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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70화 (70/145)

70화

“어풉, 바,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욕조 안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고 있던 에리얼이 한쪽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방금 쿵쿵거리는 소리 들리지 않았어?’ 물음을 던지며 해맑게 비에타를 돌아봤지만 답으로 돌아온 건 촤르르 쏟아지는 물세례였다.

“어머, 어머! 죄송해요 마님! 뭐라고 하셨어요?”

“아, 콜록,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빨리 씻으셔야 해요! 어쩜, 가주님과 함께 응접실에 계시는 줄 알았는데! 계속 주무시고 계셨을 줄이야!”

비에타는 평소의 느긋한 모습은 걷어치우고 누구보다 빠른 손길로 에리얼을 씻기기 시작했다.

후다닥 머리를 감고, 그보다 더 급하게 목욕을 끝내고 허겁지겁 화장대에 앉았다. 어느새 두 명의 하녀가 합세해 치장에 도움을 더했다.

비에타는 항유병들을 가리키며 ‘어떤 오일이 좋으세요?’ 물은 뒤 제멋대로 하나를 골라 머리카락과 손등에 바르기 시작했다. 손이 스친 자리마다 꽃향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시내로 나가신다고 했죠? 어디로 가세요?”

“어… 그 분수대 근처. 상업 거리에서 이것저것 구경 좀 하고, 쇼핑도 좀 하려고.”

“맞다 맞다. 전에 가주님 선물 사고 싶다고 알아봐 달라고 하셨던 가게요. 어디가 괜찮은지 드디어 알아냈어요.”

“정말? 어디?”

“분수대에서 동쪽, 로쉐 스트리트 쪽으로 가시다 보면 나비 모양 간판이 달린 가게가 있대요. 거기에 모험 소설이 많다더라고요.”

“나비 모양 간판….”

“이야기의 날갯짓이라는 가게예요.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서점이라고 하더라고요.”

에리얼이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가장 유명한 서점. 선물을 고르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어떤 걸 선물하면 좋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훌륭한 외모의 소유자인 만큼 멋진 모자나 장갑, 브로치 같은 게 좋지 않을까. 타이나 스카프 같은 것도 괜찮을지도.

하지만 눈으로 보고 고를 수 없는 게 마음에 걸렸다.

때문에 최종적으로 고른 건 책이었다. 재미있는 모험 소설.

아마 그가 보기에 유치하다고 할 법한 선물이겠지만, 그 나직한 저음으로 책을 읽어준다면 듣는 입장에서 무척 행복할 것 같았다. 그도 좋고 에리얼도 좋은 선물이었다.

‘분명 좋아하겠지?’ 기대 반, 긴장 반인 마음으로 에리얼이 살풋 웃음을 머금었다.

치장이 끝난 뒤 에리얼은 장갑과 모자, 지팡이를 챙겨 현관으로 걸어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베르트발드와 단둘이 외출하는 건 처음이었다. 밖에서 남성의 에스코트를 받는 것도, 하물며 그렇게 잘생긴 사람과 함께 다니는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한껏 고양된 기분에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마님.”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 건 빌헬름의 목소리였다. 나이 지긋한 집사는 흠흠, 헛기침을 내뱉고 걱성스레 뒷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늙으니 노파심만 많아져서 말입니다. 꼭 가주님과 함께 다니시고, 으슥한 골목은 다니지 마시고, 누가 음식을 주면 절대 함부로 드시지 마시고….”

낯선 사람은 피하고, 길고양이와 개는 함부로 만지지 말고, 가주님 곁에서 7피트 이상 떨어져 있지 마시고… 등등의 잔소리가 나불나불 이어졌다.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져 에리얼은 주인의 명을 기다리는 멍멍이처럼 얌전히 그의 잔소리를 경청했다.

“잔소리 한번 길기도 하군. 내가 함께 가는데 무슨 걱정인가.”

