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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79화 (79/145)

79화

어쨌든 마님이 소영주라니 북부에 가더라도 배곯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님만 보내기에는 좀 꺼림칙했는데 잘된 거라며 속으로 격려했다.

이미 가기로 결정한 이상 우울해할 필요는 없었다. 비에타는 즐거운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북부는 하늘에서 하얀 얼음 조각이 떨어진다고 했지. 보름 정도 밤 대신 낮만 계속된다고도 들었고. 설화에서만 나오던 그 커다란 산, 나흐트필도 구경할 수 있겠구나.

구경할 생각에 신나던 마음도 금세 자리를 비우고 가장 큰 아쉬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비에타는 언덕 아래 항구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다른 건 괜찮은데 파하르의 바다를 못 보는 게 좀 아쉽네요. 마님께 수영도 가르쳐드리고 싶었는데….”

“어, 나 수영할 줄 아는데?”

“네?”

“숲에서 자주 놀았으니까. 더러워지면 냇가에서 씻고 들어갔거든. 아버지한테 걸리면 혼나잖아.”

역시, 나약하게 생겨서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데 의외로 잔재주가 많은 마님이었다. 에리얼은 돌멩이를 손안에서 잘그락거리며 씨익 웃었다.

“수영 실력은 그웬보다 내가 훨씬 뛰어나거든. 내가 비에타보다 잘할지도 몰라.”

그 말에 항상 겸손하기만 하던 비에타가 어쩐 일로 눈을 시퍼렇게 치켜들더니 ‘네에?!’ 하며 호통을 쳤다.

“허, 마님. 남부 사람을 뭘로 보시고! 파하르에 살면서 수영 못하면 사람 대접 못 받아요. 게다가 전 그랑파하르 출신이라고요!”

“그, 그래?”

“그랑파하르나 여기 라흐주처럼 해변이 인접한 마을은 걸음마보다 수영을 먼저 배우는 아이들이 태반이에요. 3살에 미역 따기 못 하면 내쫓긴다니까요.”

“우와….”

‘아무튼 제 별명이 날치라고요, 날치!’라고 외치며 비에타가 가슴을 내밀고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그러다 문득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수영하니까 좀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는데. 아니, 그냥 소문일지도 모르지만….”

“무슨 소문?”

비에타는 뺨을 긁으며 말해도 되는 건가 고민하다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제가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여기 사람들은 수영 못 하면 사람 대접 못 받는다고. 그런데 저택에… 수영 못 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누군데?”

에리얼의 물음에, 비에타는 잠시 모호한 얼굴로 웃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 * *

끼루룩, 갈매기 소리가 선상 위를 떠돌았다.

베르트발드는 미간을 찡그린 채 돛대 위로 시선을 향했다. 펄럭거리는 돛 위로 갈매기 떼가 시끄럽게 꽥꽥거리고 있었다. 유달리 커다란 배에 위압된 건지 갈매기들의 날갯짓이 평소보다 요란했다.

“보십시오, 백작님. 3층 갑판에 화포문을 많이 달아서 해적들의 침략에도 끄떡없습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전열함 따윈 순식간에 침몰시킬 수 있지요.”

화포를 가리키는 설계자의 눈이 자부심으로 빛났다.

상단의 주요 범선들을 교체하겠다는 백작의 요청으로 선박 설계의 살아 있는 전설인 트레버 텐위드는 상상도 못 할 고급 목재를 써서 역사상 가장 빠른 배를 만들어냈다. 여기저기서 찬사가 쏟아졌지만, 정작 수주를 요청한 이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좋군.”

“화, 화물칸도 엄청나게 큽니다. 기존의 배와는 차원이 다르죠. 여기 아래쪽을 보시면….”

“아아. 괜찮군.”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베르트발드는 항구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시장 동쪽, 언덕배기에 위치한 하얀 저택. 아마도 저쯤일까.

“백작님.”

멍하니 있던 상관이 거슬렸던 건지 바이온이 나서서 베르트발드를 슬쩍 밀어냈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제가 대신 설명 들을 테니 먼저 내려가십시오.”

“괜찮… 아니, 그래. 부탁하지.”

“굳이 무리해서 배에 오르실 필요는 없었는데 말입니다.”

“무리한 건 아니야.”

베르트발드가 쓰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먼저 내려갈 테니 마무리되는 대로 내려오게. 밀수품 제재안도 오늘 안에 확인해야 하니까 서둘러.”

“알겠습니다.”

보좌들을 뒤로하고 배에서 내려온 베르트발드가 바닷가에서 멀찍이 물러나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고민과 지금 이 장소, 어째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정말이지.”

에리얼이 집을 나간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다.

남부야 제 손바닥 안이니까 어디에 숨었는지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저 하얀 저택.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저 저택.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저곳에 에리얼이 숨어 있다.

하지만 무작정 쳐들어 갈 수는 없었다. 소공작까지 끌어들인 걸 보면 진작부터 이혼할 생각이었다는 말인데… 대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왜 이혼하자고 하는 거냐, 뭐가 서운했냐, 당장 잡아와 따져 묻고 싶었지만 베르트발드의 내면이 그를 거부했다.

이혼하자니.

어떻게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베르트발드가 뭘 내팽개치고 남부에 내려온 건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이런 천치 같은 선택을 한 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하기도 싫었다.

생각해보면 늘 애달팠던 건 베르트발드 혼자였다. 늘 안달 나고, 닿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에리얼이 마지못해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에리얼은 몰라도 너무 모른다. 좋다고 쩔쩔매니 베르트발드를 길가의 돌멩이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투정 부리듯이 이혼을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거겠지.

