부근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그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모든 말들이 봄볕 같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에리얼을 따스하게 감싼 말은 하나였다.
「모두 무사할 수 있던 것도, 제가 추궁을 면하게 된 것도 전부 부인 덕분입니다.」
진중한 음성으로 찬사를 던지는 그의 모습이 보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눈앞에 그려졌다. 장난기 따위 없이 정말 진지하게, 베르트발드는 영주로서 에리얼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태껏 에리얼이 숨기기 급급했던 망할 예지몽이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고. 덕분에 모두가 살 수 있었다고…
고맙다고.
“나 때문이 아니라, 내 덕분이라고.”
비슷한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어감으로 느껴지는 말들. 자신을 타박하는 게 아닌 독려하는 그 말에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그는 알고 있을까.
고개를 들어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손에 끼고 있던 반지가 뺨에 닿아 미지근한 온도로 달아올랐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공기,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과 사그락거리며 이마를 가리는 머리카락까지.
모든 게 아득하면서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 * *
겨울의 북부는 춥다는 말로 표현하는 게 우스울 만큼 무척이나 싸늘하고 황량했다.
추수가 끝나 허허벌판인 밀밭에는 낡은 허수아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삭막한 툰드라 지대 너머 낮은 관목으로 이루어진 삼림이 넓게 시야를 차지했다.
지평선 근처의 풍경은 이렇듯 찬기만 가득했지만 시야를 아래로 이동하자 인파들이 웅성거리는 시가지가 나타났다.
공작성이 있는 테오 아이기스는 북부의 거점 도시답게 튼튼한 성벽과 잘 정비된 거리로 아이기스 공작의 수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북부가 춥고 배고픈 도시라니, 모두 옛말이었다.
시가지를 내려다보던 베르트발드가 옷깃을 여미며 창가에서 몸을 떼어냈다. 반들반들하게 닳은 창틀은 아무런 장식도 없이 투박하기만 했지만 그 자체에 내포된 세월의 무게로 묵직한 중압감을 선사했다.
제국의 역사보다 오래된 성. 물론 대륙 전체를 통틀어 제국보다 역사가 오래된 구조물은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기스 공작성은 주인의 유명세에 힘입어 제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건축물의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
겨울을 고스란히 녹여낸 듯한 바깥 풍경과 달리 방 안은 훈훈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베르트발드는 벽난로 근처로 다가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벌써 오후 세 시가 넘었다.
성에 도착한 지 하루가 지났지만 공작이 부재중이었기에 만나지는 못했다. 그를 만나야 진전이 있을 텐데, 오늘 안에 돌아온다고 했건만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백작님. 방금 막 바이올렛 님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만.”
베르트발드보다 한발 늦게 공작성에 도착한 바이온이 케이프 안을 뒤적여 서신을 내밀었다. 잠깐 사이에 또 눈이 내린 건지 케이프 위에 쌓여 있던 눈이 투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성의 없이 봉투를 뜯은 베르트발드가 표정 없는 얼굴로 서신을 읽어내렸다. 초조한 얼굴로 그를 살피던 바이온이 베르트발드를 닦달했다.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교차 검증. 소개했던 해제술사 외에도 거기 소속된 다른 현자를 찾아냈다는데, 똑같이 나흐트필 북부에 거점이 있다고 했다는군. 뭐… 헛걸음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인데.”
“말을 흐리시는 걸 보니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만.”
“나흐트필의 북쪽 루트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는군.”
케이프를 벗고 옷매무새를 살피던 바이온이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맞췄다.
“등반 루트를 모르면 무용지물 아닙니까. 그 산이 얼마나 큰데… 게다가 북쪽에는 빙하뿐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저희가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진지하게 충언했지만 베르트발드는 듣는 둥 마는 둥 편지를 접어 품 안에 대충 쑤셔 넣었다. 지그시 벽난로를 쳐다보다가 다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느릿한 손길로 시계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태연한 반응이 영 못 미더웠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재차 물어보려던 찰나, 베르트발드가 몸을 틀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일세.”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성의 주인이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건넸다. 베르트발드는 특유의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각하.”
아이기스 공작, 유젠 아이기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냉기가 서린 눈동자가 재빠르게 베르트발드의 전신을 훑었다.
