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넓은 광장 한가운데, 다섯 명의 천사들이 조각된 커다란 분수가 세차게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분수를 중심으로 마차들이 크게 원을 돌아 제각각 이어진 길을 따라 흩어졌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좌판이 여기저기 늘어서 있고 길을 오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좌판에 시선을 던졌다.
좌판 너머에는 공중제비를 도는 사람, 공으로 저글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좌판에 홀린 사람들의 이목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분수 근처에는 어린아이들이 물을 참방거리며 때 이른 물놀이에 빠져 있었다. 부모와 노인들이 흐뭇한 얼굴로 그 모습들을 지켜보고, 그 곁에는 셔벗과 칩스, 사탕 등의 군것질거리를 파는 상인들이 큰 목소리로 호객을 했다.
얕은 바람 사이로 달콤한 시럽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소음 속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크게 허공을 맴돌았다. 평화롭고 활기찬 풍경이었다.
…평화로워야 하는 풍경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주먹을 꽉 쥐고 말아 물었던 입술에 힘을 뺐다. 에리얼은 깊게 숨을 내쉬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똑같다.
평소와 똑같은 세상이었다.
흰색과 회색의 경계에 서 있는 하늘. 서로 다른 음영으로 형태를 알리는 건물들. 그 앞에 그보다 밝은색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
무채색 시야 속에 유일하게 색이 구분되는 건 사람들의 가슴 한가운데서 동동 울리고 있는 색색의 감정들이다.
보라색, 파란색, 저 사람은 기분이 좋은지 노란색이네. 어라, 빨간색이다. 저 사람은 기분이 엄청 안 좋은가 봐.
익숙한 세상이었다. ‘엄청 활기차네요.’ 하며 즐거워했을 풍경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인파와 분수대, 주르륵 늘어선 건물을 보며 에리얼이 떠올린 감상은 하나뿐이었다.
“사, 사람이 너무… 너무… 많….”
쥐락펴락하던 손을 들어 입가를 감쌌다. 가슴 위쪽이 뻐근하더니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가 않았다.
…무서워.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많이 모여 있어? 다들… 다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또다시 그 2층으로 끌고 가려고? 나, 나랑 비에타를 잡아가려고….
아, 아아아니, 아니야. 그 일은 끝났는데. 납치했던 사람은 다 잡혔어. 끝난 일이야. 황녀에게 직접 벌을 줬잖아.
봐! 여기는 그런 사람 아무도….
아무도….
…저 중에 한 명이라도… 내게 악의가 있다면.
저 사람 들고 있는 거… 칼은 아니지? 그냥, 그냥 빵인 거지? 저거 손수건 맞나? 설마 그, 그때처럼 최면향이 든 손수건은 아니겠지?
…아, 아아아. 모르겠어. 하나도 모르겠어.
속이… 메슥거려서.
어떡하지.
“토할… 것 같아….”
말을 잃은 채 달싹거리던 입술이 이내 긴 탄식을 쏟아냈다. 스쳐 가는 인영 하나하나가 공포로 느껴졌다.
왜 이러는 걸까.
정신이 이상해진 걸까.
눈도 깜박이지 않고 멍하니 앞만 쳐다보았다. 턱이 덜덜 떨리고, 숨이 막혀 꺽꺽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어,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어떻게든….
“부인?”
묘한 기색을 눈치챈 베르트발드가 에리얼을 붙들고 시선을 맞췄다.
“왜 갑자기 이런…? 부인? 부인!”
“괜, 아, 백작님. 아아니…. 괜찮… 괜찮아요. 노, 노놀라서.”
“괜찮기는…! 괜찮은 사람이 이렇게 덜덜 떱니까?”
거리의 정경 대신 붉은 인영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다시 숨이 트이고, 에리얼은 달달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감쌌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그냥… 바, 밖을 보니까… 사람들이 너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사색이 된 얼굴로 베르트발드에게 몸을 기댔다. 헉헉, 숨소리가 지나치게 요란했다.
잔 떨림이 품으로 전해져오고, 베르트발드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에리얼을 토닥였다.
“일단,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동요를 삼키며 베르트발드가 마부에게 저택으로 돌아가라 일렀다. 이윽고 마차 문이 닫혔다.
시야 속에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야 에리얼은 안심하고 그의 품 안에서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 * *
미쳤나 봐.
하다 하다 이제 발작을 다 하네. 세상에. 어쩜 좋아.
자괴감에 질식할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에리얼은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벌써 몇 번이나 울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그 날, 분수대 근처로 놀러 갔던 날. 에리얼은 돌아오는 내내 세상 잃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옷장으로 뛰어 들어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비에타를 비롯한 하녀들이 그녀를 달래봤지만 에리얼은 옷장이 제집인 양 처박혀 나오질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이틀이 흘렀다. 이틀 동안 에리얼을 면밀히 살피던 주치의는 심각한 얼굴로 백작을 찾았다.
그리고, 베르트발드는 예상보다 더 골치 아픈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심리적인 문제?”
“예. 아마도 지금으로서는 그 외에 딱히 문제가 없는 듯 보입니다.”
미간을 좁힌 베르트발드가 주머니에 꽂혀 있던 손을 빼 천천히 턱을 쓸었다.
“지금 와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던 건 사실이지만, 저택에 돌아온 이후로는 여태껏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잖은가.”
싸늘한 음성에 주치의가 장갑을 벗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제 추측일 뿐입니다만 외출하셨던 곳이 하필이면 그… 납치된 곳과 동일한 장소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때의 자극이 지금 터진 거란 말인가?”