아무리 화가 난들 꺼내도 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자신이 에리얼에게 목매고 있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천대받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최소한 선은 지켜야 할 게 아닌가.

뭐 때문에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화가 난다면 화를 낼 것이지, 감히 이혼을 운운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 버릇을 고쳐놓지 않으면 수틀릴 때마다 이혼 운운하면서 제 감정을 쥐락펴락해 댈 게 뻔했다.

타인에게 휘둘리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베르트발드에게 현 상황은 불난 집에 기름이 아닌 용암을 퍼부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를 인내하는 건 괜찮았지만 이제껏 쌓아온 노력을 이혼이라는 말로 한데 뭉쳐 휘두르려 하는 에리얼에게, 솔직히 실망했다.

그래.

갈 테면 가라지. 한번 가보라지.

가서 후회해라.

나 같은 남자가 세상천지에 또 있나 한번 찾아보라고. 그제야 제가 뭘 잘못한 건지 알겠지.

엉엉 울면서 돌아와도 바로 안 받아줄 테니까 실컷 후회해보라고, 에리얼 얀셀.

“백작님.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바이온이 손가락으로 미간을 가리키며 다가왔다. 베르트발드는 잔뜩 찌푸린 미간을 검지로 슬슬 문지르며 어깨를 으쓱였다.

“별일 아니니까 괜찮아.”

잠시 망설이던 바이온이 내내 속에 묵혀두었던 질문을 꺼냈다.

“괜히 고집부리지 마시고 지금 가서 모셔오는 게 어떨까요.”

“됐어.”

“아니, 적어도 왜 이혼하자고 했는지 이유는 여쭤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안 궁금해.”

“그냥 싫어서 이러시는 건 아닐 것 같은데. 선물도 놓고 가셨다면서요.”

“…하, 선물.”

떠올리니 또 열이 뻗쳤다.

그 빌어먹을 하얀 스웨터. 작별 선물이라고 놓고 간 게 하필이면 그딴 거라고.

무슨…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심란할 때에는 괜히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드는 법 아니겠습니까. 백작님께서 확신을 주셨다면 괜찮았을 텐데요.”

“확신?”

이미 차고 넘치게 줬는데 확신은 무슨 확신. 치켜뜬 눈으로 사납게 노려보자 바이온이 머쓱한 듯 목덜미를 쓸었다.

“아니, 물론 백작님께서 억울하신 마음도 이해는 갑니다만 부인께서 원체.”

“바이온. 말을 꺼내려거든 단어를 잘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 자네 말대로 지금 심기가 대단히 불편하거든.”

바이온은 표정을 굳힌 채 조심스러운 눈초리로 베르트발드를 살폈다.

섬뜩하리만치 잘생긴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만, 잘생긴 얼굴이 늘 보기 좋은 건 아니었다. 미소가 떠올라 있을 때에는 온화한 느낌을 주지만 저렇게 무표정할 경우에는 사람 같지 않아서 되레 소름이 끼치니까.

주눅 들지 않으려 애써 속을 다독이며 바이온은 다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는 여러모로 상처가 깊은 분 아니십니까. 신체적인 결함도 그렇고 가정환경도 그렇고… 백작님처럼 외모가 출중하지도 않으시고, 지략이 뛰어나거나 예술에 조예가 깊지도 않으시지요. 화술도 서투시고 세상 물정도 좀 어두운 편 아니십니까. 그러니.”

말을 이으려던 순간, 눈매를 찡그린 채 자신을 노려보는 주군과 시선이 마주쳤다.

바이온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에리얼이 예쁘지도 않고 머리도 나쁘고 예술도 모르는 여자였으면 내가 결혼한다고 이 삽질을 했을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보다 괜찮은 여자가 있었으면 진작에 갈아탔지 굳이 아이기스 공작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러고 살까. 자네, 멍하니 있으니까 내가 우습나.”

“…아니, 아닙니다.”

“안 그래도 기분 안 좋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마차나 불러오게.”

일축하는 어조에 한기가 서려 있었다. 괜한 소리 하지 말고 명령대로 마차나 부를까, 고민하던 바이온은 그냥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백작님.”

“왜 또.”

“어쨌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부인께서는 백작님보다 훨씬 자존감이 낮은 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백작님이 싫어서 이혼하자고 하신 게 아니라…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그래서 헤어지려고 하시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차분히 그의 말을 경청하던 베르트발드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아니, 하고 말문을 뗐다.

“이유야 뭐든 그걸로 화난 게 아니니 상관없어. 단지….”

베르트발드 또한 에리얼 혼자 온갖 망상을 하다가 뛰쳐나갔을 거라 짐작했다. 누가 말만 하면 흠칫하면서 눈치부터 살피는 여자였으니…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없어서 이 사달이 난 거겠지.

짠하고 안쓰러웠다. 하지만 짠한 건 짠한 거고, 화나는 건 화나는 거다. 함부로 이혼을 거론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됐고,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나 알아보게. 소공작과 함께라면 분명 북부로 움직이겠지.”

“배편을 찾아보는 거야 쉽습니다만… 떠날 때까지 기다리시려고요?”

베르트발드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느릿하게 턱을 쓸었다.

당장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과 어디 한번 끝까지 가 보자는, 좋을 대로 해보라는 호승심이 서로 충돌했다.

어쩌면 좋을까. 장갑 낀 손을 쥐락펴락하며 어떤 감정을 선택해야 하는지 결론을 내렸다.

“일단 알아봐. 그쪽 움직임을 파악한 다음에 움직여도 괜찮을 테니까.

갈 테면 가 보든지.

떠나면 후회하게 될 사람은 에리얼이 될 테니까. 속으로 다짐하며 베르트발드는 감정에 대한 유예 기간을 연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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