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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74화 (74/145)

74화

웅성거림이 사라지고 차가운 침묵이 빈자리를 대신했다.

벌떡 일어나 그를 쳐다보던 포엔 후작이 무슨 소리냐 반박하려던 찰나, 베르트발드가 먼저 손을 들어 올렸다.

“집정관의 무게를 감당키에는 아직 연륜도 경험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숙고하여 내린 결론이라는 점, 부디 참작하시어 본 집정관의 변덕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미간을 좁힌 채 진중한 어조로 한 자 한 자를 읊었다. 그다음, 고개를 돌려 두 집정관에게 난처한 미소를 전했다.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포엔 후작과 발케스트 백작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쩌겠는가. 여태까지 스스로 집정관 직을 내려놓은 이는 없었지만 그가 최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법도 없었다.

미리 의논했다면 말리기라도 했을 것을, 원로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저런 발언을 했으니 두 사람으로서도 철회할 방도가 없었다.

수긍하는 눈빛에 베르트발드가 입매를 당겨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차기 집정관에 대한 건은 다른 두 분께 맡기겠습니다. 남은 임기 동안 최선을 다해 집무에 여력을 쏟을 테니 모쪼록 제 결단을 응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베르트발드는 꾸벅 허리를 숙인 뒤 긴 다리를 뻗어 정적에 휩싸인 내부를 빠져나왔다. 복도로 몸을 튼 순간. 그제야 왁자한 소음이 회의장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바이온이 뒤늦게 그를 따랐다. 얀셀공, 집정관, 파하르 백, 그를 부르는 수많은 호칭을 뒤로하고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인물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앞을 막아섰다. 베르트발드의 수석 법무관, 펠만이었다.

“지, 집정관님! 집정관님!”

허겁지겁 달려온 펠만이 몸을 굽힌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급하게 온 건지 안경이 미끄러져 코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니, 무슨, 왜 갑자기 사퇴를!”

“놀랐나.”

“당연하죠! 이게 무슨…! 날벼락…! 청천벽력…!”

“자네가 이렇게까지 내 사퇴를 아쉬워할 줄이야. 대단히 감동했다네.”

“장난하는 거 아닙니다! 세상에 제 손으로 집정관을 관두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이렇게 아까운 자리를, 하물며 집정관님은 그렇게 젊으신데!”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니 썩기 전에 먼저 흘러가주는 게 도리에 맞지 않겠나.”

고작 2년밖에 안 지난 주제에 썩은 물 운운하는 게 고까웠지만 펠만은 말을 삼키며 못마땅한 눈초리로 반응을 대신했다.

그러자 베르트발드가 시선에 응수하듯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반은 진심일세. 자네도 힘내봐. 차기 후보로 자네를 추천할 예정이거든.”

“…예? 저, 저요?”

베르트발드는 대답 대신 펠만의 옷깃에 달린 법무관 배지를 만지작거리며 미심쩍은 웃음을 흘렸다. 누가 본다면 참 고상하다고 여길 만한 미소였지만 펠만은 또 무슨 꿍꿍이가 있나 싶어 뒷목이 서늘해졌다.

입만 벙긋거리는 펠만을 뒤로하고, 베르트발드와 바이온은 빠른 걸음으로 의회당을 빠져나왔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바이온은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빠르군요.”

“생각보다 길지 않았던가?”

“적어도 세 번은 연임하실 줄 알았습니다.”

바이온 또한 그가 조만간 자리를 내려놓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내려놓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렇게 애써서 얻어낸 자리인 만큼 조금 더 욕심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내쳐버리니 과연 예측불허로는 따라갈 자가 없는 주군이었다.

그러자 베르트발드가 되레 의외라는 듯 눈을 살짝 치켜떴다.

“수단과 목적을 착각하다니 자네답지 않은데.”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바이온을 응시했다.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 핀잔이 섞인 목소리에 미련이나 아쉬움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결혼 날짜 잡자마자 때려치우려고 했는데. 체면 때문에 앉아 있던 거지.”

말 그대로였다. 조건은 집정관에 도달할 것, 그것뿐이었기에 마음 같아서는 집정관 취임식 날 바로 결혼식을 올려버리고 싶었다.

어영부영 일에 쫓기고, 여우 같은 아이기스 공작이 어떻게든 결혼 날짜를 늦추려고 애를 썼기에 결혼식이 늦어졌을 뿐.

“펠만은 좋은 집정관이 되겠지. 혈통 좋고 성실하고 눈치도 빠르고. 투덜거리면서도 할 일은 제때 끝마치니까.”

창틀을 문지르던 손가락이 톡톡 리듬을 탔다. 베르트발드는 싱긋 웃으며 말을 더했다.

“단순한 녀석이라 부려 먹기 딱 좋지. 굳이 집정관 자리 앉을 필요 없이 원로원 파헤칠 때는 펠만을 쓰는 게 낫겠어.”

“…그래서 법무관을 점찍으신 거군요.”

“서로 좋지 않나. 대충 정리해놓고 당분간 에리얼과 함께 남부에서 푹 쉬어야지.”

음흉한 말과 달리 입가에 맺힌 미소는 상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역시, 고분고분하게 자리에서 내려올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의무는 버리되 이득은 취한다’, 베르트발드가 습관처럼 중얼거리던 말을 떠올리고서 바이온은 머쓱한 얼굴로 펠만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 * *

서신을 매단 전서구들이 창공을 날아올랐다.

