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에바를 올려다보던 에리얼이 작게 웃음을 띠고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왔어요?”
“아, 가주님께 차를 내드리려다가 마님께서 함께 가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오랜만에 뵙는 거잖아요.”
그래요, 하고 선뜻 대답하려고 한 순간. 아까의 쌀쌀맞은 태도가 떠올라 망설여졌다.
어쩔까.
그래도 같이 차 마시고 싶은데. 괜히 갔다가 싫은 내색을 보이면 어쩌지.
…아니, 아니야. 괜찮을 거야. 굳이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 없어.
잠시 고민하던 에리얼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짚었다.
가주의 귀환에 저택 전체가 활기를 띠었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용인들을 지나쳐 에바가 손수 티 세트를 들고 앞장섰다.
그렇게 둘이서 서재 앞에 다다랐을 때쯤, 에리얼이 지팡이를 옆구리에 낀 채 에바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내가 들고 갈게요, 아뇨 불안하니까 제가, 옥신각신하던 에바는 결국 주인 마님의 고집을 못 이기고 쟁반을 넘겨주었다.
에리얼은 지팡이를 옆구리에 낀 채 공손한 손길로 쟁반을 받아들었다. 그다음, 목을 가다듬고서 최대한 상냥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백작님, 에리얼이에요.”
대꾸가 없다.
백작니이임 하고 다시 한번 불러봐도 여전히 답이 없어 그냥 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낯선 이질감이 코끝을 스쳤다. 늘 오래 묵은 책 냄새로 꽉 차 있던 서재였는데, 책 내음이 아닌 청량한 바다 냄새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에리얼은 고개를 옆으로 숙인 채 그를 향해 시선을 좇았다. 책상에도 없고, 책장 앞에도 없고. 시선을 주욱 옆으로 옮겼다. 그렇게 벽을 훑다가 활짝 열린 창가 앞,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베르트발드를 발견해냈다.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바람결에 핏빛 머리카락이 한들한들 흐트러졌다. 실루엣만 드러난 옆모습, 그 또렷한 선에 주책없이 가슴이 콩닥거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분명 수도에 있을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의식되는 거지.
“저기, 백작님. 차 한잔하시겠어요? 에바가 새로 블렌딩한 차인데 향기가 엄청 좋아요.”
뒤늦게 에리얼이 들어선 걸 눈치챈 베르트발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리도록 푸른 그의 망막에 티 세트를 들고 있는 에리얼이 담겼다.
조금 야위었지만 수도에 있을 때보다 훨씬 혈색이 좋아졌다. 잘 관리되어 매끄러운 머릿결과 분홍빛이 도는 손톱을 보니 과연 당부한 대로 레오와 에바가 혼신을 다해 주인 마님을 보살핀 모양이었다.
“제게 주십시오.”
베르트발드는 재빨리 일어나 쟁반을 빼앗아 들고 에리얼을 소파에 앉혔다.
쪼르르, 차를 따르자 풀꽃 향기가 테이블 위로 물씬 피어올랐다. 초콜릿 파이와 쿠키가 담긴 접시를 에리얼 앞에 내려놓으며 드십시오,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었다.
어색한 공기가 서로의 틈을 배회했다. 베르트발드는 에리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애꿎은 찻잔만 달그락거렸다.
대체 뭐라고 운을 떼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만나자마자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정작 에리얼을 마주하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덥석 끌어안고서 보이는 곳마다 전부 입 맞추고 싶었다. 끌어안고 풀밭 위를 뒹굴뒹굴 구르고 싶었다.
빌어먹을. 움찔거리는 팔다리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미쳤나.
어디 모자란 팔푼이도 아니고, 그냥 보기만 했는데도 왜 이렇게 좋지.
늘 차분하고 우아한 태도를 고수하는 자신답지 않았다. 화가 났다.
꼴랑 한 달 떨어져 있었다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다니. 대체 어디까지 주접을 떨 수 있을까 궁금할 지경이었다.
다정해지고 싶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투가 되었다. 그러고도 할 말을 찾지 못해 이렇게 버벅거리고 있다.
아, 정말이지….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침묵 끝에 내뱉은 말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에리얼은 활짝 핀 얼굴로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뗐다.
“그냥, 음. 매일 똑같았어요.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제때 식사하고… 하녀들 일도 조금 돕고, 아침저녁으로 비에타랑 같이 해변 산책도 나가고요. 아, 맞다!”
에리얼이 창가로 다가가 해변가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제대로 보이지 않을 텐데도, 아래를 향한 눈이 반짝거리며 빛을 냈다.
“요즘 밤이 되면 해변이 반짝반짝해진대요. 무슨 살아 있는 생물이 잔뜩 밀려온다고 하던데, 그게 밤이 되면 파란색으로 엄청 예쁘게 빛난대요. 저도 궁금해서 따라 나가 봤는데 제 눈에는 역시 안 보이더라고요.”
“혹시 야광충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렇습니다. 이 시기에만 볼 수 있지요. 꽤 진기한 풍경입니다.”
“백작님도 아시는구나. 정말 파하르의 바다는 신기한 게 많은 것 같아요.”
뒤돌아보며 에리얼이 싱긋 미소를 띠었다.
불어온 바람에 흑발이 부드러이 나부꼈다.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더욱 진한 미소를 머금는 에리얼은… 창가의 풍경과 어울려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림 같았다.
겨울보다 여름을 닮은 에리얼은 시리도록 맑고 선량한 아름다움으로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역시, 에리얼은 차가운 북부의 땅보다 찬란한 남부의 햇살이 어울리는 여자였다.