주치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낯선 인파들이 무섭다고 하셨지요. 숨이 가빠지고 떨림이 오고…. 불안 장애로 보입니다. 발작까지는 가지 않으셨으니 천만다행입니다만 당분간 외출은 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나을 수 있는 건가.”
“지켜봐야 알겠지요. 안정되면 대부분 나아지긴 하는데, 백작 부인께서는 원래도 그… 몸이 불편하신 만큼… 우울감이 심하시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
“지금으로서는 더 나빠지지 않는 게 우선입니다. 발작이라도 일으켰다간 과호흡으로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안정제를 조제해 두고 갈 테니 꼭 챙겨드리십시오. 약이 떨어질 때 즈음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주치의의 전언은 그게 전부였다. 탁, 문 닫는 소리와 함께 주치의마저 방을 빠져나가고, 혼자 남게 된 베르트발드는 잔뜩 찡그린 미간을 짚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가지가지.”
이제 좀 괜찮아진다 싶었더니 이번에는 불안 장애라니. 어처구니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골치 아픈 표정으로 입 안을 씹다가 휙 고개를 젖혔다. 파란 눈동자에 그보다 더 파란 천장이 들어왔고, 찡그린 미간이 더욱 흠씬 구겨졌다.
대체 왜 이렇게 꼬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방을 어슬렁거리다 참지 못하고 퍽, 스툴을 걷어찼다. 길쭉한 다리에 걷어챈 스툴이 처연한 곡선을 그리며 방구석에 나뒹굴었다.
그걸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 신경질적인 손길로 머리를 홱홱 쓸었다. 백금색 머리카락이 푸스스 흩어져 이마를 간지럽혔다.
그냥 적당히 돌아다니다가 맛있는 것 좀 먹이고, 갖고 싶다는 거 사주고. 잘난 선물 사 들고 와서 화기애애하게 밤을 보내는 게 원래 계획이었는데.
고작 그게 전부였는데, 다른 평민들처럼 평범하게 데이트 한번 해보려 했건만 왜 이 지랄이 났는지 모르겠다.
세상이 제 사랑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 좀 하려고 들면 이리 훼방 놓고, 저리 훼방 놓고.
하긴 태어났을 때부터 꼬여 있었지.
저 미련한 걸 그냥 적당한 집안의 여식으로 태어나게 했으면 좀 좋아. 굳이 공작가의 딸로 태어나게 해서는, 손에 넣는 것도 더럽게 힘들었다.
이러니 교회를 안 가지. 되는 일이 없다.
“여태 삽질한 것만으로도 성 하나는 세웠을 텐데.”
방구석에 쓰러져 있던 스툴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성큼성큼 걸어가 세게 걷어찼다. 빠각, 어딘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제야 이게 뭐 하는 짓거리인가 싶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런 데 분풀이해 봤자 뭐가 달라진다고.
시가라도 있다면 조금 나았을 텐데, 뻑뻑 피워대다가 혹여 에리얼이 기침이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몸을 길게 늘어트렸다. 허리를 띄워 느슨하게 몸을 기댄 채로 천천히 눈꺼풀을 감았다.
“그래. 뭐가 됐든 이제 내 곁에 있으니까, 어디 한번 끝까지 가 보자고.”
어쨌든 원인은 알았으니 고치면 그만인 것을. 장애든 뭐든 약 먹고 푹 쉬면 금방 낫겠지.
혼자 땅 파고 우울해 있지나 않으면 좋겠는데.
감정을 추스르며 에리얼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 앞에는 세 명의 하녀가 쟁반을 든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꾸벅 묵례하는 하녀들의 얼굴 위로 난처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베르트발드는 문고리를 잡은 채 퉁명스레 물었다.
“부인께서는 여전하신가.”
“그게… 예. 여전히 옷장에서 나오지 않고 계십니다.”
하녀가 들고 있는 쟁반으로 흘깃 시선을 떨궜다. 차갑게 식은 수프 옆에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혀 있는 오렌지 주스 잔이 놓여 있었다. 가운데 있는 빵은 녹아서 흐물흐물해진 버터에 흠뻑 젖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영 입맛을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비쩍 곯아서는, 우울할 때 우울하더라도 밥은 제때 챙겨 먹을 것이지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쯤 되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음식들을 새로 내오라 명하고 베르트발드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방문을 열자 드레스 룸 앞에 서 있던 비에타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입술에 검지를 대고 조용히 하라 이르자 비에타가 입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베르트발드는 굳게 잠긴 옷장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부인. 접니다.”
안에서 들려오던 숨소리가 멈췄다. 베르트발드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말을 이었다.
“계속 이렇게 숨어계실 겁니까.”
“…….”
“옷장을 안식처로 삼으시려는 것쯤은 상관없습니다만 식사는 제대로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다 몸 상하겠습니다.”
“…….”
흐으, 들릴 듯 말듯 아주 작은 흐느낌이 귓가를 스쳤다.
울음을 참는 소리. 베르트발드는 길게 숨을 내뱉고 말을 이었다.
“문 열어요.”
“시, 싫….”
“얼굴 보여줘요, 에리얼.”
“…….”
“빨리. 10초 내로 안 열면 부수고 억지로 열 겁니다.”
갈라진 목소리로 앗, 아앗,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짧은 침묵 끝에 끼익, 작은 소리와 함께 옷장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