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결론을 내린 에리얼이 조금 더 또렷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래. 먼저 파하르로 돌아가야지.”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일지는 몰라도 떨어져 있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서로 떨어져 있으면 정이 더욱 돈독해질지도 모른다. 남부에서 요양하다 보면 병도 금방 나아질 테고, 병이 낫는 대로 안주인으로서 인수인계 받을 일들을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었다.
글도 못 쓰고 셈도 약하지만, 레오나 에바가 도와줄 테니 어떻게든 되겠지.
서툴러도 열심히 하는 것만은 자신 있었다. 안주인 업무를 전부 인계받고 납골당 열쇠까지 받으면 정식으로 남부의 귀부인들을 초청하자.
남부 연합의 귀족들은 자신을 잘 모를 테니 어쩌면 맹인이라 해도 큰 차별 없이 자신을 대할지도 모른다.
에리얼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작게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흐린 눈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베르트발드와 파하르에서 재회할 날을 떠올렸다.
백작님이 오시는 대로 납골당 열쇠를 보여주고 싶어.
나도 부인으로서 제 몫을 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알려주고 싶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 각오를 욱여넣고서 천천히 눈꺼풀을 닫았다.
이따 저녁 식사 때 먼저 내려간다고 말해야지.
서운해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기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해일처럼 밀려든 수마에 얕게 부유하던 의식이 어둠 속으로 깊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난 늦은 밤.
잠에서 깬 에리얼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편에게서 파하르로 내려가라는 전언을 받았다.
* * *
백금 브로치 속. 천칭을 든 세이렌이 짙게 내린 어둠을 뚫고 은은하게 반짝였다.
얀셀가의 문장이 그려진 원로원 배지였다. 베르트발드는 배지를 손으로 굴리며 흘깃 창가로 시선을 던졌다.
아직 새벽 어스름이 남은 정원 위로 부유스레한 여명이 지평선을 밝게 비추었다.
아침과 밤, 어중간한 시간의 지평.
밝아오는 하늘만큼 마음도 환해지면 좋으련만 쉽지가 않다. 시선을 거두며 아직 새벽의 흔적이 남은 방을 벗어났다.
행선지는 당연히 에리얼의 방이었다. 요 일주일간 으레 그랬듯 일어나자마자 부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에리얼은 안정제를 먹으면서부터 부쩍 체력이 약해지고 잠이 많아졌다. 부부 관계는 고사하고 일상생활을 이어가기도 힘들어했다. 때문에 베르트발드와 에리얼은 부부 침실의 문을 잠그고 다시 각방 생활로 돌아왔다.
“…….”
잠들어 있는 에리얼은 평화로워 보였다.
손가락으로 뺨을 쓸어내리자 눈썹이 움찔했다. 베르트발드는 고요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다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보드라운 피부가 체향과 함께 입술을 스치고, 익숙한 라벤더 향기가 은은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무슨 꿈을 그렇게 열심히 꾸고 계시나.”
검지로 콕 볼을 찔렀다. 원래도 순한 얼굴인데 잠들어 있으니 더더욱 순해 보였다.
정말,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꿈에서는 눈이 보인다고 했으니까…. 꿈에 내가 나왔으면 좋겠다.
반반한 얼굴을 저 눈으로 봐야 하는데. 그래야 남편 아까운 줄 알 텐데.
“아까운 줄도 모르고 매번 마음고생만 시키고. 밥이라도 제대로 먹으면 걱정을 덜 할 텐데, 하여간….”
입맛이 없는 건지 제대로 먹질 않아서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다. 말수도 적어지고 멍하니 있거나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가 많았다.
그마저도 금세 잠에 곯아떨어져 보기 힘들 때가 대부분이었다.
…파하르로 내려가면 좀 나아질까.
