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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100화 (100/145)

100화

추궁하듯 물으며 에리얼의 어깨를 붙잡고 두 사람을 떼어냈다. 컥컥거리며 베르트발드의 손에 멱살이 잡혀 있던 루스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빙글, 몸을 돌려 그에게서 벗어났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쿨럭거리던 루스가 웬 미친 여자가 다 있냐는 듯 눈을 부라리며 에리얼을 가리켰다.

“무슨… 큭, 일은! 저 여자가 지금 제게…!”

“저 여자?”

베르트발드가 싸늘한 눈빛을 던지자 루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말을 정정했다.

“백작 부인께서 갑자기 제게 달려든 거 아닙니까! 전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저 말이 사실입니까, 부인.”

에리얼은 슬그머니 눈을 들어 베르트발드의 눈치를 살피다가 루스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그를 지켜보던 루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후다닥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베르트발드를 무시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왕 이렇게 일이 벌어진 이상 제대로 매듭을 짓고 싶었다. 에리얼은 양손을 옆으로 펼친 뒤 슬그머니 루스 쪽으로 다가갔다.

베르트발드를 마주 보고 있던 루스가 다가오는 에리얼을 발견하고서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떨었다. 검 손잡이를 잡고는 있지만 차마 벨 수가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패닉에 빠진 상태였다.

“왜, 왜 또! 왜 또 와요! 오지 마!”

“사과하실 거죠?”

“…큭, 달리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당신 미쳤어?”

“사과, 하실 거죠?”

손을 벌린 채 히죽 웃으며 에리얼이 다가가자 루스가 진저리난다는 표정으로 팔을 앞으로 교차했다. 미친 여자였어, 소리 없이 입만 움직여 중얼거리고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뭘 오해한 건지는 몰라도! 아니, 뭐, 그래! 미안합니다!”

사과하는 태도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에리얼은 앞으로 공손히 손을 모으고 ‘저도 겁줘서 죄송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담백하게 사과를 건넸다.

베르트발드는 두 사람이 하는 꼴을 주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표정을 지웠다. 도대체,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부인, 이리 오십시오.”

베르트발드가 제 부인의 팔을 붙잡고 저택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층 깊어진 눈으로 루스와 에리얼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저택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그를 따라가던 에리얼이 이내 헉헉거리며 잡혀 있던 팔을 파닥거렸다. 보폭이 너무 빨라서 따라가기가 벅찼다.

“배, 백작님. 잠깐 손 좀 놓고! 저기…!”

에리얼의 애원에도 베르트발드는 묵묵히 더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차갑게 굳은 표정에서 노기가 느껴졌다.

거세게 요동치는 붉은 실루엣이 감정의 동요를 알리고 있었다. 에리얼은 잠자코 있는 게 최선이라 생각하고 꾹 입을 다물고 그에게 끌려갔다.

베르트발드가 말문을 연 건 그의 방에 도착한 직후였다. 부술 듯이 방문을 열고 방 한가운데에 에리얼을 세운 뒤, 허리에 손을 짚고서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건 많은데 중요한 거 하나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제 말, 잘 따라 하십시오.”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고 지그시 에리얼에게 시선을 쏟았다. 곧 훈계하는 듯한 어조가 이어졌다.

“귀족 여성은.”

“…귀….”

“따라 하세요. 귀족, 여성은.”

“귀족… 여성은.”

“부군 이외의 다른 남자와.”

“부, 부군 이외의, 다른 남자와….”

“손 이외에, 절대 신체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다.”

에리얼이 입을 벌린 채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사람을 다그치나 싶었더니.

루스가 제게 무례를 저지른 걸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까. 아니, 일일이 발끈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거대로 좀 창피한데.

고민을 매듭짓지 못한 채 에리얼이 변명을 내뱉었다.

“저기… 백작님. 제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니고요. 그분이 제게 말을 심하게 했어요. 그래서, 살짝 욱해서.”

“못 들으셨나 봅니다. 처음부터 다시 따라 해볼까요.”

“소, 손 이외에 접촉하지 않는다.”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베르트발드가 ‘이어서 말해봐요’, 엄포를 놓듯 지시했다. 에리얼은 눈을 굴리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귀, 귀족 여성은 부군 이외의 다른 남자와, 신체 접촉을 하지 않는다.”

“좋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에리얼이라고 해도 벌을 줄 겁니다.”

‘무, 무슨 벌이요?’ 물음을 무시하며 베르트발드는 턱을 쓸며 차가운 눈으로 제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당돌하게 루스에게 다가가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쉴 새 없이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소심한 모습만 남았다.

대체 뭔 짓을 했길래 루스와 붙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 여자가 다른 놈과 붙어 있는 꼴을 보니 머리가 확 뒤집히는 것 같았다.

뭐… 분위기상 어떤 오해가 있거나 루스 놈이 에리얼을 건드려서 그 꼴이 된 것 같긴 했다. 제정신이라면 저 같은 지고한 남자를 남편으로 두고 그런 미천한 놈에게 덥석 안겨들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유를 듣는다 해서 화가 풀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베르트발드는 추궁하는 걸 때려치우고 에리얼에게 세뇌를 주입하기로 결정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창가 쪽에 허리를 기댄 채 손을 까닥거리자 에리얼이 머뭇거리다가 베르트발드를 향해 다가왔다. 급하게 달려와서 그런지 가슴 쪽에 매여 있던 리본이 하늘하늘 풀려 있었다.

베르트발드는 허리를 붙잡아 제 쪽으로 에리얼을 끌어당긴 뒤 느긋한 손길로 리본을 묶어주었다.