어느새 다가온 베르트발드가 말을 자르며 에리얼의 허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럼 다녀오지.’ 성의 없는 말과 함께 에리얼을 마차에 앉히고 옆에 딱 붙어 앉았다.

빌헬름의 날카로운 눈매가 걱정과 염려로 추욱 늘어졌다. 베르트발드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닫힌 문 너머로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괜스레 긴장이 밀려와 에리얼은 애꿎은 지팡이만 연신 만지작거렸다.

“부인께서는 참 대단하십니다.”

지그시 에리얼을 지켜보던 베르트발드가 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요? 제가 뭘요?”

“오랜 시간 빌헬름을 지켜봐 왔지만, 이렇게 남을 걱정하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어… 그런가요? 빌헬름 엄청 상냥한데요. 저 말고도 매일 사용인들 걱정하고, 백작님도 걱정하잖아요.”

베르트발드는 대답을 속으로 삼키며 살짝 눈시울을 휘어 웃었다.

혈연 외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에게 상냥하다니. 빌헬름이 들으면 코웃음 칠 소리였다.

웃으며 에리얼의 귓가로 손을 뻗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풀잎 내음 같은 싱그러운 향기가 물씬 풍겼다.

하얀색과 푸른색이 섞인 스프라이트 무늬 드레스 위에 흰 레이스가 섞인 청색 공단 리본이 달려 있었다. 한쪽으로 길게 땋아 내린 머리 끝에는 드레스에 장식된 것과 비슷한 푸른 리본이 안개꽃과 함께 곱게 장식되어 있었다.

수줍게 손가락을 꼼질거리는 에리얼에게서 초여름의 향취가 물씬 묻어났다. 조금 이른 계절감이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신비로움과 맞물려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비에타라고 했던가. 그저 그런 하녀인 줄 알았는데 센스가 꽤 좋군.

부드럽게 웃으며 에리얼의 머리카락을 슬슬 쓸었다. 거적때기를 입혀놔도 예쁘다고 할 베르트발드였지만 오늘은 특히나 마음에 들었다.

“오래 기다리신 거 아니에요?”

의외의 질문에 베르트발드가 힐끗 에리얼을 살폈다. 에리얼은 지팡이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슬그머니 목을 움츠렸다.

“저 좀 깨워주시지 그랬어요. 어쩜 이 시간까지… 세상모르고 잤네요.”

“음. 새벽까지 너무 괴롭힌 것 같아서 도저히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밤을 떠올린 순간 에리얼의 뺨 위로 확 열기가 끼쳤다. 달아오른 뺨을 감추기 위해 에리얼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어, 아, 그. 그렇죠. 좀 늦게 자긴 했죠…. 그런데 백작님은 저보다 더 못 주무신 거 아니에요? 저는 중간에 잠들었지만 백작님은 계속 깨어 있으셨던 것 같은데. 피곤하실 텐데….”

“전혀요. 저야 부인께 피로를 쏟아내고 있으니 괜찮지만 부인께서는 그만큼 체력이 약해지신 것 같아 걱정입니다.”

내게 피로를 쏟아내고 있다고?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든 순간 커다란 손이 슬금슬금 허리를 끌어당겼다. 몸이 밀착하자 허리를 붙들고 있던 손이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긋한 손길로 허리와 갈빗대, 치골 부근을 어루만지며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바짝 입술을 붙였다.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기운이 넘쳐서 곤란할 지경입니다. 아마… 여기쯤에.”

베르트발드가 검지를 들어 에리얼의 가슴 위를 쿡 찔렀다.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온 손가락이 가슴과 명치를 타고 내려와 그녀의 아랫배 쪽에서 멈춰 섰다.

“잔뜩 쏟아내면. 푹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처럼 몸이 가벼워집니다.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납작한 아랫배 부근을 슬슬 배회했다. 베르트발드는 갸름해진 눈으로 손가락이 스친 자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너무 좋아서. 중독적이라서 곤란하지요. 대체 어떻게 참고 살았는지… 사실 오늘 새벽에 더 하고 싶은 걸 참느라 고생했습니다.”