베르트발드는 입매를 끌어올리며 다정하게 물었다.
“아무래도 북부의 바다와는 다를 테지요.”
“맞아요. 북부는 엄청 차갑고, 깊고….”
훨씬 더 새카맣다고 하고, 좀 무섭고, 곰도 있고 범고래도 있고… 끝없이 이어지는 말에 베르트발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남부 바다는 어떤 느낌입니까?”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에 에리얼이 손길을 멈칫했다.
남부 바다는 어떻냐고?
“보이지는 않아서 모르겠지만… 소리가 달라요.”
…이거… 혹시 그 꿈인가?
꿈의 재래를 실감하니 답지 않게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동요를 삼키며 대꾸하자 베르트발드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떻게 다릅니까?”
“북부 바다는 자기주장이 무척 강한데, 여기 바다는 상냥한 느낌이에요.”
붉은 인영이 에리얼을 따라 창가로 눈길을 돌렸다. 이어진 말 속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북부에 비하면 남부 바다는 상냥하겠지요. 하지만 태풍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섭게 돌변하곤 합니다. 저는 그런 이중적인 면도 마음에 듭니다만 부인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군요.”
별것 아니라는 듯 평온한 목소리였지만 남부에 대한 자부심이 얼핏 느껴졌다.
북부 사람들이 자연의 파수꾼으로서 자긍심을 가지듯, 남부 사람들 또한 바다의 개척자라는 사실에 명예를 느꼈다. 의외의 일면을 엿본 듯싶어 에리얼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보이지 않는 안쪽에 장미꽃이 핀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 스친 자리의 공기가 한 겹 한 겹 모여 꽃을 이루었다. 그게 너무 간질간질해서….
“아뇨, 저도… 마음에 들어요.”
아. 어쩌지.
이 다음, 그가 할 말을 알고 있다.
예지몽으로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두근거릴 줄이야.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그는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내뱉을 것이다.
“그런 이중적인 면이 부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요하지만, 때로 격정적인.”
…격정적인.
저 좋을 대로 해석한 에리얼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동시에 요동치던 심장이 더욱 박차를 가해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다.
예지몽이 틀린 게 아니었어.
이건. 이건….
드레스 자락을 붙든 손이 하얗게 질렸다. 홉뜬 눈으로 멍하니 아래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감았다.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꼴깍 침을 삼켰다.
아아. 어쩌면 좋지.
다시 눈을 떴다. 회색 세계 속에 붉은 인영이 홀로 색채를 발하며 제 앞에 앉아 있었다.
창가로부터 불어온 바람에 핏빛 머리카락이 한들거렸다. 쭉 펴진 어깨, 근육진 굴곡이 드러나는 상체가 은은하게 남성미를 과시하고 있었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옆얼굴에서 속눈썹이 느릿하게 내려갔다 올라가는 모습은 실체를 보지 않았음에도 그 자체로 그의 우아한 모습을 짐작케 했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기분 좋은 듯 무릎 위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살짝 솟아오른 목울대가 얕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은 조금 낯부끄러우면서도 왠지 모를 간질간질한 느낌을 주었다.
넓고 판판한 가슴, 날카롭게 딱 떨어지는 턱선,
눈 닿는 곳마다 멋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손을 들어 소매를 정리하는 그 모습마저 너무나 멋져 보였다.
원래부터 이랬던가. 아니면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건가.
둘 다 아니었다. 에리얼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왔으니만큼 자신이 동요하는 이유를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좋아서….
사랑스러워서.
나, 이 사람을 사랑하는 거구나.
인식한 순간 한탄이 새어 나왔다.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기분에 숨이 가빠왔다.
누가 그랬던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세상이 아름답고 설레게 느껴진다더니. 스쳐 가는 모든 것에 반짝반짝 빛이 난다더니!
전부 거짓말이었다. 서로 좋아한다면 그런 기분이 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런 외사랑은 행복이고 뭐고 없이 그저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 뿐이었다.
훌훌 발가벗겨져 시궁창에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끔찍했다.
이래서 꿈을 꾼 거야. 이런 감정을… 자각하게 만들어서.
“부인?”
파들거리는 어깨를 붙잡고 베르트발드가 걱정스레 얼굴을 가까이 댔다. 흠칫하며 뒤로 물러서자 미간을 좁힌 채 그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왜… 갑자기. 혹시 또 몸이 안 좋으신 겁니까.”
“아, 아뇨. 그… 아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데 왜 웁니까?”
그제야 뺨이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턱을 스쳐 에리얼의 뺨을 문질렀다.
“상태가 괜찮아졌다고 하더니… 아니었군요.”
씁쓸한 목소리에 에리얼이 움찔하며 목을 움츠렸다.
또 나한테 질린 건 아니겠지…?
평소의 에리얼이었다면 말 속에 담긴 걱정을 알아챘을 테지만 지금은 감정을 추스리기에도 벅찬 상태였다. 베르트발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에리얼을 번쩍 안아 들었다.
“배, 백작님, 놔 주세요…!”
“방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걸어갈 수 있어요! 저 정말, 정말 괜찮으니까 놔 주세요…!”
끕끕거리며 말을 잇는 얼굴이 너무 절박해서 베르트발드는 어쩌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그녀의 뜻에 따랐다.
“가끔 눈을 너무 오래 뜨고 있으면… 이래요. 걱정 마세요.”
지팡이를 주워 들은 에리얼이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슥 닦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