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결과적으로 베르트발드는 3일 후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제 아버지에게 홀랑 넘어간 에리얼이 내일 갈까요, 아니 내일모레 갈까요 하며 그를 들었다 놨다 했기 때문이다. 베르트발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정원에 붙어 있는 두 남녀를 노려보았다.
“아버님, 너무, 너무 높은 것 같은데!”
“그러니까 꽉 잡아야지! 에리얼, 손 놓으면 홱 날아갈지도 몰라!”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손수 만든 그네 위에 에리얼을 앉혀놓고서 리히터가 헤벌쭉 웃으며 그녀를 밀어주고 있었다. 첫날의 지저분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치렁치렁하던 긴 머리를 깔끔하게 자르고 수염도 다 밀어 번듯해진 모습이었다. 옷까지 제대로 갖춰 입으니 과연 귀족스러운 품위가 흘러넘쳤다.
리히터는 에리얼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더니 불쌍하다는 둥, 가엾다는 둥 이유를 붙이며 본격적으로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 애썼다.
함께 산책을 다녀오고 배를 태워주고 파스타를 반죽하는 둥 온갖 요란을 떨더니 늘그막에 딸이 생긴 것 같다며 에리얼을 붙잡고 놓지를 않았다.
아버지가 귀여운 것에 약하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제 부인에게 이렇게까지 빠져들 줄은 몰라 베르트발드는 매우 당황했다.
하지만 당황은 잠시였고 베르트발드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아버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제 아내를 독점하는 리히터의 행태에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속을 모르는 에리얼은 대체 뭐가 좋은지 헤실거리며 리히터를 따라다니기 바빴다. 지금도 저렇게, 눈치도 없이 자지러지게 웃으며 리히터가 시키는 대로 줄을 꽉 움켜쥐었다.
정말 개탄스러운 광경이었다. 베르트발드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애꿎은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백작님.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이십니다.”
곁에 서 있던 바이온이 쭈뼛거리며 쓰러진 의자를 집어 들었다.
베르트발드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테이블에 놓여 있던 시가를 뜯을까 말까 고민했다. 한창 피워대다가 눈먼 여자가 폐까지 안 좋아지면 어떡하나 싶어 결혼 전에 끊었건만, 괜히 속이 타서 손이 근질근질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다고 찰싹 달라붙어서 하루 종일 저러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저택으로 돌아갈 걸 그랬지.”
“지금이라도 먼저 돌아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법무관이 보낸 서류가 많이 쌓여 있을 텐데요.”
“에리얼을 아버지 곁에 놔두고 나 혼자 돌아가라고?”
베르트발드가 눈동자만 움직여 바이온을 쳐다보았다. 무슨 헛소리냐는 듯 한기를 품은 눈빛에 바이온은 자신이 또 헛소리를 했구나 싶어 참견하기를 포기했다.
“좋군, 아주 좋아.”
베르트발드는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서 나른한 눈빛으로 제 부인과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가늘어진 눈매 위로 백금색 속눈썹이 깊게 그늘을 드리웠다. 짙푸른 눈동자 속에 애정이 철철 넘치는 두 남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사이가 너무 좋아서 내가 끼어들 틈이 없어.”
자연스레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권태로운 모습에 색기를 부여했다. 누가 봐도 홀릴 듯한 외모였지만, 바이온은 폭발 직전의 위태로움을 감지하고서 꿀꺽 침을 삼켰다.
에리얼이 탄 그네가 좌우로 흔들릴 때마다 길게 뻗은 다리가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베르트발드는 검지 손가락으로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며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왜 자기를 싫어하는지 지금도 모르시겠지.”
“…….”
“나뿐인가. 저렇게 눈치가 없으니 어머니께도 버림받은 거야. 예전에는 나름 불쌍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군.”
시니컬한 어조로 중얼거린 말은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원수에게 경고하는 으름장 같았다. 바이온은 눈만 굴리며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화제를 돌렸다.
