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던 에리얼이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발그레하게 볼을 붉혔다. 뺨에 달라붙은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는 손길, 허리를 받치고 있는 손바닥의 뜨거운 열기가 무척 새삼스러웠다.
“오, 오실 줄… 몰랐어요.”
모기만 한 음성으로 중얼거리자 베르트발드의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에리얼은 축축한 드레스 자락을 꼬옥 움켜쥔 채 더듬거리며 말을 쥐어 짜냈다.
“이대로 그냥 이혼… 해주시는 줄… 알고….”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반가움에 뛰어온 건 좋았지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이혼하자며 먼저 저택을 뛰쳐나온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는데.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고요에 동조한 건 베르트발드도 마찬가지였다.
똑, 똑, 옷자락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거슬리게 느껴질 때쯤이었다.
“왜 이혼하자고 하신 건지… 이유를 묻지는 않을 겁니다. 떠나려는 것도, 저를 기만하신 것도 전부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늘진 목소리가 머리 위를 스쳤다.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올리자 크게 일렁이는 붉은 파동이 시야에 비쳤다. 왜냐고 묻기 전에 베르트발드가 먼저 말을 가로막았다.
“부인의 변덕을 이해 못 할 소인배는 아닙니다. 이혼도 마찬가지로,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이혼해드릴 겁니다. 마음껏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심중을 가늠할 수 없는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그 때문에 더욱 진심으로 느껴졌다.
이혼해준다니.
자유를… 누리라니.
대답을 들을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자신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성기게 풀어졌던 마음이 단단히 굳는 건 순식간이었다. 에리얼은 입술을 깨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이 에리얼을 품 안으로 휙 끌어당겼다. 베르트발드는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은 채 귀에 새기듯 한 음, 한 음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다만 명심하십시오. 부인의 재가를 용인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네?”
“부인께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모시러 갈 겁니다. 그때 다시 결혼해주십시오.”
에리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베르트발드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뭐라 말하고는 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고 있어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베르트발드는 손가락을 들어 에리얼의 얼굴을 살살 쓸었다. 바닷바람에 차가워진 뺨, 작은 콧등, 부드러운 곡선의 인중과 도톰한 입술.
이제는 놔줄래도 놔줄 수 없는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렇게 좋다고 뛰어온 걸 보면 제가 싫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 아닐 텐데. 맞습니까.”
“…그, 그건.”
“곁에 있는 게 힘들고 괴로우면… 잠깐은 풀어줄 수 있습니다. 자격지심이 생긴다는 건 그만큼 서로를 의식하고 있다는 거니까. 그렇지만.”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서, 이렇게 볼품없는 꼬락서니로 마음을 고백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놀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얼굴을 마주하니 아무래도 좋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에리얼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검지로 스윽 훔치며 스르르 입매를 끌어당겼다.
“그렇지만 완전히 놔줄 수는 없어. 당신, 놔주기에는 내 안에서 이미 너무 커져버려서.”
빠르게 깜박이는 잿빛 동공 안에 초조한 얼굴의 자신이 비쳤다. 여유는 어디 가고, 그저 사랑에 애걸복걸하는 촌놈 하나가 남았다.
그 촌스러운 놈이 뭐가 좋다고 에리얼은 시뻘게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을 뱉었다.
“그, 그렇게 말하시면 오해하게 되는데요.”
“오해고 자시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되지 않습니까. 또 무슨 이상한 쪽으로 생각을 틀려고.”
“아니, 그게! 백작님이 꼭 저를… 조, 좋아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니까….”
차마 말을 이을 수 없다는 듯 에리얼이 말을 삼키며 목을 잔뜩 움츠렸다. 눈치 보는 꼴이 영 하찮았다.
바보 같았다. 이 상황도, 자신도, 눈앞의 여자도 모두.
빌어먹을. 이런 상황에서 진심을 꺼내야 하나.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이 멋대가리 없는 상황이 되레 솔직함을 부추겼다.
목소리에 웃음기를 거두고 베르트발드는 진중한 어조로 말문을 뗐다.
“자. 지금부터 제안을 하나 할 건데… 신중하게 대답하는 게 좋을 겁니다. 번복하지 않을 테니까.”
먼저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절대 고백하지 않으리라 결심했었다.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다.
이미 너무 많이 좋아해 와서, 그 심리를 보상받고 싶었다.
웃기기도 하지. 다 꺼지라는 심정과 함께 말을 뱉었다.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 받아들일 거면 포옹해주시고… 싫다면 뺨을 치십시오.”
잘게 떨리던 잿빛 눈동자가 크게 일그러졌다. 베르트발드는 빠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포옹해주신다면 이대로 저택으로 끌고 갈 겁니다. 뺨을 치신다면, 오늘은 일단 물러나겠습니다. 석 달 후에 공작가로 쳐들어갈 테니 푹 쉬고 계십시오.”
“뺘, 뺨을? 뺨을 어떻게.”
“이해됐습니까.”
작은 입술이 몇 번 달싹거리다가 할 말을 잃은 듯 굳게 다물어졌다. 찡그린 눈매 속에 천천히 물기가 고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고스란히 눈 속에 새기며 베르트발드가 나직이 속삭였다.
“에리얼. 당신을 사랑해.”
“…….”
“나, 당신이 좋아서 결혼한 겁니다. 아이기스 공녀가 아니라 에리얼이라서. 당신이 아니면 안 돼서. 당신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곁에 둔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결혼한 겁니다.”
“…….”
“그러니까 가지 마. 당신이 싫어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난, 당신 절대 못 놔요.”
