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내리쬐는 햇살이 눈꺼풀을 뚫고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에리얼은 눈을 감은 채 들릴 듯 말 듯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남겨진 그림자에 꽃이 피어나, 나비의 날갯짓 너머 새로운 계절이 찾아오면.
나를 잊어주세요.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세요.
무의식적으로 흥얼거린 노래가 하필이면 이런 거라니. 자각하니 우울해져서 점점 콧소리가 잦아들었다. 우울한 의식 사이로 비에타의 발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마님! 짐은 다 실었으니까 이제 출발하셔도 될 것 같아요.”
하얀 보닛을 들고 온 비에타가 능숙한 손길로 에리얼의 머리에 보닛을 씌웠다. 리본을 묶고, 레이스를 정리하고. 바삐 움직이는 손길에 흥이 묻어났다.
“비에타. 기분 좋아 보인다.”
“아하하, 그래 보여요? 이렇게 멀리 여행 가는 건 처음이라서 떨려요. 뭐어, 기분 좋은 건 아니고요.”
회색 그림자 사이로 보이는 노란 파동. 분명 기쁘거나 즐거울 때 나는 색이었다. 하지만 에리얼이 울적할까 봐 내색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속내를 눈치챈 에리얼이 애써 웃으며 비에타의 어깨를 토닥였다.
“엄청 큰 여객선이래. 북부까지는 꽤 오래 걸리니까 일부러 좋은 배를 수배해줬나 봐. 도서관도 있고 산책로도 있고 연회장도 있고… 맞다. 음식도 엄청 잘 나온다니까 맛있는 거 실컷 먹자.”
“그렇게 말씀하시니 조금 기대되네요. 으음. 그렇게 좋은 배였으면 소공작님도 같이 타고 가시면 좋았을걸. 뭐가 그리 급해서 먼저 떠나신 거예요?”
“후계자들은 원래 가을에서 초봄까지는 영지를 떠나면 안 되거든. 겨울 준비로 엄청 바빠서… 아마 여기 온 것도 무리해서 온 걸 거야.”
‘백작님과 이혼할 거야’, 딱 한 마디만 내뱉었을 뿐인데 그웬은 이유도 묻지 않고 몹시 기뻐하기만 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임시 거처와 사용인들, 북부로 향하는 배편과 그 외 이동 수단까지 모든 걸 일사천리로 준비하고는 먼저 북부로 떠나버렸다. ‘혹시 그놈이 뭐라고 하든 무시하고 와’, 이 마지막 전언을 남기고서.
“참… 수도에서도 느꼈지만 자매 사이가 엄청 좋으셔요. 제 동생들도 크면 소공작님만큼 누이를 챙길지 원….”
“꼭 그렇지도 않아. 우리도 어렸을 때 꽤 싸웠거든.”
“진짜요? 상상이 안 가요.”
“귀족이라고 해도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거든. 위험한 곳은 가면 안 된다고 그웬이 하도 잔소리하니까, 몰래 나와서 놀다가 잡혀 들어가고… 그런 적 많았어. 나중에는 잔소리하는 것까지 꿈에 나와서 얼마나 진저리가 나던지.”
저택을 벗어나 항구로 향하는 언덕길에 발을 내딛던 찰나, 에리얼이 말을 흐리며 끙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꿈 하니까 생각났다. 오늘 아침에 좀 이상한 꿈을 꿨는데.”
“무슨 꿈이요?”
“부둣가를 뛰다가 갑자기… 어딘가로 떨어지는 꿈이었는데.”
정말 이상한 꿈이었다. 예지몽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꿈.
앞을 가로막고 있던 안개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시야가 확 트이는… 그 느낌은 분명 여느 때의 예지몽과 같았지만 시점이 달랐다.
평소에는 허공에서 모든 것을 관조하는 느낌이었다면, 오늘 꾼 꿈은 누군가의 눈으로 직접 세상을 보는 느낌이었다.
