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왜 그러십니까?”
미심쩍은 미소에 물음을 던지자 에리얼이 흠, 콧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게요. 작년에 아버지께 스웨터를 만들어드린 적이 있거든요. 파란색과 빨간색, 노란색을 섞은 사슴 무늬 스웨터를 선물해드렸는데요.”
총천연색의 화려하면서도 촌스러운, 어린아이들에게나 입힐 법한 대단히 유치한 모양의 스웨터였다. 어지간하면 칭찬만 건네는 그웬조차 ‘언니 이건 좀….’ 하며 혀를 내두를 만큼 굉장히 조악한 스웨터.
당연히 아버지를 골탕 먹이려고 만든 스웨터였다. 에리얼은 입꼬리를 쭈욱 늘어뜨리고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게 뭐냐고 곧장 내다 버리실 줄 알았는데, 막상 아버지가 입으시니까 다들 너무 잘 어울린다고 칭찬만 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버리기는커녕 그 스웨터를 겨울 교복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입고 다녔다.
평소에만 입고 다녔다면 다행이지, 나중에는 귀한 손님을 맞을 때조차 그 스웨터를 입고 나갔다. 그러면 귀족들은 북부 민족 의상이냐느니 공작 각하께서는 패션 센스도 남다르시다느니 하며 칭찬을 일삼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낡아질 대로 낡아진 스웨터를 아쉬운 듯 쳐다보다가 웃는 얼굴로 비아냥을 던져댔다.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네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구나. 비슷한 걸로 하나 더 만들어 보지 그러느냐.」
아버지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아마 그 스웨터도 선물한 의도를 미리 파악하고 역으로 골탕 먹이려고 입고 다닌 게 틀림없었다.
약 올리는 데에 아주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에리얼이 뛰기는커녕 기어가는 놈이라면 아버지는 항상 나는 놈이었다.
회상을 마친 에리얼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웨터에 대한 복수를 마치고 나왔어야 했는데. 다음에는 더 이상한 무늬의 스웨터를 떠서 보내야지.
“공작 각하께서는 늘 예복만 입고 다니시는 줄 알았는데… 대단히 의외입니다.”
휙휙 변하는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베르트발드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에리얼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개성적인 것도 나쁘지는 않겠습니다만 저는 가급적 무난한 스웨터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물론이죠! 백작님께는 평범한 스웨터를 떠 드릴게요. 어떤 색이 좋으세요? 흰색? 붉은색?”
“부인께서 보시기에 어떤 색이 어울릴 것 같습니까?”
잠시 고민한 에리얼이 턱을 톡톡 두드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을 이어갔다.
“음… 다 잘 어울리실 것 같긴 한데. 역시 가장 무난한 건 흰색일까요.”
“흰색. 좋습니다.”
“입어보고 마음에 드시면 다른 색으로도 만들어드릴게요. 어디 보자… 스웨터용 실이 여기 있을 텐데.”
에리얼은 뜨고 있던 레이스를 옆으로 치우며 테이블 위에 놓인 바구니로 손을 뻗었다.
도톰한 양모실과 가느다란 면실을 양손에 쥐고 골똘히 고민하다가 아, 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치수부터 재야 하는데. 백작님은 키가 엄청 크시니까… 으음. 일단은 아버지 사이즈로 생각하고 떠볼게요.”
“저는 각하처럼 우락부락한 몸은 아닙니다만.”
“아하하, 그건 그래요. 그럼 빌헬름에게 상세한 치수를 알려달라고 해야겠네요. 분명 재단용으로 미리 적어놓은 것들이 있을 텐데.”
“굳이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베르트발드가 양손으로 에리얼의 팔을 붙잡고 제 쪽으로 휙 끌어당겼다. 어어, 하는 사이에 에리얼의 얼굴이 단단한 가슴팍으로 푹 고꾸라졌다.
이내 속삭이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에리얼의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부인께서 직접 몸으로 재 보시는 게 어떠실지.”
“몸으로요? 무슨, 으앗!”
“자. 만져봐요.”
베르트발드가 웃으며 에리얼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작은 상체가 맞춘 듯이 품 안에 쏙 들어왔다.
코딱지만 한 리라를 뚱땅거릴 때는 언제고 이번에는 스웨터라니. 꼭 만드는 것도 저같이 몽글몽글한 것만 만들어대니 귀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백작, 숨, 숨이!”
짜부라질 듯한 신음 소리에 화들짝 놀란 베르트발드가 팔의 힘을 풀었다. 에리얼이 헝클어진 머리를 푸스스 털며 가쁘게 숨을 뱉었다.
헥헥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괜히 마음이 짠해져 왔다. 장난이 지나쳤을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에리얼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시선이 마주한 순간.
베르트발드가 숨을 멈추고 천천히 눈매를 좁혔다.
“백작님… 서, 설마 그… 하, 하실…?”
물기가 서린 눈매, 그 아래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저절로 시선을 잡아끌었다.
에리얼은 뻐끔대는 입술을 슬쩍 깨물더니 스르르 눈을 감았다. 눈치를 살피듯 한쪽 눈만 떠 흘깃 베르트발드를 바라보더니 아주 살짝, 입술을 내민다.
반응이 없으니 좀 더 쭈욱 내밀었다.
“…….”
베르트발드는 난처한 심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표정을 읽지 못한 에리얼은 눈치도 없이 동그랗게 주먹을 말아쥔 채 눈을 꼭 감고 그의 입맞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망한 여자다.
장난이었다. 그냥 가벼운 장난.
그냥 살짝 안고 토닥이다가 다시 놓아주려고 했다.