비둘기의 날갯짓이 수도 곳곳에 닿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얀셀 백작이 집정관을 사임했다는 소식이 수도 곳곳에 퍼졌다.

미친 거 아니냐, 가문에 문제가 생겼나, 건강에 이상이 생겼나 등등 수많은 추측이 오갔지만 정작 당사자가 묵묵부답이니 답이 귀결될 리 없었다. 고민하던 귀족들은 최근 황실과 백작의 사이가 틀어진 것을 떠올렸다.

그 결과 ‘황실의 외압으로 쫓기듯 사퇴한 게 아닌가’로 답이 내려졌고 귀족들은 자못 안쓰러운 듯,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서로 다른 시선으로 베르트발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소문에 사교계가 시끌시끌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베르트발드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빨리 내려가고 싶었는데… 죽겠군.”

펜을 놀리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곁에서 ‘저는 왜….’ 하고 바이온이 앓는 소리로 말을 거들었다.

화병만 한 높이의 서류 더미가 하나, 둘, 셋…… 열둘. 바라만 봐도 한숨이 나오는 양이었다.

전무후무한 집정관의 자진 사퇴 사건은 다행히 별문제 없이 의회에 수리되었다. 하지만 사퇴할 때 사퇴하더라도 벌인 일은 수습하고 가라며 집정관 두 명이 잔소리를 쏟아부었다.

때문에 사퇴 의사를 밝히자마자 펠만에게 집무를 떠넘기고 도망치려던 베르트발드는 사퇴 선언이 무색하게도 내내 의회당에 붙들려 있어야 했다.

물론 주군을 잘못 둔 바이온 또한 호위 역은커녕 그 옆에 붙어 사무 보조 역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보름이 지났을 때 편지가 한 통 날아왔다. 에리얼의 편지였다.

[벌써 가을이 오나 봐요. 밤에는 조금 쌀쌀해졌어요.

스웨터를 완성했는데 언제쯤 입어주실 수 있을까요. 드릴 말씀도 있는데….

빨리 오셨으면 하고 매일 기도하고 있답니다.]

고작 세 줄뿐인 간결한 편지였지만, 베르트발드의 심금을 울리기에는 충분했다.

베르트발드는 조용히 편지를 내려놓으며 법무관들을 전부 소집했다. 물론 그 안에 펠만도 섞여 있었다.

“고백할 게 있어 불렀네.”

베르트발드가 미간을 한껏 찡그린 채 하아, 깊이 한숨을 내쉬고 가슴 부근을 슬슬 문질렀다. 느리게 손을 움직이다가 윗가슴을 꾹 누르며 윽,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마치, 누가 봐도 아픈 사람인 것처럼.

“사실 말하기 싫었지만… 가슴 쪽에 지병이 있네.”

눈을 내리깐 채 음울한 목소리로 화두를 던지자 법무관들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엇, 그럼 혹시 사퇴하시는 이유가 몸이 안 좋으셔서 그런 겁니까?”

“안색이 안 좋으신데, 미리 말씀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괜찮으신 겁니까?”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눈썹이 꿈틀했다. 베르트발드는 쓴웃음을 머금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한 건 아닌데 피로가 지나쳐서 버티기가 힘들군. 빨리 파하르로 내려가서 요양에 전념하려 했건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가슴 쪽에 지병이 있었다.

파하르에서 오매불망 자신을 기다리는 망아지 때문에 가슴 한편이 쿡쿡 쑤셨으니까.

먼 곳을 보는 듯 아련한 시선에 법무관들이 측은한 표정을 떠올렸다. 단지 펠만만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러는 건가 싶어 의구심 섞인 눈빛을 날릴 뿐이었다.

베르트발드는 펠만의 시선을 마주한 채 미간을 추어올렸다.

“하반기 주요 제안서들과 자금집행서 모두 정리를 끝냈으니 나머지는 법무관들이 처리해줬으면 싶은데… 수석 법무관. 괜찮겠나?”

서글픈 목소리로 부탁하자 법무관들의 눈길이 모두 수석 법무관인 펠만에게로 몰려들었다.

‘지병이요? 일 떠넘기고 도망가시려고요?’ 하고 거절하려던 펠만은 안쓰러움이 가득한 법무관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쥐어짜듯 대답을 토했다.

“…그럼요. 괜찮습니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수석 법무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법무관들이 눈을 빛내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검토는 저희가 맡을 테니 지금 당장 자택으로 돌아가시지요.”

“어쩐지 요즘 계속 얼굴이 안 좋으시더니…. 맞습니다. 빨리 쉬십시오.”

베르트발드는 송구한 표정을 떠올린 채 못 이기는 척 집무실을 나왔다. 상황을 살피던 바이온이 주섬주섬 남은 짐을 모두 끌어안고서 뒤를 따랐다.

“편지에 뭐가 적혀 있길래 이렇게 후다닥 일어나십니까.”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오래 보좌해 온 바이온으로서 그의 손끝에 초조함이 묻어나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눈치껏 질문을 던지자 기다렸다는 듯 답변이 날아왔다.

“스웨터를 완성했다고 입어봐 줬으면 좋겠다더군.”

“스웨터요? 남부에서는 입을 일이 없지 않습니까?”

“왜? 추우면 입는 거지. 당장 내려가서 입어봐야 할 것 아닌가.”

아니 남부에 추울 일이 어딨다고… 중얼거리려던 바이온은 주군의 진지한 표정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더운데, 진짜로 스웨터를 입을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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