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반짝이는 백금발과 짙푸른 눈동자, 선연한 외모는 그 자체로 인장과 같은 효력을 나타냈다. 얼굴을 확인한 마스터가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백작님.”
베르트발드는 바이온에게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지시한 뒤 홀 안으로 이동했다. 진청색과 암청색을 반씩 섞은 푸른 눈동자가 나른한 빛을 품고 마스터에게 시선을 던졌다.
후드에 눌려 살짝 흐트러진 앞머리가 단정한 이목구비와 맞물려 평소와 다른 느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는 후드를 마스터에게 건네며 홀 안을 스윽 둘러보았다.
“손님은?”
“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중한 손길로 후드를 건네받고서 마스터가 직접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로 내려갔다가 복도를 꺾어 다시 2층으로 올라간 뒤 다시 지하로 내려가는, 구조를 특정하기 힘든 미로 끝에 아무 장식 없는 밋밋한 문 하나가 나타났다.
마스터는 조용히 문을 열고서 예를 표한 뒤 지나온 길로 자취를 감췄다. 베르트발드는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방 한가운데에 놓인 테이블에 착석했다.
협탁과 의자만 단출히 놓인 방 끝에 한 남자가 서성이고 있었다.
베르트발드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발소리를 죽여 그의 앞에 섰다. 적당한 키, 서른 후반쯤 되어 보이는 평범한 외모의 남자. 옷매무새도 무척 평범했다.
생각지 못한 인물에 베르트발드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내가 호출한 건 일반 길드원이 아닌데. 단장은?”
단 한마디만 들었을 뿐인데도 남자는 자존심에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남자는 제가 길드의 수뇌부인 것을 뻔히 알면서 저런 말을 지껄이는 것이다.
하지만 저 밉살스러울 만치 잘생긴 남자는 여느 귀족 나부랭이가 아닌 제국의 수석 집정관이자 길드장의 인척인 얀셀 백작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여 가벼이 예를 표했다.
“단장은 길드장님과 함께 급한 일을 처리 중이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노여워 마십시오.”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상대를 위아래로 훑었다. 가늠하는 듯한 푸른 눈동자는 온기 따위 없이 냉랭하기만 했다.
“노스라이드의 길드장, 은퇴한 거 아니었던가.”
어조 속에 왜 아직도 은퇴하지 않고 돌아다니냐는 듯한 타박이 스며 있었다. 길드원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대꾸했다.
“여전히 현역이십니다. 백작님께서 결혼하셨다고 요즘 꽤 흥미를 가지고 계시는 중입니다만 백작님께서도 충분히 아실.”
“됐고, 의뢰.”
베르트발드가 곁에 서 있던 거구의 남자, 바이온에게 눈짓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바이온은 굳은 얼굴로 품 안에서 갈색 자루 하나를 꺼내 테이블 중앙에 올려놓았다.
금화일 거라 생각한 길드원이 눈을 빛내며 자루를 열었다. 그리고 곧, 황당한 표정으로 베르트발드와 자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루 안에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한 움큼 담겨 있었다. 길드원은 재빨리 품 안에서 감정용 안경을 꺼내 보석들을 살폈다.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최고급 순도의 다이아몬드였다.
“어떻게 이 정도나… 대체 어떤 의뢰를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마법사를 찾고 있다.”
길드원이 감정용 안경을 테이블 위로 툭 떨궜다.
의뢰인과 만날 때에는 냉정과 침착이 필수였지만 의뢰비도, 의뢰 내용도 모두 지나쳐서 냉정해질 수가 없었다.
“마법사… 마법사요? 그 마법사요?”
“사기꾼 말고, 제대로 된 진짜 마법사. 마도구로 진짜 마력을 갖고 있는지 검증할 테니 혹여 사기 칠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접어두도록.”
“제가 무슨! 어떻게 백작님께 사기를 치겠습니까! 단지, 그, 마법사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옛말이 된 지 오래됐잖습니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에.”