수도 저택은 사용인도 적고 파하르처럼 넓지 않다. 정원을 잘 조성해놓기는 했지만 광대한 정원과 바다와 숲이 인접해 있는 그랑파하르의 본 저택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자연을 좋아하는 에리얼이니 분명 이곳보다 코랄 하우스에서 지내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좋은 환경에서 잘 쉬면 금방 나을 테지. 떨어져 있는 건 아쉽지만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다.
한참 동안 에리얼을 바라보던 베르트발드가 아쉬운 듯 뒷걸음질 치며 방을 나왔다.
오늘은, 에리얼을 파하르로 보내는 날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떠나는 걸 지켜보고 싶었지만 일이 많아서 작별 인사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파하르로 내려가라는 전언도 직접 전할 시간이 없어서 빌헬름을 통해 대신 전했다.
뭐가 이렇게 바쁜 건지, 뭘 위해 사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차라리 이게 나을 테니까.”
잠깐 떨어지는 게 아쉬워서 이렇게 잠든 부인에게 집적거리고 앉아 있는데.
만약 에리얼이 마차에 탄 채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본다면 떠나보낼 자신이 없었다. 그럴 바에는 배웅 따위 없이 담백하게 보내는 게 나을 것이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용인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던 빌헬름이 가주를 보고 재빨리 허리를 세웠다.
“나오셨습니까.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나가시는군요.”
“의회 마지막 날이라 지시할 게 많아서. 바이온은?”
“아까 전 정원에 들어오셨으니 곧 이쪽에 도착하실 겁니다.”
빌헬름이 현관문을 열고 공손한 손길로 까만 가죽 장갑을 건넸다. 베르트발드는 장갑을 받아든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눈을 들어 빌헬름을 응시했다.
“빌헬름.”
“예, 가주님.”
“원로원 장로들에게 붙여뒀던 정보원들, 전부 회수해.”
빌헬름의 눈썹이 꿈틀하며 미간에 깊이 세로줄이 생겼다. 집사로서 빌헬름이 아닌, 사우스빌의 길드장 빌헬름에게 내리는 명령이었다.
“전부 말씀입니까?”
“그래. 그쪽은 이제 더 이상 견제할 필요 없으니까. 황실과 대공가 쪽은 계속 붙여두고…. 당분간은 길드 운영에 집중하지.”
“알겠습니다. 그 밖에 다른 지시 사항은 없으십니까?”
“…어머니께 안부 전해드리게.”
빌헬름이 눈매를 가늘게 뜨고 웃는 듯 마는 듯한 미소를 떠올렸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조만간 수도로 오신다 하더군요. 말씀 전해드리면 무척 기뻐할 겁니다.”
“농담 한번 소름 끼치는군.”
떨떠름한 표정으로 집사를 쳐다본 베르트발드가 성큼 현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때마침 마차와 함께 바이온이 저택에 도착했다.
예를 표하는 바이온에게 손짓을 건넨 뒤, 베르트발드는 빌헬름에게 흘리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 대신 배웅 좀 잘 부탁하네. 하녀들에게 잘 모시라 이르고.”
“예. 걱정 마십시오.”
무뚝뚝한 표정이 사라지고 빌헬름의 얼굴 위로 은근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베르트발드는 실없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픽 웃고서 마차에 올랐다.
팔짱을 낀 채 창가로 시선을 못 박았다. 에리얼, 원로원, 가문, 북부, 수많은 상념이 뒤엉켜 그의 의식을 꽉 채웠다. 일정을 읊는 바이온의 음성이 귓가를 스쳐 허공에 흩어졌다.
의회당에 도착한 이후로도 상념은 계속 이어졌다. 오전 내내 듣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하자 곁에서 보조하던 바이온이 쓴소리를 뱉었다.
“백작님. 오늘따라 넋을 놓고 오신 것 같습니다.”
법무관 회의에 참석 중이던 베르트발드가 바이온에게로 흘깃 시선을 던졌다.
평소처럼 ‘자네 일이나 똑바로 하게’ 따위의 반응을 기대했던 바이온은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베르트발드를 마주하고 입을 다물었다.
“파하르에.”