흔들리는 시선 속에 파란 바다와 회색빛 부둣가, 정박해 있는 여러 대의 갤리온이 보였다. 일렁거리는 파도, 눈부신 햇살 아래서 끝없이 늘어선 배.
웅장한 장면이었지만 어딘가 불쾌함을 동반하는 풍경.
느릿하게 정경을 훑던 중, 저 멀리 정박해 있는 가장 커다란 배에서 시선이 멈췄다.
동요가 느껴졌다. 뭘까, 고민할 새도 없이 ‘내’가 뛰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지고 시야가 흔들렸다. 배가 점점 가까워지고, 인파 너머로 승무원과 승선하는 승객들의 모습이 희끄무레하게 비쳤다.
…앗.
잘게 떨리던 동공이 뭔가를 찾아낸 순간, 또렷하게 초점을 맞췄다. 발걸음이 잠시 주춤하다가, 결심한 듯 더욱 빠른 속도로 발을 박찼다.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어찌나 이를 꽉 깨물었는지 턱이 얼얼해졌다. 그저 한 점만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뛰었다.
그러던 순간.
빠각 하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발밑이 무너졌다. 놀랄 새도 없이 첨벙, 소리와 함께 시야가 깜깜해졌다.
어딘가 빠진 것 같았다. 늪에 빠진 듯 허우적거려 봐도 무거운 몸은 하염없이 밑으로 가라앉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눈이 감기기 전, 눈앞에 까만 무언가가 얼핏 스쳐 지나갔다.
그대로 시야가 암전되었다. ‘아, 끝이다.’ 하는 생각과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
“뭔가… 평소에 꾸던 꿈하고는 너무 달랐어.”
시점도, 분위기도 예지몽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이질적이었다. 그렇다고 무시해버리기에는 꿈의 잔재가 너무 강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불안한 마음을 눈치챈 듯 비에타가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에리얼을 다독였다.
“아무래도 영영 떠나시는 거니까. 불안한 마음이 무의식중에 반영된 게 아닐까요.”
“그러면 다행인데….”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아이고, 눈 밑 침침하신 걸 보니 꿈 때문에 제대로 못 주무셨나 보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안심하라 이르며 비에타가 쉴 새 없이 말을 걸어왔다. 여객선은 처음이에요, 들어갈 때 티켓만 보여주면 될까요, 간식을 좀 더 챙겨올 걸 그랬나 봐요 등등, 혼잣말 속에서 딴생각하지 말라는 은근한 배려가 느껴져 에리얼도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얼마 걷지 않아 항구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짐꾼들이 눈짓으로 인사를 건넨 뒤 부두 쪽으로 바삐 움직였다.
“저게 우리가 타고 갈 배인가 봐요.”
짐꾼들이 이동하는 곳에 커다란 배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로열 매너티. 이름이 적혀 있는 부분이 금으로 반짝거렸다. 호화 여객선이라는 걸 입증하듯 멀리서 봐도 무척 크고 호사스럽게 느껴지는 배였다. 비에타는 폴짝거리며 에리얼의 손을 붙잡았다.
“출발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바로 승선할까요?”
흥겹게 비에타가 조잘거렸다. 그럴까, 대답하려던 에리얼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미련이 뚝뚝 흘러넘쳤다.
배에 타면 돌이킬 수 없어진다.
다시는 남부에 올 일은 없겠지. 백작님과의 인연도… 정말 끝나는 거고.
…나를 놔주려는 걸까.
백작님은, 정말 내가 떠나도 괜찮은 걸까.
호기롭게 저택을 떠나왔지만 자신을 찾는 기색이 전혀 없어서 내심 서운한 마음이 가득했다. 어쩌면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고, 그가 자신에게 정이 남아 있을 거라고 착각했나 보다.
