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유년 시절까지 썼던 방이었다.
대대로 얀셀가의 후계자들이 쓰는 방이었지만 이제는 아기 침대와 목조 장난감, 모빌 따위의 자질구레한 것들을 모아 둔 창고와 다름없는 곳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대청소를 하는 날 외에는 하녀들도 들어가지 않는 곳이라 에리얼이 숨기에 적격인 장소였다.
“부인?”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방에 들어섰다.
아기 침대와 작은 책장, 키가 낮은 책상과 어린이용 사다리 따위가 하얀 천을 뒤집어쓰고 시간의 흐름 속에 멈춰 있었다. 베르트발드는 신중한 눈길로 가구들을 살피다가 구석에 위치한 아기 침대로 시선을 고정했다.
성인이 쓸 수 있을 만큼 큼지막한 크기의 아기 침대였다. 옅게 먼지가 내려앉은 다른 천들과 달리 아기 침대에 씌워진 천만 먼지 한 톨 없이 보송보송했다.
“에리얼.”
재차 이름을 부르자 침대에 덮여 있던 하얀 천이 꿈지럭거렸다.
웃기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베르트발드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침대로 다가갔다.
“저택에 이렇게 큰 아기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
“안아서 토닥토닥해줄까요.”
작은 한숨이 귓가를 스쳤다. 잠시 후 침대 한가운데로 불쑥 하얀 천이 튀어 올랐다.
웃음을 참으며 천을 옆으로 끌어 내렸다. 에리얼이 눈을 굴리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베르트발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와. 여기 숨었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부인께서 숨을 만한 곳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자, 약 드세요.”
베르트발드는 비에타에게 쟁반을 건네받고서 수프 그릇을 들어 올렸다. 꾸덕꾸덕한 검은 액체는 한눈에 봐도 매우 역겨워 보였다. 에리얼은 윗입술을 오물거리며 먹기 싫다, 먹기 싫다 중얼거리다가 결심한 듯 단번에 약을 들이켰다.
눈을 질끈 감은 채 꿀떡꿀떡 약을 삼킨 에리얼이 끔찍하다는 얼굴로 부르르 상체를 떨었다. 베르트발드는 그릇을 다시 건네받고서 에리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요. 약만 아니었으면 대신 먹어줬을 텐데.”
쟁반을 뒤로 물리며 에바에게 눈짓을 전했다. 그러자 에바가 치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베르트발드에게 건넸다.
에바는 들리지 않을 만한 목소리로 그에게 뭔가를 속삭이더니 잠시 후 비에타와 함께 밖으로 물러났다.
달각달각, 에바가 건넨 물건을 성의 없이 흔들던 베르트발드가 상자 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들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에리얼이 코를 킁킁거리다가 어, 탄성을 질렀다.
“그거! 그거!”
“아 해봐요.”
“그거 감초 사…항이이 않… 우움.”
“하녀가 선물로 준 거라는군요. 마음에 드십니까.”
에리얼이 들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트발드는 마주 웃으며 하나 더 드릴까요 하며 한 개를 더 입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못마땅한 표정으로 사탕을 내려다보았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새카만 사탕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먹음직스러워 보인다고 할 수는 없었다.
감자 타령 할 때도 그러더니 참 식성 특이하다니까, 생각하며 베르트발드가 사탕 상자를 에리얼의 손에 쥐어주었다.
“눈. 부인께서 낫고 싶다고 했잖습니까. 약을 먹어야 빨리 나을 텐데 왜 약 먹을 때마다 도망갑니까.”
“…으으음. 그게….”
“살짝 먹어보니까 맛없긴 하던데… 원래 약들이 다 그런 법이니 부인께서 이해하시고.”
“아니. 그것 때문은 아니고요.”
우물쭈물하던 에리얼이 사탕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삼킨 뒤 ‘사실은요.’ 하며 운을 뗐다.
“눈에 좋은 것들만 모아온… 귀한 것들로 만든 약이잖아요. 백작님이 사다 준 약들도 다 그렇고… 앞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다들 나서서 약 갖다주고 영험하다는 것들 갖다주고.”
