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84화 (84/145)

84화

“아, 어쩌면 좋아.”

에리얼은 웅크린 다리를 끌어안고서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너무 부끄러워서 땅속으로 숨고 싶었다.

‘백작님이 날 좋아한대요!’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다가도 여전히 꿈만 같아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말을 해 버리면… 꿈이 깨질 것만 같았다.

「당신이 좋아서 결혼한 겁니다. 아이기스 공녀가 아니라 에리얼이라서.」

농담이냐고, 놀리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윽한 목소리는 오롯이 진심만을 담고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두근거린 적이 있을까.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뛸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손을 들어 가슴 언저리를 살며시 문질렀다. 있는지도 몰랐던 심장이 손에 잡힐 듯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조금 더 세게 무릎을 껴안고 머리를 기댔다. 날아갈 것처럼 기분 좋으면 폴짝폴짝 뛰기만 했는데,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좋으면… 이렇게 작아지게 되나 보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호응하듯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와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온기를 불어넣었다.

포근한 느낌. 정말로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스르르 눈을 감고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너울이 이는 소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귀를 자극해 자장가처럼 안식을 몰고 왔다. 가물거리는 의식 사이로 파도 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왔다.

자연의 선율에 넋을 놓은 채, 에리얼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너무 늦지 않게 데리러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흐린 의식 속에서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마도… 남자. 성인이라기에는 조금 앳된 느낌의.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인데.

아닌가.

비슷한 걸 들어본 것 같아. 살짝 다르지만… 이 목소리랑 흡사한 목소리가 분명….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맞아. 이 목소리.

나직한 음성과 함께 이마에 서늘한 촉감이 느껴졌다. 부드럽게 이마를 쓸던 손길이 한참 동안 뺨에 머물러 있다가 스르륵 내려와 허리를 감쌌다.

“피곤했나… 눈가도 거뭇하더니. 하긴, 집 뛰쳐나가서 발 뻗고 잘 잤으면 그건 그거대로 열받는군.”

몸이 휙, 뒤로 당겨지고 등 뒤로 뜨거운 체온이 닿았다. 단단하면서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품속은 아늑함과 동시에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어미에게 안겨 있는 아기곰이 이런 느낌일까.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굳어 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 속에 붉은색과 회색이 뒤엉켜 복잡하게 혼재하고 있었다.

“이것도 예지몽인가…? 아닌데… 그냥 꿈인가…?”

비몽사몽 한 기분으로 흘리듯 말을 내뱉자 바로 위에서 대꾸가 날아왔다.

“무슨 꿈?”

“너무… 늦지 않게 데리러 온다고.”

“누가?”

“…아마도 백작님인 것 같은데.”

“베리가?”

“응. 베리가… 기다려달라고….”

졸린 기운이 점점 가시고 시야가 또렷해졌다.

방금 전 대화를 돌이켜보니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에리얼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베, 베리가 아닌가 보네. 착각이었나 보다.”

“데리러 갔잖아. 착각 아닌 것 같은데… 베리 맞나 봅니다.”

태연한 대꾸에 에리얼은 ‘그, 그런가….’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하며 손바닥으로 뺨을 쓸었다. 곧 머리 위로 김빠진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기특하네. 꿈이든 뭐든 그 말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헛고생은 아니었나 봅니다.”

들릴 듯 말듯 속삭이며 베르트발드가 에리얼을 자신의 품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주어가 불분명한 걸 보니 혼잣말인 것 같아서 에리얼은 대답 없이 잠자코 안겨 있었다.

눈을 끔뻑거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무채색 시야 속에 널찍한 침대의 모습이 담겼다.

왜 침대지? 생각한 순간, 타이밍 맞춰 베르트발드가 말을 걸어왔다.

“몹쓸 짓 하려는 거 아니니까 안심해요. 창가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길래 침대로 데려온 겁니다.”

“…아, 아아.”

느릿하게 허리 주변을 배회하던 손바닥이 천천히 배꼽 아래로 이동해 닿을 듯 말 듯 부드러운 손길을 이어갔다. 얕은 숨과 함께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귀 언저리를 스쳤다.

“불안하게 왜 창가에서 자고 있어요. 그러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게… 백작님 오실 때까지만 잠깐 앉아 있으려고 했는데. 마음이 풀어져서 저도 모르게 졸았나 봐요.”

눈가를 비비적거리며 하품을 하자 맞닿은 등이 살짝 떨려왔다. 아마도 웃는 것 같았다.

“안고 있으니까 나도 잠이 오네요. 제대로 잠을 자본 게 얼마 만인지.”

“아… 백작님, 일 때문에 매번 바쁘셔서….”

“일은 무슨. 누구 때문에 잠을 설쳤겠습니까.”

타박하는 듯한 어조에 에리얼이 목을 움츠렸다.

아니, 설마.

“저 때문에 잠을 못 주무셨어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자 바로 예, 하고 대답이 돌아왔다.

“어디 보자… 이혼하자고 부인께서 가출하신 게 열흘… 아니, 열흘도 넘지 않았습니까. 그간 걱정이 되어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요. 불안 장애로 헉헉대지는 않을까, 아프지는 않을까, 밥은 제대로 먹고 있을까, 새벽에는 쌀쌀해서 창문 닫고 자야 할 텐데.”

“…….”

“얼마나 속이 타던지. 부인께서는 저 없이 잘 주무셨나 봅니다?”