“저, 백작님. 아까 사용인에게 편지를 건네받았습니다만….”
“무슨 편지?”
바이온이 품속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들었다.
“청새매가 물고 온 서신이랍니다.”
똑, 똑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표정을 굳힌 베르트발드가 재빨리 바이온에게서 쪽지를 건네받았다.
작고 날랜 몸으로 어디든지 파고 들어가는 청새매는 노스라이드 길드장이 운용하는 개인 정보단의 별칭이었다. 다루기 쉬운 전서구가 많음에도 굳이 훈육하기 까다로운 청새매를 보냈다는 건, 편지를 보낸 당사자가 길드장이거나 단장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소리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쪽지를 훑은 베르트발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을 읊었다.
“찾으셨습니까?”
“남부에 있나 보군. 위치는 못 알려준다고, 조만간 찾아올 거라고만 써 있는데.”
‘변덕스러운 건 여전하군’, 중얼거린 베르트발드가 주머니에 대충 쪽지를 욱여넣고서 무덤덤한 얼굴로 에리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네에서 내려온 에리얼이 지팡이를 짚고서 제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잠깐 눈 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방금 전까지 곱게 나풀거리던 하늘색 드레스 밑자락이 온통 흙투성이였다.
“백작님! 그네 엄청 높은데!”
“네. 보고 있었습니다.”
“엄청 재미있어요! 백작님도 밀어드릴까요?”
“농담 재미있었습니다. 그네는 됐고 여기 좀 앉아봐요. 무슨 땀을 이렇게 많이 흘립니까. 잠깐 쉬면서.”
“에리얼! 이것 좀 마셔보자.”
그새를 못 참고 리히터가 티 세트를 들고 와 옆자리에 끼어들었다. 베르트발드는 미간을 찡그리는 것도 포기한 채 리히터가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눈에 좋다는 약재를 잔뜩 넣은 허브티란다. 재스민, 결명자, 민트와 장미라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리히터는 웃으며 작은 그릇 하나를 에리얼 앞으로 내밀었다. 그릇 속에 붉은 콩 서너 개가 담겨 있었다.
“용소화라고 하는 건데 잠든 용도 깨운다는 아주 귀한 약재란다. 뜨거운 물에 넣으면 꽃잎이 활짝 피어나서 모양이 아주 예쁘지. 새아가에게는 보일지 모르겠다만… 어디 한번 꽃봉오리를 포트에 넣어보겠니?”
“아, 네!”
착실하게 대답하고서 에리얼이 투명한 유리 포트 안에 용소화 두 알을 퐁당퐁당 집어넣었다.
콩알만 하던 꽃이 순식간에 포실포실 부풀어 오르고, 봉오리 형태였던 꽃이 천천히 물속에서 개화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피어나는 꽃의 모습이 신비로우면서도 무척 아름다웠다.
포트를 바라보던 에리얼의 눈이 점점 커졌다.
“와. 그림자만 봐도 엄청 예쁘네요.”
멍한 표정으로 꽃을 바라보던 에리얼이 포트 주변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웃었다.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하던 베르트발드도 흥미로운 눈으로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만개한 붉은 꽃이 레몬색이었던 물을 오렌지 빛으로 물들이는 광경은 리히터의 말대로 무척 아름다웠다. 흐뭇하게 아들 내외를 지켜보던 리히터가 허브차를 손수 따라 에리얼에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아버님. 향기도 엄청 좋아요.”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구나. 이런 거 먹는다고 하루아침에 눈이 번쩍 뜨이겠냐만은 다 기분 문제 아니겠니. 따로 챙겨줄 테니 생각날 때마다 마시렴.”
리히터는 인자하게 웃으며 케이크와 쿠키 따위를 에리얼 쪽으로 밀어주었다. 베르트발드는 빈 찻잔을 빤히 쳐다보다가 아버지가 제게는 따라줄 마음이 없음을 깨닫고 ‘그럼 그렇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직접 차를 따라 마셨다.