왜 이렇게 구질구질한지. 스스로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왜 이제 와서 망설이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후,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회색 눈동자에 단념의 빛이 스쳤다.
“어차피 할 것도 없으니까 빨리 타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에타가 품 안에서 티켓을 꺼냈다. 금박이 입혀진 최상급 선실 티켓이 팔랑거리며 바람에 나부꼈다.
* * *
쾅!
때려 부술 듯 집무실 문을 박차며 베르트발드가 청사를 빠져나왔다. 차갑게 굳은 얼굴, 뚜벅거리는 걸음마다 한기가 솟아올랐다.
“진작 보고했어야지, 30분 후면 떠날 배를 지금 와서 알아내면 어쩌라는 건가.”
쏘아붙이듯 말하자 뒤따라오던 바이온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 저번에 시찰하셨던 상선 때문에 선박 리스트가 꼬여서 그만…”
“됐고, 배 이름이 뭐라고?”
“로열 매너티호입니다.”
로열 매너티.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옆으로 세우고서 기억을 더듬었다.
남대륙에서 북부까지 항해는 초호화 여객선. 얀셀가가 최대 주주로 있는 세퍼에이드 소속 포트 아르젠타스 해운의 대표 여객선이었다.
이름과 소속, 특징까지 떠올린 베르트발드는 배가 있을 만한 곳을 서둘러 계산했다. 호화 여객선이라는 특징상 아마 선체가 큰 만큼 여유 공간이 넉넉한 북쪽 부두에 정박해 있을 터였다.
청사를 빠져나와 인파가 득실거리는 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흉흉한 기색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영주의 모습에 바이온과 위병들 모두 바짝 긴장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훤칠한 사내들의 등장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호기심 가득한 시선들이 베르트발드의 얼굴에 닿은 순간, 좌판 위를 떠돌아다니던 소음이 허공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얼굴의 미남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모습은 그 자체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연스레 인파가 갈라지고, 베르트발드는 뛰듯이 걸어 시장을 빠져나왔다.
북쪽 부두로 고개를 돌리자 유달리 큰 배 한 척이 시야에 들어왔다. 베르트발드는 가늘게 눈을 뜨고 선미에 붙은 배의 이름을 확인했다.
“…로열 매너티.”
계단이 붙어 있는 걸 보니 이미 승선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에리얼은 이미 탔을까, 아니면 저 앞에 인파 속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까.
어느 쪽이든 정말로….
걸음을 멈췄다. 속이 타는 느낌에 괜스레 목 언저리를 슥 문질렀다.
…정말로 떠나려는 걸까.
나를. 내 곁을.
상실감인지 배신감인지 알 수 없는 불분명한 감정이 울컥 목구멍으로 치솟아 올랐다. 베르트발드는 열 오른 눈가를 손으로 가린 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내버려 두려고 했다. 너무 화나서 어디 좋을 대로 해보라는 심정이었다.
북부로 간다고?
마음대로 해보든가. 그래 봤자 엉엉 울면서 후회할 사람은 에리얼이었으니까.
여태껏 휘둘려 온 만큼 자신도 에리얼을 휘둘러보고 싶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계속 기다렸다가 ‘이혼하자는 얘기를 괜히 꺼냈구나.’ 하고 후회했을 때쯤 공작성으로 돌아오라는 편지 한 통을 딱 보내면, 바보 같은 에리얼은 ‘역시 나를 사랑해주는 건 이 남자뿐이었어.’ 하고 후회하면서 제 품에 안길 것이다.
기다려야 했다. 딱, 에리얼이 후회할 때까지만. 관계의 역전이 이뤄져야 다시는 이혼이니 뭐니 헛소리를 안 꺼낼 테니까.
다시 돌아온다고 하면 북부로 가서 데리고 오든지, 다시 파하르로 오길 기다리든지 하면 그뿐이었는데.
…못 기다리는 건 자신이었다.
내 망아지가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는 곳으로 가버린다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