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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104화 (104/145)

104화

석 달간 제국 전체를 들쑤셔도 단서 하나 찾지 못했던 마법사들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찾아냈다니. 베르트발드가 불신 가득한 눈초리로 바이올렛을 쳐다보았다.

“뭐… 이렇게 빨리 찾았다고요?”

“어.”

망설임 없는 대답에 베르트발드의 눈초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베르트발드는 탁자 위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다가 한결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혹시 마법사라고 이상한 사기꾼 데려다 놓고 절 속이실 생각이시라면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마법사 아니라니까. 현자라고 불러.”

“그거나 그거나.”

바이올렛이 베르트발드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웃긴 놈이야. 네가 못 찾는다고 나도 못 찾을 거라고 생각했니? 찾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너도 날 찾은 거 아냐.”

“그야….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내실 줄은.”

“이게 다 인복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니. 거미줄만 잘 펼쳐놓으면 정보는 알아서 후딱후딱 들어옵니다. 아무튼.”

바이올렛은 품 안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베르트발드에게 내밀었다.

“본거지는 북부에 있다는데 조금 접근하기 까다로운 곳이래. 나흐트필 산의 북쪽이라는데.”

“나흐트필의 북쪽…이라니. 북벽이잖습니까. 낭떠러지 아닙니까?”

“뭐, 그렇지.”

아이기스령에서도 최북단, 대륙의 끝에 위치한 나흐트필은 아이기스의 뿔이라는 이명답게 아주 높고 험준한 산이었다.

그나마 남쪽과 동쪽으로 접근할 수는 있지만 북쪽은 수직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오르기는커녕 접근할 수조차 없는 곳이었다.

베르트발드는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로 질문을 이어갔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안 나와 있습니까?”

“아무리 나라도 거기까지는 못 알려주겠다는데. 북쪽 등반 코스를 찾으면 표식이 있어서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만 써 있어. 입구에 도착하면 사람을 보내주겠다고 하고.”

“사람이고 뭐고 북쪽 등반이라니… 거긴 올라갈 수가 없잖습니까. 나흐트필의 북벽은 빙하와 북해뿐입니다.”

자세한 설명을 원했지만 바이올렛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러게.’ 한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뭐 중요한 정보도 없는 곳이라 나도 잘 몰라. 올라갈 수 있는 루트가 어딘가에 있나 보지.”

“정보를 믿고 움직이기에는 어째 영 미덥지가 않습니다만… 좀 더 자세히 알아봐주십시오.”

바이올렛은 걱정 말라는 말을 연거푸 거듭한 뒤 관자놀이를 누르며 끙, 신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나흐트필이면 엄청 먼데. 왜 하필 북부로 간 거지?”

베르트발드는 고개를 옆으로 세운 채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제국군과 마법사 연합이 마지막으로 싸운 곳… 거기가 아이기스령이였지요. 제국군 때문에 남하할 수도 없었을 테니 잔여 세력들이 전부 북부에 남았나 보군요. 북부는 제국군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으니 그쪽에 숨는 게 합리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베르트발드는 입매를 가린 채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사람을 보낸다는 건 직접 접선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당연하지. 쫓기는 입장인데 뭘 믿고 대리인을 만나겠니. 이런 식으로 마법사들 본거지를 털어서 화형시킨 경우가 꽤 많으니까 그쪽이 신중하게 구는 건 어쩔 수 없어. 네가 직접 가야 될 거야.”

“그건… 이해는 갑니다만. 북부까지 다녀오려면 꽤 걸릴 텐데.”

말을 흐리며 베르트발드가 생각에 잠겼다. 정보가 확실한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북부에 가야 하는 건 필연적인 듯싶었다.

“뭐 아무튼, 난 이만 나가볼게.”

조금 무거워진 분위기에 바이올렛은 다른 정보를 더 찾아보겠다며 집무실을 벗어났다.

베르트발드가 에리얼을 데리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던 중, 그를 지켜보고 있던 바이온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상념 사이로 슬쩍 끼어들었다.

“백작님. 저번에 찾으셨던 그 물건입니다.”

바이온이 품속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내 베르트발드에게 내밀었다.

까만 흑단목 위에 검은 벨벳으로 마감된 무척 고급스러운 보석 상자였다. 상자를 받아든 베르트발드가 눈시울을 살짝 접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수고했어. 경쟁이 워낙 심해서 입찰하기 힘들었을 텐데.”

“경매장에서 빼오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그냥 허울뿐인 마도구도 아니고 워낙 유명한 물건이지 않습니까.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더군요.”

달칵, 잠금장치를 열자 비단천 속에 파묻혀 있는 반지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얇은 은색 링에 자그마한 사파이어가 박힌, 상자에 비해서 다소 조악해 보이는 반지였다. 베르트발드는 꼼꼼하게 반지를 살핀 뒤 책상 위에 상자를 올려두었다.

“그런데 백작님.”

바이온이 머뭇거리는 듯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아까 두 분께서 말씀하시던 사항 말입니다.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무슨?”