반쯤 남아 있던 차를 단숨에 비우며 베르트발드가 리히터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어머니께 전서가 왔습니다.”
뜬금없는 소식에 리히터가 눈을 크게 뜬 채 의외라는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웬일이야. 평소라면 일주일에서 보름은 걸릴 텐데, 역시 아들 일에는 손이 빠르다니까. 어디에 있대냐.”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남부에 계신 건 틀림없는 모양입니다. 조만간 만나러 오겠다 하셨으니 아버지께서 대신 용건을 전해주십시오.”
“왜? 기다렸다가 만나고 가지 그러냐. 서신도 이렇게 빨리 온 걸 보니 금방 올 것 같은데.”
“됐습니다. 저희는 이따 오후에 그랑파하르로 돌아갈 겁니다.”
마지막 문장에 에리얼의 눈이 커졌다.
“오, 오후에요? 오늘? 이렇게 빨리요?”
에리얼이 난감한 얼굴로 베르트발드의 눈치를 살폈다. ‘돌아가야 되나요?’ 하고 묻는 듯한 시선에 베르트발드가 단호한 눈빛을 되돌렸다.
며칠째 아버지에게 붙들려 함께 붙어 있지도 못했는데, 짜증스러운 자신과 달리 에리얼은 한 점 아쉬움도 없는 것 같아 속이 쓰렸다. 베르트발드는 에리얼 쪽으로 몸을 숙여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왜 자꾸 돌아가려고 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까.”
“그야 백작님께서 바쁘시니까 그런 건 알지만, 급한 일은 다 끝내셨다고 바이온이 그랬는데.”
“여기서는.”
베르트발드가 눈매를 찡그리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한 짓 할 수가 없어서 싫어.”
멍하니 있던 에리얼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눈만 움직이던 에리얼이 뒤늦게 더듬거리며 목소리를 냈다.
“그, 그거야 아버님이 계시니까…!”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괜찮아. 밤에 부인을 안을 수만 있다면 며칠 정도는 참아드리겠습니다. 다만 이 저택은 침실 벽이 얇아서 소리가 다 들릴 텐데.”
“그… 그건. 어….”
“어떻게.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속삭임이 이어질수록 에리얼의 얼굴도 시뻘겋게 변했다. 주먹을 움켜쥔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에리얼이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있잖아요, 아버님.”
“응?”
“정말 아쉽지만 저희는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확고한 외침이 테이블 위를 떠돌다 금세 자취를 감췄다. 가만히 외침을 곱씹던 리히터가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아니, 에리얼. 아직 바다낚시도 못 했고 장미 잼 만드는 것도 못 했잖아. 그러지 말고 며칠만 더 있다가 가지 그러니.”
“그게… 저도 더 있고 싶은데요. 그게, 그게 어쩔 수가 없는 일이 있어서요…!”
에리얼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하녀들이 기다린다는 둥 화분에 물을 줘야 한다는 둥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쥐어짜며 필사적으로 리히터를 설득했다.
리히터가 애절한 눈빛을 되돌리자 잠시 숨을 고르다가, 백작 부인이 저택을 너무 오래 비우면 안 된다는 원론적인 이유를 들어 리히터의 눈빛을 꺾었다.
방금 전까지와는 다른 완고한 태도에 리히터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래. 아쉽지만… 저택을 비우는 것도 좋은 건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조만간 다시 만나자꾸나.”
“네, 아버님! 여기 네딕도 좋지만요. 다음에는 아버님께서 그랑파하르로 오시면 더 기쁠 것 같아요. 꼭, 꼭 저택으로 놀러오세요.”
에리얼의 잿빛 눈동자가 슬그머니 베르트발드를 스쳐 지나갔다. 베르트발드는 모르는 척 기품 있는 미소를 띄운 채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