꾹 다문 입매가 파르르 떨려왔다. 축 늘어진 입꼬리가 연신 움찔거리며 감정의 기복을 대신 전했다. 두어 번 눈꺼풀을 깜박이자 눈가에 맺혀 있던 물기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앙다운 입매, 잔뜩 치켜올려진 미간. 입을 열지 못하고 흐끅거리는 꼴이 어딜 봐도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그래서 더 좋았다.
이게 에리얼이니까.
이런 볼품없고 솔직한 여자가 에리얼 아이기스니까.
“…그… 어, 나… 나….”
눈을 질끈 감자 후두둑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에리얼은 흡, 흐극거리며 숨을 고르다가 띄엄띄엄 말을 내뱉었다.
“나, 나 같은 사람은. 자격이… 백작님이 나 때문에. 소, 손해 보지 않을까. 웃음거리가 될까 봐… 집정관도 못 하게 되시고. 괜히 나 때문에….”
“그냥 관둔 겁니다. 결혼하려고 집정관 된 거였으니까 이제 때려치우고 싶어서.”
“…안심하라고 괜히 이렇게 거짓말만 하시고.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더 내가 싫어지는 거예요. 난, 나는….”
설명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결정한 뒤 베르트발드는 에리얼의 뺨을 꼭 붙든 채 대답을 종용했다.
“그런 건 됐고. 포옹하든지 뺨 때리든지 빨리 고르십시오.”
“…윽….”
“배 출항할 시간 다 됐습니다. 저야 되도록 전자를 선택해줬으면 싶긴 한….”
휙, 멱살이 잡혔다. 고개를 숙이기가 무섭게 입술이 먹혀들었다.
양손으로 베르트발드의 옷깃을 꼭 부여잡고서 에리얼이 아랫입술을 꾹꾹 문질렀다.
난데없는 입맞춤에 놀란 것도 잠시뿐, 맞닿은 입술 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입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지 아랫입술에만 달라붙어 쪽쪽거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에리얼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서툴게 입술을 뭉개는 꼴이 귀엽기도 하지만 답답한 마음이 더 컸다. 능숙하게 목을 틀어 조금 더 깊게 입을 맞췄다.
익숙한 라벤더 향이 코로 흘러들어와 가슴 안쪽까지 깊게 퍼져나갔다.
아. 이대로 삼켜버렸으면.
어쩌면 좋을까, 너를.
“뭘까요. 이건 선택지에 없던 대답인데.”
이마를 맞댄 채 조용히 속삭이자, 울먹거리는 대답이 이어졌다.
“저도… 조, 좋아한다는 뜻이에요.”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에 결국 이성이 날아갔다. 베르트발드는 양손으로 에리얼의 뺨을 움켜쥔 채, 집어삼킬 듯 강하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 * *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
그녀가 이혼하자는 편지를 남기고 도망간 후 정확히 보름 만이었다. 안주인이 사라진 그랑파하르의 저택은 내내 우울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아픈 백작 부인을 보필하면서 사용인들 모두 그녀에게 정이 듬뿍 든 탓이었다. 특히 에리얼을 친딸처럼 아끼던 하녀장 에바를 비롯해 집사인 레오, 측근으로 그녀를 모시고 있던 니키와 주드, 마리아 세 사람은 키우던 고양이를 잃어버린 것처럼 슬픔에 젖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가주가 백작 부인을 들쳐 안고 저택에 돌아온 것이다.
환호하며 귀환의 기쁨에 젖어 있던 것도 순간이었다. 세 하녀들은 씩씩대며 저택을 도망간 배신자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비에타! 이 배신자 계집애!”
주드가 양손을 허리에 올린 채 씩씩대며 비에타를 흘겨보았다. 곁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마리아가 받아치듯 말을 이었다.
“비에타, 너도 참 너다! 아무리 마님이 나가고 싶다고 한들 네가 말렸어야 할 것 아니야!”
“아픈 사람 데리고 그 고생을 하고 싶었니?”
“북부가 무슨 옆집 개 이름이야? 어떻게 거길 갈 생각을 해?!”
원색적인 비난에 비에타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아씨, 억울한데. 멀찍이 서 있던 니키에게 살려달라는 눈빛을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 니키가 앞으로 나섰다.
“너… 이따 일 끝나고 창고 뒤로 좀 나와봐.”
깍지낀 손을 뚜둑, 뚝 꺾으며 니키가 목을 좌우로 움직였다. 체구는 제일 자그마한 주제에 뭐 이렇게 위압감이 넘쳐흐르는지. 비에타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좋아서 나갔겠냐고!”
“편지도 네가 써 드렸다면서! 소공작 하고 연락한 것도 너였고!”
“이 계집애야, 아무리 세상 물정 몰라도 부부싸움이 다 그렇고 그런 거라는 건 알아야 할 것 아니야! 저택이 얼마나 살벌했는 줄 알아?”
“아니, 아니…! 나도 안 된다고 말씀드렸지! 그런데 어떡해! 엎드려서 엉엉 우시는데!”
흉흉하던 하녀들의 눈빛이 정말이냐는 듯 미심쩍은 눈빛으로 변했다. 비에타는 걸치고 있던 케이프를 바닥에 내던지며 씩씩거렸다.
“왜 이혼하려고 하시는지 나도 몰랐단 말이야! 그냥 둘이 싸우셨나 싶었지. 가주님도 그래, 평소에 좀 더 좋아한다고 티 내셨으면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을 거 아냐!”
“…얘는, 가주님한테 바랄 걸 바래야지. 원래 좋든 싫든 내색 잘 안 하시잖아.”
“아니… 그렇게 내색 없는 분이 사람 많은 데서 그런 식으로 끌어안고 입맞춤을…!”
골이 당기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려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비에타는 하,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다시 떠올려봐도 정말 모든 게…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