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베르트발드는 흐느적거리는 몸을 제 쪽으로 추어올리며 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들을 뒤로 넘겨주었다.
얌전히 제게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말도 못 하게 사랑스러웠다.
“내일은 함께 상가 구경이라도 할까요?”
“내일이요? 의회 때문에 바쁘신 거 아니에요?”
“휴가 냈습니다. 급한 일은 얼추 정리됐고 나머지는 법무관이 처리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실 에리얼이 황녀에게 납치된 이후부터는 일이고 뭐고 전부 손을 놔버렸다. 의회는 연장되었고 펠만은 매일 야근에 시달리며 법무관을 때려치울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납치 사건의 전모를 아는 관료들은 애석함을 표할 뿐 그를 타박하지 못했다. 세상 어느 천치가 부인이 납치되었다는데 일에 몰두할 수 있을까.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주치의의 전언도 있었기에, 베르트발드는 부인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며 당당히 휴가를 선포했다.
“외출하는 걸 무척 고대하고 계셨잖습니까. 짐꾼으로 부리셔도 됩니다. 선물도 사 주신다 약속하셨는데 기억나십니까?”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이던 에리얼이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맞다…! 저만 너무 이것저것 받아서 미안했거든요. 그래서 백작님께도 꼭 선물 사드리고 싶었는데. 내일 사드릴게요!”
활짝 웃으며 에리얼이 고개를 들어 베르트발드와 시선을 맞췄다. 초점이 흐릿한 회색 동공에 짓궂은 빛이 가득 어렸다.
젖살이 남아 있는 동그란 볼을 엄지로 슬슬 쓸며 베르트발드가 마주 웃었다.
“표정을 보니 왠지 품위 있는 선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 아니에요! 엄청 좋은 거예요!”
진짜로 좋은 건데.
…물론 성인 남성에게 선물한 법한 물건은 아니지만.
에리얼은 표정을 숨기기 위해 꼬물대며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뜨끈한 체온과 함께 야성적인 체취가 전해져 와 새삼 에리얼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왠지 정말로… 부부 같은걸.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데면데면했는데.
공녀라는 신분만 보고 이루어진 결혼이라고, 집정관이라는 위계에 어울리는 액세서리쯤으로 자신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걱정 어린 목소리, 다정한 손길에 마음이 포근해진다. 굶주린 듯 자신을 탐하는 몸짓은 또 어떤지.
온몸을 짓이겨 버리는 듯한 쾌감에 이성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여자로서, 내 안의 숨겨진 나를 찾은 느낌이었다.
느껴보지 못한 감정과 감각에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그는 또 다른 세상을 가져다 주었다.
“혹시 베리가… 나중에….”
그의 가슴에 입술을 붙인 채 작게 속삭였다.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당신이.”
나를 버려도 용서해줄게요.
이 정도로 충분했다. 이렇게까지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줬으니까. 그는 면죄부를 받을 자격이 있다.
모든 걸 용서할 것이다. 설사 이 모든 게 위선이었다 해도, 나중에 거짓이라 들통난다 해도 좋을 만큼 에리얼은 그가 고마웠다.
그는 지나치게 아름답고 완벽했다. 에리얼 같은 여자가 독점하기에는 너무 화려한 사람이었다. 황녀같이 삐뚤어진 여자에게는 주고 싶지 않지만, 언젠가 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때는 놔줘야겠지.
씁쓸함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생떼를 쓸 만큼 어린애는 아니었다. 제 주제를 아는 것. 에리얼이 가장 잘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부인 행세에 빠져 있어도 괜찮겠지.
조금은 좋아해도… 되겠지.
살며시 그의 가슴에 손바닥을 댔다.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혼잣말에 대한 대답처럼 느껴졌다.
* * *
“이상한데.”
끼익, 부부 침실의 문고리를 열고 들어온 주드가 눈매를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뒤따라 들어오던 마리아가 왜? 하고 되물었다.
“내가 백작가에서 일한 지도 벌써 칠 년이 넘었거든.”
“그래. 니키랑 너랑 같은 시기에 저택에 들어왔다고 했지.”
니키와 주드. 오랜 경력만큼 눈치도 손도 빠른 두 사람은 얼마 전에 상급 하녀로 승급했다.
주드는 연륜이 느껴지는 손길로 근사하게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은 즉, 가주님의 스토킹 경력도 그만큼 길단 얘기지.”
“…자랑이다. 너 말고 그런 애가 한둘이겠니. 그래서 뭐가 이상한데?”
주드가 따악, 손가락을 튕기며 근엄한 얼굴로 목소리를 깔았다.
“놀랍게도! 가주님은 그렇게 생겨서 여태까지 한 번도 여자를 침실로 들인 적이 없단 말이야. 오죽하면 남자 구실 못 하는 거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어.”
마리아는 뭐가 문제냐는 듯한 시선으로 주드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얘는. 여기 보면 모르겠어. 이렇게까지 열정적인 분이실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단 말이지.”
주드는 침대가를 가리키며 ‘저것 보라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둘둘 말려진 이불과 삐죽 튀어나와 엉망이 된 시트, 젖은 수건과 한데 뭉쳐 굴러다니는 옷가지들. 침대 헤드에 있어야 할 베개와 쿠션은 바닥에 떨어진 채로 처연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엉망이 된 침대가 지난밤의 격정을 알려주는 표식 같았다.
“아… 뭐. 요즘 좀 많이 열정적이시기는 하네.”
민망한 기분에 마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주드는 먼지털이로 소파를 툭툭 치며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결혼하신 다음에도, 마님이 저택에 오신 이후로도 계속 실감이 안 났는데. 이제야 가주님이 유부남이라는 게 느껴져.”
“아이고. 너도 참 너다.”