악수한 손에 강한 악력이 느껴져 베르트발드는 웃는 얼굴로 그보다 더 강하게 그의 손을 옥죄었다. 온화한 분위기 속 거친 기류를 느끼지 못한 건 난로 앞에 서 있던 바이온뿐이었다.
“나눌 이야기야 많겠지만 신변잡기를 하려고 북부까지 온 건 아닐 텐데. 그래서? 이 먼 곳까지 어쩐 일로 왔나.”
유젠이 벽난로 위에 놓인 시가 케이스를 열더니 베르트발드에게 시가를 내밀었다.
로열 베리타스, 담배초에서 한두 장밖에 나오지 않는 메디오 티엠포가 아낌없이 들어간 최고급 시가였다. 라벨을 확인한 베르트발드가 아쉽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시가를 거절했다.
“로열입니까. 아쉽지만 각하께 양보하겠습니다.”
“담배 태우지 않았던가?”
“끊었습니다.”
유젠이 살짝 눈썹을 치켜들고서 묘한 눈길을 쏟아냈다. 그가 아는 베르트발드는 살롱과 클럽에서 마주칠 때마다 늘 느슨한 모습으로 한 손에 시가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성장한 옷차림과 다르게 가볍게 흐트러진 백금발. 그 아래 가늘게 접힌 푸른 눈.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린 채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모습은 경건하리만치 잘생겨서 바라보는 이를 단숨에 매료시켰다.
본성을 따라 할 수 없다면 그를 꾸미는 허울이라도 따라 하고픈 게 인간의 본능이다. 귀족들은 알게 모르게 베르트발드의 커프스 단추, 행커치프, 크라바트, 구두 등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유행했던 아이템은 단연코, 지금 유젠이 들고 있는 로열 베리타스였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제국 내에서 유통되는 시가는 불순물이 섞인 저급품이 대다수였다. 때문에 담배를 즐기는 귀족들은 시가보다는 파이프 담배를 선호했다.
아주 오랫동안 시가는 졸부나 상인들이 즐기는 싸구려라는 인식이었지만, 베르트발드가 시가를 물고 다니면서부터 파이프 담배는 순식간에 과거의 유물로 전락했다.
사교계의 총아로서 굳건한 위치를 자랑하는 얀셀 백작이니만큼 다른 귀족들이 그를 따라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순리에 가까웠다.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베르트발드를 따라 로열 베리타스의 시가를 물고 다녔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시가의 맛을 알게 된 귀족들은 앞다퉈 로열 베리타스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열 베리타스는 한 해에 오백 상자밖에 생산하지 않는 고급품이었다.
끝없이 붙는 프리미엄을 참다못한 귀족들은 그보다 낮은 품질의 블루 베리타스를 찾기 시작했고, 귀족들의 모습을 동경하는 시민들에게 블루 베리타스는 계급을 상징하는 단어로 자리매겨졌다.
불과 5년 사이에 담배 시장의 시류가 완전히 뒤집혔다. 시가를 쳐다보던 유젠이 쓴웃음을 지으며 케이스에 시가를 다시 집어넣었다.
누가 알까. 그것들이 전부 저 백작 놈의 농단이었음을.
로열 베리타스. 블루 베리타스와 블랙 베리타스까지 베리타스사의 독점 무역권을 손에 거머쥐고 있는 사람이 바로 얀셀가라는 사실을.
고작 담배 하나만 실어 나르는데 백작가의 상단은 엄청난 이익을 얻고 있었다. 담배뿐이던가. 얀셀가는 무역 연합 세퍼에이드의 최대 주주로 남부에서 오는 럼과 메스칼, 향신료와 캐시미어에 이르기까지 서른 개에 가까운 사치품과 특산품을 독점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부를 쌓고 있었다.
“담배를 이렇게 쉽게 끊다니. 백작도 꽤 강단 있는 사람이군.”
“가끔 생각날 때도 있습니다만 에리얼이 환절기마다 잔기침을 해서 말입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한데 혹시나 싶어서 피울 수가 없겠더군요.”
가늘게 뜬 눈을 곱게 접어 웃는 얼굴이 천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근사한 껍질과 달리 속에는 아가리 벌린 구렁이가 수백 마리는 들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놈이었다.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제 딸에게 들러붙어 하는 짓이란 전부 평범의 범주를 벗어난 것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