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대체 무슨 일인가, 드디어 내가 미쳤구나 싶어 황당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던 찰나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베르트발드가 문을 열고 방에 들어왔다.
“놀라지 말라고 했는데.”
“…바, 방금. 방금 그 목소리! 백작님이었던 거예요?”
“맞습니다. 잘 들리나 보네요.”
베르트발드가 반지 낀 손을 들어 올리더니 다른 쪽 손가락으로 사파이어 부분을 꾹 누른 채 ‘신기하죠?’라고 말했다. 동시에, 에리얼의 머릿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우와, 우와… 이거 뭐예요? 뭐지?”
“격고의 반지라고 합니다. 옛날, 제국 시대 이전에 여섯 빛의 마법사들이 전언 도구로 쓰던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까처럼 손가락으로 스톤을 누르고 말하면 반지를 끼고 있는 상대와 교신할 수 있는 장치입니다.”
“여섯 빛의 마법사…? 그럼 마도구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정말요? 우와…! 마도구, 지금은 엄청 구하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에리얼이 놀란 표정을 지우지 않고 반지를 쓰다듬으며 햐, 히야,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마법사가 존재하던 시대, 암암리에 영웅으로 칭송받던 여섯 빛의 마법사들. 그들이 쓰던 물건이라니 전설로만 전해지던 이야기가 현실로 모습을 드러낸 것만 같았다.
마법이 지탄받게 된 지 채 백 년이 지나지 않아 마법사들과 마도구는 흔적조차 남김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력을 가진 이들이 독재하는 세상은 사라지고 그 대신 고귀한 핏줄을 가진 이들이 황족과 귀족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독식했다.
마법을 경시하는 제국에서, 마도구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처벌 대상이지만 워낙 남겨진 유물이 적어서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조차 없다고 들었다.
그 잘난 공작성에서도 태엽으로 움직이는 전서구와 영원히 시들지 않는 들장미 단 두 개의 마도구만 남아 있었으니까.
뚫어져라 반지를 쳐다보는 에리얼의 눈 속에 호기심이 가득 서렸다. 입을 우물거리며 뭔가를 말하려다가 흘깃 베르트발드를 쳐다보더니 익살맞은 웃음을 떠올렸다.
에리얼은 뭐가 우스운지 히히거리며 웃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뛰었다.
“여보세요? 들리나요-?”
도도도, 구석으로 달려간 에리얼이 궁상맞은 자세로 쪼그려 앉아 반지에 대고 혼잣말을 지껄였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시험해보려는 나름의 방편인 것 같았다.
‘안 들리나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연신 중얼거리던 에리얼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베르트발드가 제 반지를 톡톡 두드리며 ‘누르고 말해야지요’라고 사용법을 재차 되새겼다.
“…세요? …요?”
부술 듯이 보석을 손가락으로 딱딱딱 두드리며 에리얼이 들리지 않을 만큼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임을 이어갔다. 웃음을 참기 위해 입꼬리에 잔뜩 힘을 준 베르트발드가 반지에 대고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들립니다. 조금 더 크게 말해줘요.
“말했다!”
-그거보다는 작게.
“우와! 진짜 신기해요!”
쩌렁쩌렁한 외침에 흠칫 어깨를 떨던 베르트발드가 반지 낀 손을 스윽 아래로 떨궜다. 그제야 에리얼이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고 ‘아이고 죄송해요.’ 하며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이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백작님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건가요?”
“두 사람 모두 스톤을 누르고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음… 그래도 평소에는 보석함에 놔두고 다니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렇죠. 잃어버릴 수도 있고.”
“예. 그리고 부인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마도구는 제국에서 소지 불가한 물품이니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사용을 자제해주십시오.”
“네! 혼자 있을 때만 쓸게요.”
씩씩하게 대답한 지 채 10초가 되지 않아 에리얼이 시무룩한 어조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평소에는 함부로 못 쓰고, 말하고 싶을 때 바로 대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 언제 백작님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시간을 정하면 어떨까요. 아침 8시, 저녁 8시, 이렇게.”
“아!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아침 8시, 저녁 8시. 아침 먹고 나서랑 저녁에 씻고 나서 대화하면 딱이겠네요,”
좋다, 진짜 좋아를 연신 중얼거리며 에리얼이 환한 얼굴로 반지를 더듬거렸다.
말미에 ‘진짜 좋다’가 에코처럼 베르트발드의 머릿속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갸름해진 눈매 속, 짙은 암청색 눈동자가 웃음기를 머금고 다정한 빛으로 에리얼을 투영했다.
베르트발드는 입 속으로 내가 더 좋은데 하고 읊조리며 에리얼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정오의 햇살보다 포근한 공기가 밤의 장막 속에 사르르 녹아들었다.
* * *
베르트발드가 북부로 출발한 건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바이올렛도 급한 일이 생겼다며 그와 함께 떠나고 저택에는 에리얼 혼자 남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혼자는 아니었다.
에리얼이 혼자 남게될까 봐 걱정된 베르트발드는 바이올렛에게 괜찮은 심복이 없느냐 물었고, 바이올렛은 껄껄 웃으며 자신이 아는 한 가장 실력 있는 호위를 붙여주겠다 하며 의외의 인물을 에리얼 곁에 남기고 떠났다.
그렇게 에리얼은 노스라이드의 부길드장이자 청새매의 단장인 루스 콘텔라렌을 호위로 두게 되었다. 처음 만나자마자 에리얼을 재수 없다고 말한 바로 그 남자를 말이다.