“나흐트필은 북부 사람들이 숭배하는 성산이라서 입산 시 공작가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팔짱을 끼고 있던 베르트발드가 천천히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북부로 가기 싫다는 생각에 눈이 멀어 나흐트필이 왜 유명한지 잊고 있었다. 바이온의 말대로,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나흐트필은 북부에서 성산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 깐깐한 공작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미간이 일그러졌다. 바이온은 주군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덧붙였다.

“어찌 됐든 공작을 직접 만나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언제쯤 방문한다고 서신을 넣을까요.”

“북부는 머니까 최대한 빨리 움직인다 쳐도 열흘은 잡아야겠지. 올해 안에 뵙겠다고만 해. 그리고….”

베르트발드가 표정을 굳히며 말을 흐렸다. 뇌리에 자그마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얼마 전, 네딕에서 돌아올 때 에리얼이 했던 말.

새로운 군함, 버밀리온이 출고되는 날 라흐주에 태풍이 올 거라는 그녀의 예지몽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이맘때쯤 라흐주에 태풍 온 적 있나?”

뜬금없는 화제에 바이온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한은… 없습니다. 지금은 건기잖습니까.”

자신과 똑같은 말을 하는 바이온을 건조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베르트발드가 짤막하게 숨을 내뱉었다.

이 시기에 태풍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그녀의 예지몽이 그저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아는 베르트발드로서는 우스갯소리로 흘려넘길 수가 없었다.

“내일모레 버밀리온이 라흐주에 입항한다고 했었지.”

“예. 동부에서 사흘 전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때 맞춰서 입항식을 치를 예정입니다. 해군 제독인 요비엠 자작이 총괄을 맡아서….”

“도착하면 예덴항으로 다시 돌려보내. 입항식도 취소하고.”

바이온이 눈을 깜박거리다가 잘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취소요?”

“태풍이 올 거라는군. 항구에 있는 다른 선박들도 전부 예덴항으로 보내. 혹시 모르니 항구 근처의 주민들 전부 대피시키고, 자유 시장도 폐쇄하고.”

“항구를 닫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제국 최대의 교역로이자 남부의 가장 큰 무역항으로 구가되는 라흐주이니만큼 하루만 항구를 닫는다 쳐도 엄청난 손실이 발생할 터였다.

갑자기 닫는다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태풍이 올 거라니. 이 겨울에 태풍이라니. 질 나쁜 농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베르트발드의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다. 농담은커녕 골 아프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한숨까지 내쉬는 걸 보면 본인도 난처한 듯싶었다.

대체 무슨 소리냐 따지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이런 헛소리를 지껄일 때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기에 바이온은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 이런저런 의문들을 속으로 삼키며 바이온은 알겠다는 대답만 했다.

바이온이 나간 후, 혼자 집무실에 남게 된 베르트발드는 한 손으로 빙그르르 펜을 돌리며 앞으로의 일정을 상기했다.

영지와 항구 관리는 이전처럼 셰인에게 맡겨두면 되고, 원로원 쪽은 펠만에게 일임했으니 당분간 조용할 터였다. 그리고 남은 것들은 신년 인사와 사교계 관리 따위의 잡무들이었다.

크게 복잡한 일은 없으니 대충 마무리하고 북부로 떠나면 될 성싶었다.

“공작성이라.”

에리얼을 데리고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남부에 익숙해진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괜히 친정에 데려갔다가 파하르보다는 북부가 좋다고 눌러앉을까 걱정이 되어 그만두기로 했다.

사실 에리얼이 떼쓰는 것보다는 그웬이 또 헛수작을 부려 제 언니를 붙들고 있을까 봐 염려되는 마음이 더 컸다.

자신이 떠나면 저택이 비는데… 에리얼의 호위는 어떻게 할까.

바이온은 잡무와 호위를 위해 함께 동행해야 하는데, 바이온만큼 실력이 좋고 믿을 만한 인재는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 곤란했다.

어차피 저택에만 있을 테니 호위 따위가 필요할 리는 없겠지만 납치 사건과 가출을 겪으면서 에리얼의 곁에 호위 겸 감시자를 붙여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할 때 효율적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고, 꼼꼼하게 에리얼을 관찰한 뒤 시시콜콜한 일까지 보고할 수 있는 무뚝뚝한 종.

항상 에리얼과 붙어 있어야 할 테니 쓸데없이 치근거리는 놈은 사절이었다. 에리얼뿐만 아니라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인간이라면 아주 적격일 텐데….

…여자에게 관심 없으며 무뚝뚝하고 검을 잘 쓰고 제게 충실한 놈이라.

“흠.”

고민하던 베르트발드는 조건이 꽤 까다로웠음을 인정하고 바이올렛과 빌헬름에게 인재 알선을 부탁하기로 결정했다.

남은 건 잡무들 뿐. 해가 지나기 전에 쳐내야 할 것들이 꽤 많았다.

베르트발드는 남은 일들에 우선순위를 매겨 급한 것부터 처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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