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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98화 (98/145)

98화

방문자를 대하는 태도와 부인을 대하는 태도의 간극이 엄청났다. 바이올렛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베르트발드에게 진정하라는 듯 손을 까닥였다.

“아니, 아니. 그때는 수색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고! 불가항력 아니니? 길드에 의뢰하려면 그 정도 감수는 해야지.”

“그렇다고 무장한 사병들을 보내서 저택을 뒤집니까? 자다가 갑자기 괴한이 들이닥쳐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무튼, 일전에 의뢰 드린 건도 지불은 다 마쳤을 텐데 왜 오셨습니까.”

“얘는! 오늘은 돈 때문에 온 거 아니라니까. 정말이야.”

“용건부터 알려주십시오. 어머니께서는 수틀리면 주먹부터 나가시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삭막한 분위기에 루스가 검을 휘두를까 말까 고민하며 바이올렛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루스를 뒤로 잡아끌며 방긋 웃었다.

“의뢰 수락하려고 왔어. 리히터가 보낸 의뢰 네가 요청한 거잖아. 그리고 또 뭐… 겸사겸사 얼굴이나 보러왔지.”

“…저를?”

“너도 그렇고 결혼했다던 아가씨도 궁금하고 해서.”

바이올렛이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느긋한 태도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에리얼의 잿빛 눈동자에 닿은 순간, 바이올렛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 아하. 호오….”

에리얼을 쳐다보는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떠올랐다.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호기심이 가득 차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여간 무섭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묘한 예감을 눈치챈 베르트발드가 재빨리 에리얼을 뒤로 숨겼다.

애초부터 평범한 만남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저렇게 흥미 만발인 모습을 보니 불안한 예감에 뒷덜미가 싸해졌다.

“인사는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의뢰 때문에 찾아오셨다면… 잠시 이쪽으로.”

베르트발드는 정원 한가운데에 위치한 가제보를 가리키며 바이올렛에게 눈짓을 건넸다.

바이올렛이 불편한 건 둘째치고 마법사에 대한 화제를 에리얼 앞에서 꺼내고 싶지 않았다. 단서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 괜한 희망을 가질까 봐,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의뢰하는 꼴을 보여주는 건 남편으로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부인. 잠시 얘기 좀 나누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네. 다녀오세요.”

눈치만 살피던 에리얼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여있던 벤치로 걸어갔다.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루스에게 바이올렛이 턱짓으로 에리얼을 가리켰다. 루스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에리얼의 뒤를 따라 벤치 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에리얼과 루스를 남겨둔 채로 두 모자가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바이올렛이었다.

“재미있네, 저 애. 그 집안에서 실제로 본 사람은 아이기스 공작뿐인데 진짜 공작하고는 하나도 안 닮았잖아. 설마 그 소공작도 저렇게 비실비실하게 생긴 건 아니겠지?”

“그웨니시스 아이기스는 야생마처럼 드세고 거친 여자입니다. 에리얼과는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제 부인은… 글쎄요. 굳이 따지자면 공작 부인을 닮았겠지요.”

“정말로 장님이야?”

뜬금없는 화제에 베르트발드가 혀를 찼다.

음흉한 표정을 보니 알면서 물어보는 게 뻔했다. 바이올렛은 정보력에 있어서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노스라이드의 길드장이었다. 과연 에리얼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을까.

“보면 아시지 않습니까.”

“공작가에 우리 애들 심어서 사찰하던 애가 저 애였니? 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그렇게 홀딱 빠졌나 했더니… 베리, 저런 취향이었구나. 나 닮아서 섹시한 여자 좋아할 줄 알았는데 청순한 쪽이었네.”

낯부끄러운 얘기를 참 잘도 떠든다 싶었다. 바이올렛은 양손으로 턱을 괸 채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디가 그렇게 좋았니? 네가 결혼한다고 하니까 길드에 의뢰가 쏟아지더라. 아이기스 공작의 첫째 딸이 누구인지, 결혼하는 이유가 대체 뭔지. 네가 인기가 많긴 많았던 모양이야.”

“덕분에 의뢰비 꽤나 건지셨겠습니다.”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베르트발드가 비아냥거렸다. 바이올렛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식은 전해 들었다. 마법사를 찾고 있다고?”

본론을 꺼내자 베르트발드의 태도가 한결 진지하게 변했다.

“예. 접선한 길드원은 찾을 수 있는지 확신을 못 하더군요.”

“당연하지. 마법사들을 끝장내고 세워진 게 제국인데 누가 여기서 마법사를 찾니. 다른 나라도 제국 눈치 보느라 마법사들 탄압하고, 이제 진짜 마법사는 세상에 열 명도 안 남았을걸.”

“그렇게 찾기 힘듭니까?”

“그래. 상급 길드원이라도 찾기 힘들어. 마법사들이 괜히 마법사겠어. 흔적을 지우는 데에는 타고난 인간들이야.”

베르트발드가 살포시 눈매를 접으며 미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찾을 수 없다 자신하시는 걸 보니 되레 의심이 듭니다만.”

바이올렛이 입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부루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 나름대로 깜찍한 표정을 지어 보인 것 같은데 베르트발드가 보기에는 가소롭기만 했다. 헛웃음을 흘리자 바이올렛이 표정을 지우고 여유만만한 눈빛을 내비쳤다.