“자, 잘 봐요, 루스.”
에리얼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새끼손톱만 한 콩을 집어 들어 남자의 면전 앞에 흔들어댔다. 그러자 눈 앞을 가리고 있던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스윽 쓸어 넘기며 루스가 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똑같은 거 어제도 보여주셨던 것 같은데. 그거 그냥 꽃 차 아닙니까.”
“그냥 꽃 차가 아니에요. 자, 봐요! 이렇게 퐁당퐁당 넣으면…!”
투명한 유리 포트 안에 콩 두어 개를 넣고서 에리얼이 긴박한 표정으로 포트를 살살 흔들었다. 작은 콩만 하던 꽃이 포실포실 부풀어 오르더니 웅크린 손가락을 펴는 것처럼 아주 느린 속도로 꽃잎이 피어났다.
리히터가 선물로 준 용소화였다. 눈에 좋다고 그렇게 강조를 하더니 리히터는 아들 부부가 네딕을 떠나기 전 비싸다는 용소화를 세 포대나 사서 에리얼의 손에 들려 보냈다.
비싸다는 차를 그냥 썩힐 수도 없고, 효능은 영 믿을 수 없지만 향기도 모습도 예뻐서 에리얼은 기꺼이 용소화 차를 즐기게 되었다.
황홀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에리얼이 ‘봐봐요!’ 하며 포트를 번쩍 집어 들었다. 포트에 담겨 있던 뜨거운 물이 넘칠 듯 찰랑거리자 루스가 기겁하며 포트를 뺏어 들었다.
“아, 진짜 조심 좀!”
“예쁘죠? 그쵸?”
“예쁘기는 무슨… 칠칠맞지 못하게 흘리지 말고 조심 좀 하세요.”
버럭 화를 내며 루스가 포트를 옆으로 치웠다. 하지만 에리얼은 아랑곳없이 싱긋 웃으며 앞에 놓여 있던 유리잔을 루스 앞에 들어 올렸다.
유리잔과 에리얼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루스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혀를 찼다. 그리고 곧, 포기하는 심정으로 에리얼의 잔에 차를 따랐다.
쪼르륵 소리와 함께 향긋한 꽃향기가 허공을 맴돌았다. 차가 찰랑거릴 때마다 반짝반짝 빛이 산란했다. 홀린 듯 찻잔을 바라보던 에리얼이 스르르 눈시울을 휘어 옅은 눈웃음을 머금었다.
“향기 좋죠? 루스 거는 내가 따라줄 테니까 루스도 마셔봐요.”
“정체도 모르는 걸 어떻게… 그리고 저는 차 별로 안 좋아합.”
“자, 여기요.”
멍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벌떡 일어난 에리얼이 빠른 손길로 차를 따라 루스 앞에 내려놓았다. 루스는 얼떨떨하게 찻잔을 내려보다가 재촉하는 눈빛을 깨닫고서 벌레 씹은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가만히 루스를 지켜보던 에리얼이 흐뭇한 미소를 떠올리며 찻잔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코끝을 스치는 향기가 오늘따라 더욱 진하게 와 닿았다.
최근 에리얼의 기쁨은 오후의 햇살 아래, 바다가 보이는 정원에서 베르트발드와 함께 티타임을 갖는 일이었다.
갓 구운 스콘에서 풍기는 고소한 버터 냄새, 곁에 놓인 복숭아 잼의 달콤한 향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지만 옅은 파도 소리 가운데에 조곤조곤하게 이어지는 그의 낮은 저음이 나른한 오후의 풍취를 더했다.
하지만 삼 일 전. 베르트발드가 북부로 떠난 이후 그런 낙이 사라져버렸다.
이런 좋은 차를 혼자 마시는 건 아깝다고 생각되던 찰나 루스를 쳐다본 에리얼의 머릿속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호위랍시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는데 함께 차를 마신다면… 조금이라도 친해진다면.
함께 있는 시간이 서로 편해지지 않을까.
“루스.”
찻잔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덧그리던 에리얼이 작은 목소리로 말문을 뗐다.
“억지로 호위를 맡게 해서 미안해요. 계속 저택에만 있어서 딱히 위험할 일도 없을 텐데… 그, 예전에 일이 좀 있어서. 백작님이 제 신변에 대해서 좀 예민하신가 봐요.”
“황녀가 유모와 작당해서 백작 부인을 납치한 일 말이군요. 자기 부인이 납치당했다는데 예민하지 않을 남자가 있겠냐만은.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쉬쉬하는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읊으며 루스가 신경질적인 손길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부인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길드장이 명령한 거니까.”
달리 말하면 명령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떠날 거라는 뜻이었다. 에리얼은 담담한 얼굴로 루스의 가슴 언저리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지금도 여전히 그의 가슴 언저리는 붉은 파동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자신이 싫은 건가. 적의를 활활 불태우는 붉은색이 시야에 가득 들어찰수록 에리얼의 가슴이 차게 식어갔다.
박해받는 입장에서 왜 상대가 나를 싫어하는지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하물며 그 이유가 제 잘못도 아닌 그저 장님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라면 더더욱 억울하기만 했다.
하지만 억울한 일이 쌓이고 쌓일수록 감정은 마모되어 갔고, 이제는 그런 억울함을 토로할 만한 의욕조차 사라졌다. 토로는커녕 상대를 증오하는 것조차 지겨운 일이 되었다.
갈 길 없는 분노는 허무함으로 변질되어 감정의 피로를 부추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