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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108화 (108/145)

108화

싫다는 사람에게 애써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 설득하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때문에 에리얼은 자신을 싫어하는 이들에게 맞서는 대신 회피하는 쪽을 선택하곤 했다.

하지만 루스와는 싫어도 매일 마주 봐야 하는 처지가 아니던가. 결국 친해지는 게 가장 나은 방편인데….

“루스. 이건 그냥, 그냥 말하는 건데요.”

에리얼은 체념한 듯 작게 웃었다.

“제가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눈먼 사람하고 닿는다고 해서 저주받는다는 둥, 죽는다는 둥… 그렇게 나쁜 일이 생기는 경우는 없어요. 그러니까 너무 날 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루스가 고개를 들어 올려 에리얼과 시선을 맞췄다. 붉은 눈동자가 의아한 빛으로 번뜩였다.

“무슨 소리입니까?”

“저 그렇게 재수 없는 사람 아니라고요.”

곡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루스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쯧 하고 혀를 찼다.

“부인이 앞이 안 보이는 거랑 재수 없는 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그야, 처음에 만났을 때 루스가 저보고 재수 없다고 했는걸요.”

“그게 뭔… 잠깐.”

말하지 말라는 듯 손바닥을 펼쳐 내보인 루스가 헉, 신음을 뱉으며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얼굴로 에리얼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 아아! 맞아! 그때 저주받느니 미신이라니 무슨 헛소리를 하길래 뭔가 했는데!”

“으으음.”

“아니, 저주니 뭐니… 고작 그딴 일로 사람을 덥석덥석 끌어안습니까?”

뭘까. 생소한 반응을 보니 뭔가 이야기가 점점 엇나가는 것 같았다.

에리얼이 눈을 굴리며 ‘아니, 그게….’ 하고 말을 더듬자 루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서 위아래로 에리얼을 훑어보았다.

“눈이 보이든 안 보이든 아무래도 좋으니까, 다음부터 그런 식으로 다가오지 마십시오.”

단숨에 차를 들이킨 루스가 깨부술 듯이 찻잔을 내려놓고 들릴 듯 말 듯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깃든 감정이 에리얼을 향한 게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 에리얼은 알 듯 말 듯 오묘한 얼굴로 그의 가슴 언저리를 바라보았다.

* * *

딱히 잘못한 것도 없고 저주니 미신이지 믿지도 않는다면서. 대체 루스는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 걸까.

에리얼의 의구심을 풀어준 사람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그분, 결벽증인 것 같다는 소문이 있어요.”

“…결벽증?”

받아쓰기를 하고 있던 비에타가 종이 끝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을 이어갔다.

“네. 지금 머무르고 계시는 방도 직접 치우시고 시중도 다 필요 없다고 하시고… 결정적으로, 얼마 전 주드가 목욕물을 준비하다가 그분께 물을 쏟았는데요. 수건으로 닦아드리려고 했더니 건드리지 말라고 엄청 화를 내시더래요.”

“헉… 진짜?”

“네. 방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쓰시는 물건 모두 제자리에 순서대로 놓여 있고. 의자도 스툴도 꼭 제자리에 가지런히 놔둬야 한대요. 그런 게 결벽증이라면서요? 처음에는 그냥 깨끗한 걸 좋아하시는 건가 싶었는데 남하고 닿는 걸 질색하시는 거 보고 다들 결벽증 아니냐고 하던걸요.”

“아, 아아! 맞네, 맞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그랬구만!’ 큰 깨달음과 함께 에리얼이 어설프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처음부터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이유가 같이 앉자고 해서 그랬던 건가.

아니, 아니지. 그때 자기는 괜찮다면서 앉기 싫어했는데. 나를 싫어하는 건 줄 알고 오해했었어.

그래서… 대뜸 끌어안아서.

그래서! 나를 싫어하는 거였구나.

다음부터 그렇게 다가오지 말라는 게 그 뜻이었다니. 진짜 결벽증이었으면….

어머나. 설마 내가 잘못한 건가?

연이은 깨달음에 에리얼이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쓸었다.

닿는 걸 싫어하다니,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닐 텐데. 그렇게 까다로운 성격으로 어떻게 청새매인지 청매새인지의 단장이 되었을까.

어머님하고는 꽤 사이가 좋아 보였는데 어머님은 닿아도 괜찮은 건가?

고민해본들 당사자가 앞에 없어서야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진짜 결벽증인지 내일 만나서 물어봐야지 생각하며 에리얼이 무심코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하늘은 여전히 불그스름한 노을에 물들어 낮의 잔재를 털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창가에 앉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에리얼이 퍼뜩 고개를 쳐들고 비에타에게 시선을 향했다.

“맞다. 비에타, 지금 몇 시야?”

“지금요? 어디… 8시 10분 조금 넘었네요.”

시간을 확인한 비에타가 주섬주섬 펜과 종이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일 하루 두 번, 시간을 묻고 나서 어물쩍어물쩍 자리를 비켜달라고 눈치를 주는 마님이었기에 비에타는 웃는 얼굴로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에리얼이 후다닥 드레스 룸으로 달려가 액세서리 함 구석에 숨겨뒀던 격고의 반지를 꺼냈다. 반지를 끼운 뒤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볼록 튀어나온 보석 부분에 손가락을 얹었다.

“…음. 흠, 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무슨 말을 먼저 꺼낼까 고민했다. 며칠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반지를 쓰는 데에는 익숙해졌지만 처음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에는 여전히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대답하는 타이밍과 말을 잘라도 되는 건지의 여부 등등 마주 보고 이야기할 때에는 느낄 수 없는 그 애매한 감각에 반지를 낄 때마다 바짝 긴장이 들었다.

할 말을 고르고 있던 중,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와 함께 나직한 저음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안녕.

