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에리얼은 뒤를 돌아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짐을 챙겨온 비에타가 한 박자 늦게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향했다.
키가 커다란 남자 한 명이 옆구리에 어망을 끼운 채 두 사람 쪽을 향해 어슬렁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나이는 오십 정도 되었을까. 낡은 셔츠와 맨발, 까맣게 그을려 주름진 얼굴, 곱슬곱슬한 갈색 수염으로 뒤덮인 하관이 부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부들의 모습과 일치했다.
터벅터벅 걸어 에리얼 앞에 선 남자가 비에타와 에리얼을 번갈아 쳐다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웬 여자들이지. 이 오지에서 길이라도 잃었나.”
서슴없이 반말을 지껄이는 작태에 비에타의 이마 위로 핏줄이 섰다. 비에타는 반사적으로 에리얼을 막아서며 남자에게 말했다.
“실례지만 여기서 일하시는 분이십니까?”
“어, 어어. 뭐.”
“저희는 이 저택의 손님으로 온 사람들입니다. 지금 제 곁에 계신 분은 얀셀 백작가의 안주인이시고요. 보아하니 저택에 고용된 몸이신 것 같은데 부디 말을 조심하세요.”
“어? 저 아가씨가 안주인이라고?”
남자가 어망을 툭 떨구더니 번뜩이는 눈으로 에리얼을 훑었다. 갑작스레 험악해진 분위기에 비에타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때를 놓치지 않고 에리얼이 비에타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뒤로 이끌었다. 에리얼의 동공 사이로 남자의 커다란 인영이 비췄다.
잿빛 실루엣 사이로 은은하게 비치는 분홍빛 파동. 에리얼은 긴가민가한 심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기, 혹시… 선대 백작님이신가요?”
비에타가 무슨 헛소리냐는 듯 눈을 부릅뜨고 에리얼과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남자는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비에타를 노려보더니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에리얼에게 바싹 다가왔다.
“이상한데. 베리 놈이 좋다고 쫓아다니던 아가씨는 장님이라고 들었는데. 어찌 내가 보이나?”
“실루엣 정도는 살짝 보여요. 얼굴은 거의 안 보이지만.”
“허.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어어, 그냥… 키도 체격도 백작님하고 비슷하셔서.”
키 큰 사람은 많이 봤지만 베르트발드처럼 어깨가 넓은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눈앞의 남자는 그와 체격이 아주 흡사했다.
남자는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에리얼의 얼굴을 훑었다. 얼핏 드러난 입매 위로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 공작 각하가 쩔쩔매는 딸이라길래 표독스러운 아가씨를 생각했는데… 이렇게 여리여리하게 생긴 아가씨일 줄은 몰랐구먼. 반갑네. 내가 리히터 얀셀이야.”
리히터가 에리얼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던 비에타가 ‘그렇게 때리시면!’ 하며 에리얼을 감쌌다.
말리는 손길에도 아랑곳없이 리히터는 장난스레 웃으며 에리얼의 손을 붙잡았다. 거침없이 저를 붙드는 손길이 어딘가 익숙하다 생각하며 에리얼은 리히터에게 붙잡혀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 * *
베르트발드가 리히터를 만난 건 그로부터 삼십여 분이 지나서였다.
사교에서 한발 물러난 아버지가 거지꼴로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익히 아는 베르트발드로서는 그 꼴을 하고 에리얼과 대면하게 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마차를 두 대로 나눠 시간 차를 두고 먼저 저택에 도착했다.
하지만 저택에는 사용인 서너 명만 있을 뿐 리히터의 흔적은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찾아 항구로 나간 사이 리히터가 숲길로 걸어 돌아온 것이다.
항구를 다 뒤져봐도 찾지를 못해 허탈한 심정으로 저택에 돌아오는데 아비라는 작자는 제 부인을 옆에 끼고 한껏 희롱하고 있으니, 한탄이 절로 새어 나왔다.
“여전하십니다.”