“부인께서 결혼 전까지 무척 자유로운 일상을 즐기셨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사용인들의 아이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덥석덥석 끌어안고, 빙판 씨름을 하겠다며 엎치락뒤치락하거나 공작님이 안 계신 틈을 타 정원 연못 앞에서 한데 뒤엉켜 물장구를 치던 것도 전부 말입니다.”

매일 첩자를 통해 에리얼의 일상을 보고받았으니 그녀의 습성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 여자는 남녀 간의 신체 접촉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걸 백작님께서 어떻게….’ 하며 에리얼이 의아해했으나 베르트발드는 재빨리 말을 끊어냈다.

“아무튼, 북부에서는 그래도 괜찮았겠지만 지금은 입장이 다르지 않습니까. 귀족 사회에서는 그래선 안 됩니다. 아니, 평민이라도 지아비 있는 아낙이라면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그대는 얀셀가의 안주인이십니다. 항상 부인의 위치를 자각하고 행동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죠.”

시무룩한 어조로 대꾸하며 에리얼이 고개를 푹 숙였다. 손을 웅크린 채 손톱을 틱틱 튕기는 모습이 어째 조금… 안쓰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베르트발드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놓으며 한숨처럼 본심을 흘렸다.

“오해든 뭐든 반대로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부인께서는 제가 다른 부인과 포옹해도 괜찮으십니까?”

에리얼이 고개를 팍 쳐들고 제 앞의 붉은 실루엣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한데 뒤엉켜 있는 실루엣을 연상하니 본능적으로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건, 그건 당연히….”

“싫으십니까?”

에리얼이 오른쪽 가슴께를 꾹 누른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코르셋 안쪽에 베르트발드가 사준 노란 아기 신발을 넣고 다니며 불안하거나 초조할 때마다 그 부분을 꾹 눌러댔다. 며칠 새에 습관이 된 행동이었다.

저도 모르게 비져 나온 애틋한 몸짓에 베르트발드는 화내는 걸 잊고 피식 웃어버렸다.

“저도 그뿐입니다.”

베르트발드는 예쁘게 매듭 지은 리본을 검지로 툭툭 건드리다가 천천히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얄팍한 허리를 손바닥으로 슬슬 쓸다가 등으로 손을 옮겨 제 품으로 꾹 밀어 넣었다. 가슴께를 지분거리던 에리얼이 어엇, 하며 그의 상체에 얼굴을 묻었다.

“사실 귀족이고 뭐고 다 핑계고, 부인이 다른 사람하고 붙어 있는 게 싫었습니다.”

귀 끝을 입술로 문지르며 베르트발드가 에리얼의 허리를 양손으로 끌어당겼다. 붙어 있던 하체가 더더욱 깊이 밀착했다. 베르트발드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며 그녀의 체취를 콧속 깊숙이 눌러 담았다.

“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있으니까 생각나네. 마침 저택에도 돌아왔고, 슬슬 시작할까요.”

“뭐를요?”

흐음, 웃음 섞인 목소리가 은밀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네딕에서 출발하기 전. 마차에서 했던 약속 있잖아요. 기억 안 나십니까?”

집게손가락으로 귓불을 지분거리며 다른 쪽 귓가에 작은 숨을 불어넣었다. 야릇한 행동에 에리얼이 어깨를 잘게 떨었다.

뺨에 닿은 입술이 천천히 턱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부드러운 행동이었지만 손짓과 행동에서 찐득한 열망이 느껴졌다.

그에게 말려들기 전에 에리얼은 재빨리 뇌리에서 마차에서 한 약속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네딕에서 출발할 때 그가 건넸던 말이라면 아마도.

「아버지와 즐거운 시간 많이 보내셨습니까.」

「네! 정말 즐거웠어요. 아버님은 낚시도 엄청 잘하시고 수영도 잘하시고 또 요리도 엄청 잘하시잖아요. 바다낚시도 같이 갔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라. 그, 장미 잼도 만들었어야 했는데.」

「저는 별로 즐겁지 못했습니다.」

말을 자르며 베르트발드가 서글픈 목소리로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에리얼이 예의상 ‘왜, 왜요?’ 하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날아왔다.

「부인께서 온 신경을 아버지께만 쏟고 계셔서 외톨이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원래도 가족들과 친밀하지 못했는데 부인께서도 제게 등을 돌리시니 마치… 홀로 섬에 있는 기분이었달지, 밤하늘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달지… 뭐든, 참 씁쓸하더군요.」

「아… 그러셨어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 말대로 에리얼은 리히터와 노느라 제 남편은 뒷전이었으니까.

아니, 그래도 밥 먹을 때 같이 먹고 잘 때도 꼭 붙어서 자고 했는데… 나름 충실히 그의 옆을 지켰는데 그걸로는 부족했던 건가.

「죄송해요. 너무… 음, 너무 즐거워서. 백작님께 소홀했었나 봐요….」

머쓱하게 웃으며 사과를 건네자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지그시 그녀를 굽어보던 베르트발드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운을 뗐다.

「뭐… 죄송할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가족끼리는 원래 다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서운한 건 어차피 저택으로 돌아가서 풀어도 되고.」

「…그래도.」

「정 마음에 걸리신다면 가서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약속. 어떻습니까?」

목소리도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행동도 무척 담백하고 경쾌했다. 그저 형식적인 투정이라 생각해 에리얼도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얼마든지요!’ 하고 대꾸했던 것도 기억난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소원…?”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리자 베르트발드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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