직후 ‘들려요?’ 하는 물음과 함께 낮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보름달이네. 거기서도 보입니까?

“…어…!”

-조금 늦었네요. 어디, 지금 뭐 하고 계셨습니까.

“백작님! 저, 저녁은, 아니 거기는, 어… 그, 그게! 리라를 조율하고 있었어요!”

비에타 옆에서 리라를 조율하고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엉망진창으로 말을 이어가다 가까스로 그의 말에 대답하자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조금 더 진해졌다. 에리얼은 바짝 굳어있던 입가에 힘을 풀고서 듣기 좋은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리라. 좋네요. 여객선 안에도 하프 연주자가 있던데 부인의 연주 솜씨에 비할 바가 아니더군요. 듣기 괴로워서 마침 밖으로 나온 참이었습니다.

파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싶었더니 갑판으로 나와서 그런 거였을까. 에리얼은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무의식적으로 반지를 입가에 댔다.

“백작님은 뭐 하고 계셨어요?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죠?”

-아무래도… 거리가 머니까 일주일은 더 걸릴 겁니다. 못 다닐 만한 거리는 아닌데 혼자라서 좀 쓸쓸하네요. 기항하는 곳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조금 귀찮고.

원래대로였다면 백작가 소유의 갤리온을 이용해 북부로 직행했겠지만 근황을 묻는 귀족들을 외면하는 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때문에 베르트발드는 겸사겸사 연말 파티 형식으로 호화 여객선에 남부 귀족들을 모아 사교와 밀린 업무를 동시에 해치우기로 결정했다.

집정관을 관뒀음에도 베르트발드는 하루 종일 바빴다. 함께 붙어 있을 거라 엄포를 놓을 때는 언제고, 식사 시간과 티타임 외에는 대부분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원로원 관련 일들은 모두 펠만에게 떠넘기고 왔지만 라흐주의 판무관과 군사 자문역은 도통 떠넘길 만한 인재가 없어 여전히 그의 차지였다. 일로도 바쁜 와중에 사교는 당연히 뒷전으로 밀린 터라 이번 기회에 동부와 수도에 기항해서 귀족들을 모아 대충 얼굴을 비칠 속셈이었다.

일에서는 딱히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고 늘 완벽하게 귀족의 가면을 쓰고 사는 베르트발드였으나 에리얼 앞에서는 되도 않는 응석을 부릴 때가 많았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매듭짓자 역시나 에리얼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목소리가 좀 피곤하신 것 같은데. 식사는 잘 챙겨드시는 거죠? 백작님은 너무 일을 열심히 하세요.”

-그 말 보좌관이 들으면 아마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겁니다. 요즘 너무 건성으로 일한다고 욕먹고 있거든요. 나름 열심히 하는 건데… 그래도 부인께서 걱정해주시니 일하는 보람이 있군요.

“백작님은 잠도 늦게 주무시는데 매일 저보다 일찍 일어나시잖아요. 걱정 안 할 수가 있나요.”

가벼운 날숨 뒤에 그윽한 물음이 이어졌다.

-제가 걱정됩니까?

“당연히 걱정하죠.”

-왜요?

“가족이잖아요. 백작님은 제 남편이시고 만약 눈이 낫게 되면.”

-낫게 되면?

“…꼬, 꼬마 베리의 아빠가 될 테니까요.”

짐짓 태연한 체하며 말을 잇자 목소리가 뚝 끊겼다.

‘백작님? 백작님?’ 하고 불러봐도 한참 동안 들려오는 말이 없었다. 반지를 떨어뜨렸나, 아니면 기분이 안 좋아서 이러나 안절부절못하던 찰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감정이라는 게 이렇게 순식간에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다는 걸 부인을 좋아하면서부터 깨달았는데… 요즘은 그 폭마저 한계가 없다는 걸 여실히 실감하는 중입니다. 죽지 않고 천국에 다다를 수 있게 해주셔서 부인께 매번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빠르게 튀어나온 말은 영 이해할 수 없는 문맥으로 에리얼을 괴롭혀댔다. 어쨌든 기분이 좋은 것 같아서 에리얼은 ‘아이고, 뭘요!’ 하며 웃었다.

-부인. 그거 압니까.

잠시 침묵하던 베르트발드가 재미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걱정해 줬으면 해서 일부러 부지런한 척하고 있는 거. 저, 아침잠이 많아서 일찍 일어나는 거 엄청 싫어합니다.

“헉. 진짜요?”

-진짜인 것 같아요, 거짓말인 것 같아요?

“거짓말이죠? 아침잠 많은 사람이 어떻게 매일 그렇게 일찍 일어나요.”

들켰네, 하며 베르트발드가 낮게 목을 울려 웃었다.

-남이 걱정하는 건 오지랖인 것 같았는데 에리얼이 나 걱정해주는 건 왜 이렇게 기분 좋은지 모르겠네. 계속 내 걱정만 해요. 생각 끊어지지 않게.

나직한 웃음소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웃느라 반지에서 잠시 손을 뗀 것 같았다. 아랫입술을 오물거리던 에리얼이 개구진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걱정하는 거 좋아하시면 저도 따라갈 걸 그랬죠?”

-음?

“저 옆에 붙어서 잔소리하는 거 진짜 잘하는데. 계속 백작님 따라다니면서 잔소리하면 그것도 걱정한다고 기분 좋아하실 거예요?”

잠시 말이 끊어졌다.

-그거 귀엽겠네요.

짧은 침묵 후에 이어진 목소리는 좀 전보다 훨씬 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능하면 침대에서 해줄래요? 너무 목소리를 참길래 계속 아쉬웠거든.

낯부끄러운 문장이 귓가에 스며든 순간, 에리얼의 뺨이 발그레하게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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