베르트발드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건방진 자세로 말문을 열었다. 리히터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덥수룩하게 기른 머리를 질끈 묶고서 지저분한 몰골과 어울리지 않는 우아한 손길로 찻잔을 집어 들었다.
“에리얼 말이다. 생각보다 훨씬 더 특이하던데.”
다갈색 찻물을 바라보던 리히터가 조소와 함께 말을 뱉었다.
“지 잘난 맛에 사는 네가 눈도 안 보이는 여자를, 그것도 하필이면 아이기스 공작가의 딸을 쫓아다닌다길래 난 또 천사처럼 예쁘장한 여자를 생각했는데. 조금 의외더라.”
탕, 소리와 함께 베르트발드가 빈 의자 위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삐뚜름하게 턱을 세우며 차가운 눈초리를 리히터에게 쏟아냈다.
“아버지.”
“어허, 또 건방지게. 발 내려라.”
“제가 그 여자한테 얼마나 미쳐 있는지 아버지께서는 잘 아실 텐데요.”
흐, 기가 찬 웃음과 함께 리히터가 아들을 흘겨보았다.
“알다마다. 멀쩡한 아비를 중증 환자로 몰아세우고선 결혼한답시고 날름 백작 자리 뺏어가지 않았냐.”
“아시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정계를 떠나 계시더니 눈치도 감도 잃어버리신 모양입니다. 에리얼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려거든 적어도 제 앞에서는, 단어 선택에 유의하셔야 할 겁니다.”
리히터는 별 미친놈을 다 본다는 듯한 눈으로 베르트발드를 쳐다보았다.
겉껍데기가 워낙 화려해서 그렇지 제 아들이 살짝 핀트가 엇나간 인간이라는 사실은 그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또라이 같은 아들놈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떠십니까. 직접 보니 쫓아다닐 만한 것 같지 않습니까.”
시린 눈동자 속에 담긴 메시지는 단순했다.
어서 예쁘다고 말해.
거만한 눈초리는 의중을 묻는 게 아닌 정해진 답변을 토해내라는 계시에 가까웠다. 그리고 리히터가 아는 아들놈은 예쁘다고 말하지 않으면 말할 때까지 목이라도 조를 놈이었다.
어쩜 저렇게 제 어미랑 성격이 똑같은지. 리히터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미인 아니라고 했냐? 예쁘장하긴 한데, 네 취향하고는 다른 것 같아서 조금 놀랐다고 말하려던 거다!”
“제 취향이 어떨 것 같았습니까.”
“세상 만물에 까다롭게 구는 놈이니 여자도 그런 여자를 고를 것 같았지. 아주아주 예쁘고, 아주아주 까다롭고, 아주아주 거만한 여자. 딱, 너 같은 여자.”
“하하하.”
영혼 없는 얼굴로 웃으며 베르트발드가 느릿하게 발을 아래로 내렸다.
“아버지도 늙으셨나 봅니다. 별 재미 없는 농담을 다 하시고.”
“…이게 농담으로 들렸냐. 너도 참 여전하다.”
“됐고, 그 꼬질꼬질한 행색 좀 어떻게 해주십시오. 에리얼이 무서워하지 않습니까. 앞은 안 보여도 꽤 섬세한 여자라서 조심해야 합니다. 또, 아까처럼 옆에 딱 달라붙어서 성추행하시면 법무관을 통해 고발할 겁니다.”
“너 진짜 여전하구나….”
마지못해 알았다 대답하며 리히터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꼴이 또 보기 싫었던 베르트발드가 문 쪽을 가리키며 ‘지금 당장 씻고 오십시오’라고 지시했다. 리히터는 흔쾌히 무시하며 화제를 돌렸다.
“베리 너야 원래 이상한 놈이었다 치고 새로 들어온 가족이 꽤 멀쩡한 아이인 것 같아서 다행이야. 솔직히 걱정했다.”
“왜요. 저 닮은 여자가 백작 부인 될까 봐서?”