“그나마 나라서 덤덤한 거지, 파하르로 돌아가면 끙끙 앓는 애들이 수두룩할걸.”
백작 부인이 돌아온 이후, 다이아몬드 힐즈의 저택에는 묘한 바람이 일었다.
납치 사건으로 인해 사용인들 모두 백작 부인을 금이야 옥이야 대하기 시작했고 가주 또한 그랬다. 어딘가 벽이 있었던 부부 사이는 이전과 달리 뭔가 애틋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가주는 각방을 쓰던 생활을 청산하고 매일 밤 부부 침실을 준비해놓도록 명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하녀들은 매일 아침마다 엉망이 된 침실을 청소해야 했다.
“뭐… 난 좋은데. 마님 좀 귀여우시고.”
마리아가 테이블을 정리하며 쿡쿡 웃었다. 주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쳐다봤다가 ‘아하.’ 하며 의뭉스러운 웃음을 떠올렸다.
“너 요즘 마님하고 사이 좋지? 예전에는 안 어울린다고 그렇게 투덜거리더니.”
“어쭙잖게 거드름 피우는 귀족들보다 훨씬 나아. 왜, 올 초에 무슨 남작 딸이 가주님 쫓아다니다가 저택까지 찾아온 적 있잖아.”
“아, 기억난다. 그 엄청 싸가지 없던 계집애.”
“그 쪼끄만 것도 귀족이라고 그렇게 거만을 떠는데 당연히 공작가의 딸이면 훨씬 더 심할 줄 알았지. 그런데 겸손하시잖아.”
마리아와 주드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비에타가 하도 마님, 마님 해대길래 왜 저러나 싶었는데 이해가 가더라. 상냥하고 귀여우시고, 힘든 일 있으면 나서서 도우려고 하시고.”
“아, 그건 인정.”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알아? 잡초 뽑기 거들겠다고 따라 나오시더니 기껏 심어놨던 수레 국화를 왕창 뽑으시는 거야. 뭐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으니 그런 거겠지만.”
“헉. 그래서?”
“꽃은 뽑으면 안 된다고 알려드리니까 허둥지둥 옆에 있던 잡초를 다시 심으시더라.”
주드가 푸흡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테이블 정리를 마친 마리아가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뭔가 막… 애쓰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 게 귀엽다고 해야 하나. 우리 막냇동생 생각나. 도와주려고 끙끙거리는데 대부분 쓸모가 없거든.”
“푸하하! 그게 칭찬이니? 그런 걸 귀여워하다니 너도 참 특이하다.”
“뭐 그래? 너도 마님 좋아하면서.”
“…싫다고 한 적은 없어. 그냥 그런 거지.”
주드가 새침을 떨며 휙 고개를 돌렸다. 부정하지 않는 모습에 마리아가 큭큭거리며 둘둘 말린 이불을 확 집어 올렸다.
“…응?”
이상하다? 훌쩍 들려야 할 이불이 이상하리만치 묵직했다. 마리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불을 스윽 밀어보았다.
시커먼 머리카락, 그리고 하얀 얼굴. 그 아래 벌거벗은 어깨와 가슴….
“꺄악! 마, 마님!”
분명, 지금쯤 외출 준비를 한다고 방에 있어야 할 백작 부인이 몸을 동그랗게 말고 당혹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헐벗은 몸을 시트로 가리며 에리얼이 작은 목소리를 툭 내뱉었다.
“이, 일부러 엿들으려는 건 아니었거든.”
아니, 여기 왜 백작 부인이? 주무시고 계셨던 건가? 아니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걸 보니까 여태까지 한 얘기 다 들으셨나 본데!
어떡해, 어떡해애! 입이 말썽이지! 그래도 화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아, 다행이다. 그런데 오늘 분명 외출한다고 하시지 않았나? 지금 시간이 벌써….
독백을 마친 마리아가 눈을 번쩍 떴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닌데!
“마님!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니에요!”
놀란 것도 잠시뿐, 마리아는 벌거벗은 에리얼을 홱 끌어당겨 억지로 일으켰다.
“오늘 외출하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출발하실 시간 다 됐을 텐데!”
“아, 그게. 밤에 너무 늦게 자서. 잠깐 졸았는데 아무도 안 깨운 건지 계속 잠들었지 뭐야. 아침 걸렀더니 배도 좀 고프고….”
“세상에, 어쩐지 아침 식사 때 안 계시더라니! 아까 가주님 먼저 내려가시는 것 같았는데!”
서둘러야 해요, 빨리, 빨리! 외치며 마리아가 시트로 에리얼의 몸을 둘둘 말았다.
때마침 부술 것처럼 문을 열고 비에타가 뛰어들어 왔다.
“마님! 혹시 여기 계세요?”
“와, 비에타. 나 좀 깨워주지 그랬.”
“마님! 지금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세상에, 왜 여기 계신 거예요?! 빨리 준비해야 해요!’ 외치며 비에타가 에리얼을 질질 끌고 방을 빠져나갔다.
시트에 꽁꽁 감긴 채 뒤뚱거리며 뒤를 따르는 백작 부인의 모습이 평소보다 더욱 안쓰러웠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주드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가주님께서 깨우지 말라고 하시긴 했는데 설마 여기서 주무시고 계실 줄은 몰랐네. 어휴, 가주님도 정말 적당히 좀 하시지.”
“아아아악!”
“아 씨, 깜짝이야.”
“주드! 나 어떡해!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아으, 다 듣고 계셨을 거 아니야! 돌아오시면 혼쭐날 거야! 어쩜 좋아!”
“글쎄? 화난 얼굴은 아니셨… 아니, 좀 기뻐 보이시던데…?”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표정이었지만 어느 쪽으로 봐도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으아아.’ 하며 벽에 머리를 쿵쿵 찧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