“…….”

“그런데 우스운 건, 비워낸 이상으로 욕정이 차서 곤란하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욕구가 쌓이면 부인께서도 감당키 벅차실 텐데. 대체 어디에 풀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하아, 깊은 한숨이 말미를 장식했다. 베르트발드는 고개를 떨군 채 흘깃 눈만 올려 에리얼의 안색을 살폈다.

예상대로, 그의 부인은 난처한 얼굴로 어떤 말을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이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리얼은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눈썹을 찡그린 채 심각한 표정으로 ‘남자들은 원래 다 이런 건가? 백작님이 이상한 건 아니겠지?’ 하기도 하고.

미간을 추어올린 채 입꼬리를 축 늘어뜨린 표정으로 ‘어디에 풀다니, 혹시 다른 여자… 정부라도 들인다면.’ 하고 고민하다가.

입을 일자로 다문 결연한 표정으로 ‘아니, 내가 어떻게든 해야 돼.’ 결심에 이르기까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표정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급변하는 표정들을 쳐다보던 베르트발드가 나직하게 쐐기를 박았다.

“하기야… 꼭 몸을 섞을 필요까지는 없지요. 지금 같아서는 가벼운 입맞춤 정도로도 금방 해소될 것 같습니다.”

“엇, 그, 그 정도로도 괜찮은 건가요…!”

“제가 겉보기와 다르게 심약한 편입니다. 마음이 허해서 그런 것뿐이니 그 정도로 충분할 테지요.”

휴우, 다시 한숨으로 말을 매듭짓고서 에리얼을 살폈다.

역시, 안도하는 듯, 안쓰러운 듯한 표정이 얼굴 위로 떠올라 있었다.

단순한 여자 같으니라고.

조심조심 가슴 위로 올라오는 하얀 손이 다가올 입맞춤에 대한 서막 같아서 저절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쇄골 근처에서 머뭇거리는 작은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다.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 기다렸다는 듯 에리얼이 입술을 부딪쳐 왔다.

쪽, 가볍다는 말도 아쉬울 만큼 스치듯 입술이 지나갔다. 장난하는 건가 싶어 아래를 쏘아봤지만 에리얼은 큰일을 해낸 것마냥 뿌듯한 눈빛을 되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베르발드는 짜증을 삼키며 그녀의 뒷목을 붙잡아 제 쪽으로 휙 끌어당겼다.

“입맞춤이라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겁니다.”

짓뭉개듯 입술을 덮고서 아랫입술부터 살살 빨았다. 야릇한 감각에 에리얼이 반사적으로 머리를 뒤로 뺐다.

베르트발드가 재빨리 손을 올려 도망가려는 목을 단단히 붙잡고 굶주린 듯 입술을 삼켰다. 귀 언저리를 맴도는 얕은 신음 소리가 타오르는 열망에 기름을 부었다.

뒷목을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르 내려와 드레스를 옥죄고 있던 끈에 닿았다.

풀까 말까 망설이다가 다시 손을 미끄러트려 풍성한 드레스 자락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매끈한 실크 스타킹이 손바닥에 감기고 조금 더 안쪽으로 움직였을 때.

덜커덕, 작은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가주님.”

그레이스 오브 체임버, 가장 고매한 귀족답게 베르트발드는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고서 고개를 뒤로 물렸다.

타액이 흥건한 입술을 혀로 훔친 뒤, 그녀의 젖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슥 문질렀다.

“이만 내릴까요.”

이마에 살포시 키스를 남긴 뒤 먼저 마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입꼬리를 당겨 온화하게 미소짓는 얼굴과 달리 그의 내면은 욕설로 가득 차 있었다.

빌어먹을.

휴가인데 구경이고 뭐고 그냥 저택에 처박혀 있을걸. 괜한 말을 지껄여서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마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렇게 에리얼을 바라본 순간.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부정적인 상념이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기대에 차 반짝반짝 빛나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흙빛으로 물든 얼굴이 시야에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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