“찾을 수 없다고 말한 적은 없단다.”

“어딨습니까.”

“의뢰비는?”

바이올렛이 웃으며 물었고, 베르트발드도 부드럽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누가 보면 삭막하다고 할 수 있는 모자지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비즈니스로만 얽힌 이 거리감이 딱 적당하고 느꼈다. 베르트발드는 테이블로 시선을 내리깐 채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길드원에게 제시했던 금액이 2백만 골드였습니다.”

“오오. 2백만 골드라. 대단한데.”

2백만 골드라면 수도의 고급 저택을 5채는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어지간한 상단 하나는 인수할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다.

베르트발드는 주먹으로 턱을 괸 채 지그시 바이올렛을 쳐다보았다. 각자의 동공 속에서 서로 닮은 얼굴이 투영되었다.

계산을 끝낸 베르트발드가 차분하게 가격을 읊었다.

“다섯 배를 제시하겠습니다.”

바이올렛이 웃음기를 싹 빼고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베르트발드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얀셀가가 대부호라고 해도 천만 골드는 쉬이 입에 담을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놀란 그녀의 반응과 달리 베르트발드는 차분하기만 했다. 천만이 거금이기는 하지만 융통하기에 무리가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 아니, 그리 큰 금액도 아니었다. 에리얼이 눈을 뜬다는데, 눈을 뜨고 저를 바라보며 웃어준다는데 천만은커녕 억도 낼 용의가 있었다.

“집정관을 때려치웠다고 했을 때부터 얘가 좀 미쳤나 싶긴 했는데. 가산을 전부 탕진할 셈이야?”

“내일은 서쪽에서 해가 뜨려나 봅니다. 노스라이드의 돈벌레께서 얀셀가의 걱정을 다 하시고.”

“하, 참.”

바이올렛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베르트발드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마법사를 만나서 대체 뭘 하려고?”

“이유를 말씀드리면 의뢰비라도 깎아주실 겁니까?”

바이올렛이 헛소리는 됐고 빨리 말하라며 베르트발드를 다그쳤다. 베르트발드는 어물쩍 넘어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솔직히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비상할 정도로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숨겨봤자 별 의미도 없을 터였다.

“에리얼의 눈은 선천적인 거라서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얼마 전 묘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녀처럼 똑같이 눈에 먼 남자를 만났는데, 장애를 타고난 게 아니라 저주에 걸려서 앞이 안 보이는 거라고 하더군요.”

“저주? 저주우? 그 사람 말을 어떻게 믿어?”

“저도 비슷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어떤… 저주를 받은 사람들끼리 뭔가 통하는 게 있나 봅니다. 에리얼도 그 남자의 말을 신뢰하는 분위기였기에.”

“흐음….”

“에리얼이 어렸을 때 주술사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더군요. 저주에 걸려서… 아이를 낳으면 아이도 똑같은 저주에 걸릴 거라고. 맥락상 아이를 낳으면 태어난 아이도 눈이 안 보일 거라는 말인 것 같았습니다.”

바이올렛이 고개를 삐딱하게 세운 채 의구심 섞인 눈빛을 던졌다. 그걸 믿느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제국은 마법사들을 몰아내고 그들이 있던 자리에 신전을 세웠다.

마법을 경시하고 신을 떠받드는 제국민들은 저주니 악마니 하는 것들에 광적이다 싶을 정도로 집착했다. 부족하게 태어난 아이들은 악마의 사도였고 기이한 재주를 가진 이들은 마녀로 몰려 화형당했다.

종교에 의한 세뇌만큼 사람을 단결시키는 힘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바이올렛과 베르트발드는 그런 미신에 넘어가지 않았다. 아니, 되레 이용하는 쪽에 가까웠기에 바이올렛이 저주라는 말에 저렇게 예민하게 구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베르트발드는 얼굴색 하나 변함없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별 신빙성은 없는 이야기이니 걸러 들으셔도 무방합니다. 저도 딱히 저주라는 말을 믿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

“예. 다만 말도 안 된다고, 고작 그 이유로 두 손 놓고 있는 건 제 방식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반드시 앞을 보게 해주겠다 부인과 약조했습니다. 작은 단서라도 있다면 매달려 보는 게 옳은 일 아니겠습니까.”

바이올렛이 턱 밑에 손을 펴서 제 얼굴을 받쳐 올렸다. 짓궂은 미소가 고운 얼굴 사이로 퍼져 갔다.

“아드님께서 이런 호탕한 면이 있는지는 몰랐네. 어쨌든. 그 저주랑 마법사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데.”

“그 남자가 마법사… 아마도 만났다던 사람도 제대로 된 마법사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를 만나서 저주에 대해 알아냈다고 하더군요. 진짜 마법사를 만나면 저주를 해제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진짜 마법사… 다른 단서는 없어?”

“달리 다른 단서는… 아, 하나 신경 쓰이는 건 있었습니다. 그 남자의 반응에 따르면 그렇게 눈먼 자들을 서번트라고 지칭하는 것 같더군요.”

바이올렛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베르트발드의 말들을 머릿속에 조합했다. 서번트, 저주, 마법사. 입 속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바이올렛이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누가 모자지간 아니랄까 봐 골몰 중일 때의 행동마저 베르트발드와 똑같았다. 바이올렛은 웃음기를 싹 거둔 채 의뢰인을 대하는 태도로 말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법사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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