“그래. 안 그래도 팍팍한 삶에 새로운 가족으로 이상한 아이가 들어오면 꽤 슬플 것 같았거든.”
베르트발드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뚝 언저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다 뭐가 웃긴지 쿡쿡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저와는 전혀 다른 여자라서 놀라실 겁니다. 얼마나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지. 어떻게 아이기스 공작에게서 저런 딸이 나왔는지… 참 의아하죠.”
“뭐, 공작이야 괴팍해도 공작 부인께서는 꽤 지성인이셨으니 어머니를 많이 닮은 거겠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리히터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또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엄마 닮은 애들이 순하다고 하던데. 우리 집은 영 반대라니까.”
‘무슨 뜻입니까 그거.’ 하며 삭막한 눈초리를 쏘아 보내던 베르트발드가 얕은 탄성과 함께 질문을 던졌다.
“말이 나와서 말씀입니다만 아버지, 혹시 어머니 행방을 알고 계십니까?”
“나도 모른다. 수도 어딘가에 있지 않겠냐. 빌헬름한테 물어봤어?”
베르트발드는 눈매를 좁힌 채 수도 저택의 집사인 빌헬름을 떠올렸다. 사우스빌의 전 길드장으로서 다재다능한 재주를 갖고 있는 빌헬름이지만, 그로서도 어머니의 뒤를 쫓기란 영 어려운 일일 터였다.
“삼촌이야 눈썰미가 좋긴 하지만 정보력에서 어머니를 따라잡을 수는 없습니다. 물어봐도 영 실속 없을 것 같아서 관뒀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여자니 빌헬름도 찾기 힘들긴 하겠지. 그런데 무슨 일로 어머니를 다 찾아?”
베르트발드는 어디까지 말을 해도 좋을지 가늠하고서 평온한 어조로 대꾸했다.
“어머니를 찾는다기보다는… 마법사를 찾고 있습니다. 어떻게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는 건 알아냈는데 그 이후로 정보에 진전이 없어서 말입니다. 일단 노스라이드 쪽에 의뢰를 넣긴 했는데 그쪽 상위 길드원도 찾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다고 해서.”
“마법사? 웬… 은둔한 지 오래되어서 찾기 힘들 텐데. 사기꾼들 말고 진짜 마법사는 대륙에서도 몇 없다.”
“저도 압니다. 그러니 어머니를 찾는 거 아닙니까. 어머니라면 분명 마법사 한둘쯤은 알고 계실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리히터는 별다른 질문 없이 알아보겠다고만 하며 말을 매듭지었다.
백작 위를 달라고 해서 웃기는 소리 말라고 쫓아냈더니 다음 날 자신을 환자로 만들어 집 밖으로 쫓아낸 놈이다. 집정관이 되겠다 헛소리를 하길래 해볼 테면 해봐라 했더니 제 엄마와 손을 잡고 진짜 수석 집정관까지 오른 놈이기도 했다.
뭐, 이번에는 마법사들을 모아서 황실에 역적질이라도 하려나 보지. 갑자기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해대는 아들에게 질린 만큼 질린 터라 딱히 캐묻고 싶지도 않았다.
“연락 오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기다려야 할 텐데. 언제 돌아갈 거냐?”
“잘 계신지 확인했으니 용건은 끝났습니다. 일이 좀 남아서 최대한 빨리 돌아가고 싶으니 서신 보내주십시오.”
“아니, 우리 가문에 새 식구 들어온 게 몇 년 만인 줄 아냐? 넌 가도 상관없는데 에리얼하고는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걔는 두고 너만 가지 그래.”
“헛소리는 1절만 하십시오. 말이 됩니까, 그게.”
“말이 안 될 건 또 뭐야. 남도 아니고 가족인데 조금 붙어 있을 수도 있지.”
베르트발드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를 흘겨보았다.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저를 놀리는 의도가 분명했다. 고민하다가, 이내 봐준다는 듯 거만한 얼굴로 리히터를 마주하며 말했다.
“3일만 봐 드리죠. 3일 뒤 아침에 바로 돌아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