베르트발드가 혀를 차며 짜증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이래서 일반 길드원 따위가 아니라 단장을 데리고 오라고 한 건데. 쉽지 않은 일이니까 정식으로 의뢰하려는 것 아닌가. 쉬운 일이었으면 사우스빌의 길드장을 써먹겠지, 노스라이드까지 손을 뻗었겠나.”
“…아니, 그게 말입니다….”
“바이온.”
이름을 읊자, 바이온이 품 안에서 똑같은 자루를 하나 더 꺼냈다.
마찬가지로 다이아몬드가 가득 들어 있는 자루였다. 베르트발드는 팔짱을 낀 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는 정보원 모두 풀어. 모자라면 더 준비하지.”
“아니,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자네 선에서 못 하겠으면 단장 불러와.”
길드원은 두 개의 자루를 바라보며 깊은 고뇌에 잠겼다.
길드 명의로 들어온 의뢰, 게다가 하필이면 그 유명한 얀셀 백작의 의뢰이니 과용 없이 솔직해져야만 했다.
길드원은 자루 하나를 품에 집어넣고서 나머지 자루를 베르트발드 쪽으로 조심스레 밀어냈다.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산하의 정보원을 모두 풀어서 찾아보겠습니다. 다만….”
베르트발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자 길드원의 말이 빨라졌다.
“백작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마법사나 마녀 같은 건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찾기 힘듭니다. 마지막 마법사에 대한 기록이 무려 50년 전이지 않습니까. 어딘가에 은둔지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전설에 가까운 말이고요. 이런 의뢰는 종종 받습니다만 아직까지 한 번도 찾아낸 적이 없.”
“단장 불러와.”
“…기는 해도 정보원 전체가 움직이면 실마리를 찾아낼 수도 있겠지요. 그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기에, 미리 드리는 말씀입니다.”
조심스레 말을 마무리하며 길드원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베르트발드는 표정 없는 얼굴로 길드원을 직시한 채 퉁명스레 말했다.
“안 되겠군. 길드장에게 직접 의뢰하겠다.”
길드원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무, 물론 길드장님은 마법사들의 행방을 빨리 찾아내실 테지만! 정말 죄송하게도 길드장님의 거취는 저희도 모릅니다! 그분이 얼마나 은밀히 움직이시는지 백작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
“길드장님의 거취가 파악되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이 건은, 부디 저를 믿고 기다려주십시오.”
베르트발드는 턱을 괸 채 미심쩍은 눈으로 길드원을 바라보았다. 그늘진 시선이 길드원의 속내를 훑으려는 듯 차갑게 빛났다.
암갈색 테이블 위로 괴괴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상대에 대한 확신이 생길 즈음, 길드원을 쏘아보던 베르트발드가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테이블 모서리를 슥 문지르며 무감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일단은 믿겠다. 이쪽도 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정보를 끌어모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꼭 백작님께서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석 달.”
말을 자르며, 베르트발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 달 안에 쓸 만한 정보를 찾아내지 못하면 자네를 그 자리에서 경질하겠다. 그러니 꼭 찾아내도록.”
길드장도 섣불리 왈가왈부할 수 없는 말을 태연히 입에 올린 후, 베르트발드가 곧장 뒤돌아 방을 빠져나왔다. 바이온은 난감한 얼굴로 길드원을 한 번 쳐다본 후 주군의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기 전 커다란 한숨 소리가 바이온의 귓가를 스쳤다. 바이온은 다소 안쓰러운 마음을 숨기며 문을 닫았다.
베르트발드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돌아 처음에 왔던 홀에 도착했다. 기다렸다는 듯 마스터가 능숙한 손길로 그의 어깨에 하얀 후드를 씌워주었다.
“이야기는 잘 마치셨습니까.”
베르트발드는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낮은 목소리로 마스터에게 말을 건넸다.