“예?”
“내 넋, 파하르로 내려가고 있다고. 그냥 나 몰라라 하고 나도 따라갈 걸 그랬나 보군.”
“지… 진심이십니까?”
“일하는 중에 농담하는 거 봤나?”
“…어지간하면 웃어드릴 테지만 오늘은 중요한 날이지 않습니까. 좀 더 집중해주십시오.”
진중한 대꾸였지만 베르트발드는 뭐가 중요하냐는 듯 묘한 웃음을 흘렸다. 듣고 싶지 않다는 제스처에 바이온은 한숨을 흘리며 다시 허리를 세웠다.
회의가 끝나고, 법무관들 모두가 상기된 얼굴로 자리를 옮겼다. 허둥지둥 발길을 서두르는 법무관들의 손에 투표권을 대신하는 검은 공작새의 깃털이 들려 있었다.
바이온과 베르트발드도 느릿하게 법무관들의 뒤를 따랐다. 걸음을 옮길수록 인파가 많아졌다. 그렇게 대회의당에 도착한 순간,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베르트발드에게로 향했다.
“주인공이 왔구먼. 얀셀 공. 연설 준비는 마쳤나?”
푸른 의복을 걸친 초로의 남자, 포엔 후작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베르트발드를 맞이했다.
곁에 서서 주변을 살피고 있던 또 다른 노인도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머리가 벗겨진 노인은 포엔 후작처럼 푸른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노인이 수염을 쓸며 허허, 짧게 웃었다. 집정관이자 장로 중 최연장자인 발케스트 백작이었다.
“뭐 대단한 연설까지 필요한가? 어차피 투표 자체가 형식적인 건데. 새로 집정관 뽑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연임 투표 아니오.”
“허어, 발케스트 공. 귀찮아도 지킬 건 지켜야지요.”
“적당히 쓸 만한 인재도 없고, 어차피 얀셀 공 말고는 집정관 자리에 앉을 만한 인물도 없지. 난 투표 마치는 대로 먼저 갈 테니 나머지는 후작께서 정리해주시구려.”
발케스트 백작이 손을 휘휘 저으며 단상 옆으로 물러나자 포엔 후작이 미간을 치켜올린 채 난처한 듯 웃어 보였다. 베르트발드 또한 뒷짐을 진 채 부드럽게 따라 웃었다.
따랑, 풍경이 울리자 회의장을 메우고 있던 귀족들이 하나둘 자리에 착석했다. 자리마다 법무관들이 들고 있던 검은 공작새 깃털이 놓여 있었다.
집정관이 연임 의사를 밝힐 경우, 원로원 의원들은 깃털로 찬반 의사를 표명한다. 찬성일 경우에는 깃털을 높이 들어 올리고 반대일 경우 깃털을 꺾어 옆에 놔두는 것으로.
그렇게 과반수가 찬성할 시 별다른 절차 없이 집정관 임기가 연장된다.
베르트발드는 옷깃을 가다듬으며 느린 발걸음으로 단상 위에 섰다. 시선이 한데 모이고, 날 선 침묵이 회장을 가득 메웠다.
우아한 손길로 성호를 긋고 입꼬리를 당겨 품위 있는 미소를 떠올렸다. 귀족 특유의 고고하고 위압적인 분위기가 유려한 이목구비와 맞물려 그의 품격을 더욱 드높이고 있었다.
이윽고, 집정관의 나직한 선포가 이어졌다.
“태양보다 밝은 영광을. 연설을 기대하고 계셨던 분들께 무척 송구하오나 오늘은 제국의 기둥이신 의원분들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갑작스레 들려온 마지막이라는 말에 옆에 앉아 있던 집정관들이 눈을 부릅뜨고 베르트발드를 쳐다보았다.
웅성거림이 단상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퍼져 갔다.
베르트발드는 느리게 눈을 깜박인 뒤 한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본 집정관 베르트발드 얀셀은 이 시각 이후로 집정관 직을 사퇴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