에리얼은 고개를 삐뚤게 세운 채 곰곰이 말을 고르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가 생각나서요. 공작성에서도 비슷한 분위기였거든요. 가족들이야 그렇다 쳐도 사용인들까지 전부 모여서 온갖 약초에 주술서에 이상한 마도구까지 갖고 와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 뼛가루에 사슴 피까지 갖고 와서 먹으라고 들이대는데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떠올려보니 입 안에 비린 맛이 도는 것 같아 에리얼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런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물건 하나하나마다 첫째 아가씨를 향한 염려와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으니까.
“약 먹는 건 하나도 안 힘들어요. 그런데 그냥….”
어렵게 약초를 구해서 정성껏 만드는 게 힘든 거지 먹는 게 뭐가 힘들까. 다만 에리얼이 걱정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냥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애쓰다가 결국 낫지 않으면 저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속상해할 것 같아서. 그게 좀, 그래서요.”
팔짱을 낀 채 에리얼을 내려다보던 베르트발드가 탁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까 봐 이러는 겁니까.”
“…그런가 봐요.”
빤히 쳐다보자 에리얼이 몸을 배배 꼬며 난처한 표정을 떠올렸다.
“아, 그게. 제가 낫고 싶다고 해놓고 이러는 게, 참 바보 같은 건 아는데….”
에리얼이 하얀 천을 끌어당겨 민망한 듯 얼굴을 감쌌다.
혹여 먼지라도 묻을까 싶어 베르트발드가 슬그머니 천을 옆으로 치웠다. 머쓱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슬슬 빗질했다.
“압니다. 무슨 말 하고 싶은 건지.”
“…….”
“하지만 기대하고 실망하는 건 다른 사람 몫이지 부인의 몫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약 먹어요. 날 위해서라도. 알겠습니까.”
다정하게 말하자 에리얼이 뺨을 붉히며 네, 순순히 대꾸했다.
병자가 손님 걱정하는 꼴이라니. 정말이지 에리얼다운 이유였다. 늘 자신보다 남을 우선하는 여자인 건 알았지만 하다 하다 별걱정을 다 한다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게 에리얼인 것을.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일축하는 건 쉽지만 굳이 상냥한 마음을 짓밟고 싶은 생각은 없기에 조용히 입을 닫았다. 베르트발드는 침대 난간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다른 화제로 대화를 이끌었다.
“부인 덕에 오랜만에 이 방에 와봅니다. 여기. 무슨 방인지 아시겠습니까?”
에리얼이 침대 난간에 턱을 올리며 코끝을 쫑긋거렸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외쳤다.
“알아요. 백작님이 어렸을 때 쓰던 방이죠?”
“…에바가 말해줬습니까?”
“아니에요. 이 방, 백작님 냄새랑 아기 냄새가 같이 나거든요.”
시각이 둔한 만큼 다른 오감이 발달된 그녀였다. 들어 온 순간부터 에리얼은 이곳이 베르트발드의 방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에리얼은 뻐기는 듯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베르트발드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휙, 난간을 넘어 침대 위로 올라왔다. 긴 다리를 쭉 뻗어 침대에 기댄 모습이 나태하면서도 장난스러움이 가득했다.
“아기 냄새는 거의 나지 않을 텐데. 두어 살 때쯤 수도로 끌려갔다가 다시 파하르에 내려온 건 8살 무렵입니다.”
“어머, 그런가요? 수도 저택에서 자라신 건 아니고요? 어라, 그러고 보니 거기는 이런 아기 방이 없었네.”
“수도 저택은 아니고. 그 전까지는 어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그의 반응이 지나치게 태연해서 에리얼도 ‘그랬군요.’ 하고 자연스레 흘려넘겼다. 짧은 침묵이 지나고, 에리얼은 그제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베르트발드의 눈치를 살폈다.