“아, 아뇨! 그럴 리가요!”

“…다행입니다. 저만 속 타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뭐 여태까지도 저 혼자만 끙끙 앓고 있던 것 같지만.”

퉁명스레 내뱉은 말 속에서 자조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듣고 있으니 꼭, 아주 오랫동안 자신을 좋아했었다고 고백하는 것 같아서 할 말이 없어졌다.

너른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안겨 있는 에리얼의 몸도 함께 움찔거렸다. 가만히 그의 체온을 느끼고 있던 에리얼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원래 다 이런 걸까요?”

“뭐가 말씀입니까.”

“백작님을 좋아한다고… 처음 자각했을 때. 저도 비슷했던 것 같아서요. 마음이 뚝 떨어지는 것 같고, 속이 되게… 아팠어요.”

나는 이렇게 좋은데 이 사람은 그러지 않을 것 같아서. 마음이 보답받을 길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

나락에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발밑이 통째로 무너지는 듯한 그 감각은 살면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하고 우울했다.

“왜 아팠는지 이유를 알겠습니까.”

감정의 결을 헤아릴 수 없는 무뚝뚝한 목소리가 귀 언저리를 맴돌았다. 에리얼은 가슴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 혼자만 백작님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나름 용기 내서 대답한 거였는데 살짝 빈정이 상했다.

‘왜 웃으세요.’ 하고 새된 목소리로 대꾸하자 웃음소리가 더욱 강해졌다. 울컥한 에리얼이 손을 밀어내려고 하자 뒤늦게 웃음소리가 사그라들었다.

“미안해요. 그냥, 우리 대체 뭘 하는 걸까 싶어서.”

말이 나옴과 동시에 에리얼의 몸이 빙글 돌려졌다.

마주 본 자세로 누워 지그시 에리얼을 내려다보던 베르트발드가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톡 튀어나온 부근을 검지로 부드럽게 쓸며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도 그래요. 부인이 밀어낼까 봐 무서워서… 숨기는 데에만 급급했지 마음을 전할 생각은 한 적 없었으니까.”

“백작님도요?”

“그렇습니다.”

대답하는 음성은 평소보다 조금 더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냥 좋다고 말하면 됐을 걸 왜 어렵게 빙빙 돌아왔을까. 가끔 이렇게 바보 같아져서 곤란합니다.”

손목을 어루만지던 손이 살갗을 타고 올라와 살며시 깍지를 꼈다. 베르트발드는 깍지를 낀 채 엄지손가락으로 손바닥과 손등을 쓸어내렸다.

느릿한 손가락의 움직임,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그의 숨결. 아스라한 침묵 속에서 이어질 말을 고르는 그의 신중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에리얼. 나 좀 봐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졸음에 겨운 눈꺼풀이 붉은 인영을 시야에 담은 순간 단박에 또렷해졌다. 괜스레 긴장되어 허리를 곧추세운 찰나, 베르트발드가 한결 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 약속 하나 합시다.”

“무슨 약속이요?”

침대에서 일어난 베르트발드가 에리얼을 일으켜 자신의 앞에 앉혀놓았다.

마주 본 틈새로 다소 무거운 침음이 내려앉았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베르트발드가 진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좋은 것도 그렇지만, 서운하거나 속상한 일 있으면 솔직하게 다 말하기로. 속으로 끙끙 앓다가 이혼하자는 말 따위 꺼내지 말고.”

“…이, 이혼이요….”

“부부 사이에 절대 꺼내지 말아야 할 단어 중 가장 대표적인 단어가 이혼입니다. 비난은 감수하면 그만이지만 관계를 파탄 낼 만한 발언은 지양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꿈결 같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고해의 시간이 되돌아왔다. 에리얼은 어깨를 잔뜩 좁힌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모든 오해가 사과 한 마디로 종식된다면 전쟁 따위는 일어나지 않겠지요.”

“저, 정말 죄송해요! 앞으로 절대 안 그럴게요.”

“…….”

“진짜로요… 그게, 저 때문에 집정관 쫓겨나셨다고 들어서. 제가 있어봤자 쓸모가 없을 것 같아서. 백작님이 싫어서 이혼하자고 한 게 아니라! 그게!”

“집정관은 쫓겨난 거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부인과 결혼했으니 그만둔 거라고 했습니다.”

또, 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에리얼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며 떠보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또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꼭… 저랑 결혼하시려고 집정관 하신 것 같잖아요.”

“이게 농담으로 들렸습니까. 집정관 정도는 되어야 격이 맞지, 저 같은 사람이 아이기스 공녀랑 어떻게 결혼합니까.”

“…진짜요?”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던 에리얼이 얼빠진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와… 몰랐어요. 백작님이 저를 그렇게 좋아하셨을 줄은.”

‘어떻게 저 같은 사람하고 결혼하려고 집정관이 될 수가 있어요?’ 바보 같은 음성이 그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베르트발드는 미간을 구긴 채 눈앞의 여자를 노려보았다.

“저는 부인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사랑하지만, 지금처럼 눈치 없이 본심을 툭툭 내뱉은 태도는 도저히 품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 어… 기, 기분 상하셨어요?”

“진지한 연심을 그렇게 무성의한 단어로 뭉뚱그리니 제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입니다. 예. 기분 나쁩니다.”

무뚝뚝한 말투에 에리얼이 시무룩한 표정을 떠올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