“남부에 혹시 노스라이드 길드장과 청새매 단장이 돌아다니는지 찾아보게. 마법사 쪽도, 지금보다 더 사람을 풀어서 정보를 모으도록.”
마스터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를 지켜보던 베르트발드가 차분한 얼굴로 뒤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마스터 뒤에 시립해 있던 급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슬쩍 허리를 숙였다.
이곳에서 일하는 급사들 중에 피오니아의 실질적인 주인이 마스터가 아닌 눈앞의 젊은 백작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심한 눈길로 내부를 훑던 베르트발드는 곧 무의미한 성과에 아쉬운 한숨을 흘리며 가게를 떠났다.
* * *
며칠 뒤, 에리얼과 베르트발드는 선대 가주인 리히터를 만나기 위해 네딕행에 올랐다.
겨울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치 남부의 11월은 화창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우기가 한창인 여름과 달리 적당한 습기를 머금은 대기가 선선한 바람과 함께 마차를 휘감았다.
에리얼은 차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어 올려 바깥에 어룽진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백작저에 있던 나무들은 잎끝이 모두 둥그스름했는데 네딕 해안을 따라 자리한 나무들은 종이 다른 건지 잎새 끝이 모두 뾰족뾰족해서 왠지 모르게 북부를 연상케 했다.
“네딕은 그랑파하르하고는 좀 다른 것 같아.”
조금 쌀쌀한 것 같기도 하고, 중얼거리며 에리얼이 양팔을 손으로 감쌌다. 그러자 함께 마차에 타고 있던 비에타가 주섬주섬 담요를 꺼내 들었다.
“여긴 조금 쌀쌀하죠? 네딕은 파하르에서도 제일 끝이라서 날씨도 해류도 달라요. 사람들 성격도 무덤덤하고요.”
“어머, 그래?”
“니키가 네딕 출신이거든요. 주드는 그랑파하르… 완전 남부 출신이고. 그래서 자주 싸워요. 특히 차 마시는 법으로요.”
“왜? 차 마시는 법이 서로 달라?”
“네. 네딕에서는 차에 딸기잼을 넣어 마시는데 그랑파하르에서는 라임 조각을 넣어 마시거든요. 그런데 서로 차 맛 떨어진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루에 차 마시는 시간이 두 번 있잖아요? 그때마다 얼마나 싸우는지 몰라요.”
‘참고로 저는 아무것도 안 넣어 마시는 편이에요.’ 하며 비에타가 진지하게 말을 덧붙였다. 웃으며 말을 듣고 있던 에리얼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화제에 편승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북부에서도 비슷한 거 있어. 동부랑 서부랑 마요네즈로 자주 싸워.”
“마요네즈요? 왜요?”
“동부는 매콤한 음식에 꼭 마요네즈를 곁들여 먹거든. 그런데 서부에서는 아무 때나 느끼한 걸 갖다 붙인다고 엄청 싫어하더라고.”
“아아… 뭔지 알 것 같아요.”
“웃기지? 어머니랑 아버지 한 번도 싸우신 적 없었는데 마요네즈로 싸우시는 거 보고 조금 신기하더라.”
비에타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가히 신화의 인물이라 여겨졌던 아이기스 공작이 니키, 주드와 동급으로 끌어내려지는 순간이었다.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리얼은 평온한 얼굴로 ‘참고로 나는 주면 먹고 안 주면 안 먹는 편이야.’ 하고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시시덕거리며 두어 시간을 달렸다. 숲을 지나쳐 또다시 해안가에 접어들었을 때 즈음 천천히 마차가 멈췄다.
갈색 벽돌로 지어진 2층짜리 저택은 화려한 백작저와 달리 낡고 조촐한 분위기를 풍겼다. 현관 앞에는 먼저 출발했던 베르트발드의 마차가 멈춰 서 있었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에리얼이 지팡이를 두드리며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거기 잠깐 멈춰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