잿빛 눈동자에 담긴 붉은 인영은 아무런 파동 없이 평소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방금 백작님이 어머니라고 한 거 맞나?
지금은 최연소 집정관으로 유명세가 남다른 베르트발드였지만 능력을 인정받기 전까지 사교계에서 그의 별명은 ‘사생아 백작’이었다.
사실 사생아라 칭하기도 애매했다. 본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정부가 낳은 아이를 데려왔다면 사생아겠지만 그런 상황도 아니었으니.
선대 가주였던 리히터 얀셀은 미혼이었고,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아들이라며 갓난아기를 저택에 데리고 왔다.
그게 베르트발드였다.
그가 얀셀가의 핏줄은 맞는지, 어머니가 대체 누구인지 수많은 추측이 오갔다. 수도 사교계뿐만 아니라 남부 사교계에서도 온갖 소문이 잇따라 퍼져나갔다. 하지만 소문이라는 게 늘 그렇듯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풍화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잔재도 남지 않아 무엇이 진실인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베르트발드가 집정관이 되면서부터 그에 대한 화제는 사교계 내에서도 금기시되었다. 그가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기보다는, 그저 수석 집정관의 심기를 살피기 위한 귀족들의 처세술이었다. 그 분위기에 익숙해진 에리얼도 먼저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신가요?”
에리얼이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내내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베르트발드가 눈매를 찡그리며 턱을 쓸었다.
“제가 여태껏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서 가장….”
“…아름다우신…?”
“고약하신 분입니다.”
“…고약하시다고요?”
에리얼이 되묻자 베르트발드가 조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트발드는 검지 마디를 구부려 톡톡, 입술을 두드렸다. 짙푸른 눈동자에 옅은 회한이 감돌았다.
“애를 애 취급하면 영원히 애라는 둥, 어른 대접을 해줘야 큰다는 둥 하며 아무렇지 않게 어린아이를 사지로 내모는 분이십니다. 영재교육이랍시고 독 쓰는 법과 이중장부 쓰는 법 따위를 가르치시더군요.”
“헉….”
“지금에야 결과적으로 다 쓸모있는 지식들이긴 합니다만 아이를 양육할 만큼 상냥한 분은 아니십니다. 워낙 자유분방하고 성정이 거친 분이기에 별일 아닌 걸로도 많이 맞았습니다.”
우와. 감탄 아닌 감탄을 내뱉으며 에리얼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백작님이 누구에게 맞는 모습은 전혀 상상이 안 가는데요.”
“…저도 지금 와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성격 고약한 건 어머니를 닮았을 텐데 어떻게 참았을까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를 때린 사람은 어머니가 유일합니다.”
투덜거리는 그의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조금 귀엽게 느껴져서 에리얼은 저도 모르게 빙긋 웃고 말았다.
“어머니를 싫어하시는 건 아닌가 봐요.”
허를 찌르는 질문에 베르트발드가 슬쩍 눈썹을 추어올렸다. 그러고는 곧 헛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애도 아니고…… 그런 일로 어머니를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지나와 생각해 보면 그것도 그분 나름대로의 애정 방식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정말 귀찮았다면 수도로 끌고 가지도 않으셨겠지요.”
어머니의 대한 단상은 항상 씁쓸하면서도 아린 애정으로 매듭지어졌다. 지독할 정도로 일만 생각하던 여자가 어미 노릇 하겠답시고 이것저것 가르치는데 어찌 손길을 내칠 수 있을까. 베르트발드는 쓰게 웃으며 추억을 정리했다.
“그래도 썩 평화로운 유년기는 아니었으니… 만약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아이에게는 제가 겪어보지 못했던 부모의 애정을 듬뿍 주고 싶었습니다.”
워낙 개성 강한 부모 밑에서 자라 응석다운 응석 한 번 못 해보고 자란 베르트발드였다.
지금이야 가신들도 많고 에리얼도 옆에 있으니 아이 따위 아무래도 좋지만 만약 생긴다면 자신과는 다르게 애정을 잔뜩 쏟아부어 키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