그런데 또… 이런 식으로 자신을 충동질할 줄이야.
웃음을 참기 위해 입 안쪽을 꾹 깨물었다. 베르트발드는 입 맞추는 대신 훌쩍 에리얼을 안아 들고 침대 위에 내동댕이쳤다.
퍼뜩 눈을 뜬 에리얼이 손을 허우적거리며 ‘어, 어, 어어’, 말 같잖은 말들을 토해냈다. 베르트발드는 에리얼의 위에 올라타 지그시 그녀의 상체를 억압했다.
양팔로 가두듯이 에리얼을 속박한 후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흘렸다.
“우리 부인께서 뭘 기대하고 계셨을까.”
놀리는 듯한 어조에 에리얼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기, 기대 같은 거, 한 적, 없는데요…!”
눈을 질끈 감고 후들후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쥐어 짜낸다.
방금 전 뽀뽀해 달라는 듯한 패기는 어디로 가고 비 맞은 생쥐마냥 달달 떠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베르트발드는 곱게 휜 눈으로 에리얼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미처 다물리지 못한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쪽, 가볍게 입술을 뗐다가 고개를 틀어 조금 더 깊이 입을 맞췄다. 기대한 적 없다더니 자연스레 입을 벌리는 꼴이 기대 만발이었다.
어쩌지. 멈출 수 없을 것 같은데.
베르트발드는 고민하다가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기로 결심했다.
“음, 으음. 그, 그만…!”
몸을 훑는 손길에 깜짝 놀란 에리얼이 주먹으로 가슴을 밀어냈다. 하지만 커다란 상체는 아무런 미동 없이 더욱 세게 에리얼을 깔아뭉갤 뿐이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에리얼이 질끈 눈을 감았다.
입술을 맞댄 잠깐 사이에 드레스가 술술 벗겨졌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가리고 있던 얇은 슬립이 허벅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어느새 상의를 탈의한 베르트발드가 헐벗은 몸 위로 제 가슴을 내리눌렀다.
몸을 가릴 새도 없이 침대에 널브러진 몸은 저항다운 저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학학거리기만 바빴다.
베르트발드는 퍼덕거리는 팔을 휘어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뜨거운 숨, 그보다 더 뜨거운 혀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 손가락 틈새를 핥았다.
낯선 감각에 에리얼이 비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백, 백작님. 지금 아직, 밤도 안 됐는데.”
“눈이 안 보이면 몸으로 다 새겨넣으면 그만인 것을, 낮과 밤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손바닥을 유린하던 입술이 다시 뺨으로 내려와 살결을 타고 아래로 내려간다.
목덜미를 훑는 입술의 감촉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몸을 움츠리자 나직한 음성이 그녀를 달랬다.
“부인께서 싫으시면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에리얼이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의 말을 되새겼다. 흐린 시야 속으로 회오리치는 붉은 인영이 보였다.
싫으면 멈춘다니. 정말?
이렇게 빠르게, 무섭게 일렁거리는데?
하지만 보여지는 것과 달리 그의 태도는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베르트발드는 하얀 뺨에 입술을 붙인 채 떠보는 듯한 어조로 소곤거렸다.
“저야 다른 방식으로 풀면 되니… 부인께서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다른 방식?
무, 무슨 다른 방식?
에리얼의 뇌리에 몇 가지 풍경이 촤라락 스쳐 지나갔다. 세상 물정에 둔한 에리얼이지만 남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뇌리에 남은 건 아름다운 정부와 붙어 있는 자신의 남편이었다.
아, 이건 좀.
안 돼… 안 돼.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싫은 거 아니에요! 완전, 좋아요!”
에리얼은 베르트발드의 옷깃을 꼭 붙든 채 ‘이걸 기다렸어요’라며 떠들어댔다. 좋다고 용쓰고 있지만 이마 가운데에 깊게 세로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베르트발드는 입을 일자로 다물어 숨을 참으며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원래부터 에리얼이 솔직한 심성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줄은 처음 알았다. 생각이 빤히 보이는 그녀의 행동이 애처롭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무엇보다 웃겼다.
“에리얼.”
이마와 뺨, 눈꺼풀에 쪼는 듯한 입맞춤을 거듭하며 베르트발드가 에리얼의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파르르 떨리는 까만 속눈썹, 탁한 눈동자의 초점이 이리저리 방황하며 혼란한 심정을 알리고 있었다. 짠한 얼굴이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베르트발드의 입매에는 짓궂은 미소가 흘러넘쳤다.
“좋다고 했으니까, 이번에는 에리얼이 입 맞춰봐요.”
키스하기 편하도록 에리얼의 뒷목과 머리를 받쳐 든 채로 베르트발드가 좀 더 깊이 목을 숙였다.
코끝이 닿고, 서로의 숨결이 섞여들었다. 그의 동공 속으로 터질 듯 붉어진 얼굴의 에리얼이 들어찼다.
괜한 말을 했어. 바보 같은 자신을 속으로 마구 매질하던 에리얼이 결심한 듯 눈을 반짝였다.
그래,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겠어?
부부잖아.
휴, 깊게 숨을 고른 다음. 에리얼이 냉큼 팔을 뻗어 베르트발드의 목을 끌어당겼다.
앙다문 입술을 들이박듯이 세게 부딪혔다. 아야, 베르트발드가 신음을 흘리며 아픈 척하자 에리얼이 움찔하며 힘을 풀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베르트발드가 유도하듯 부드럽게 입술을 포갰다.
쪼듯이 살짝 닿았다가 멀어지기를 여러 번, 다시 진하게 입을 맞췄다. ‘이렇게, 부드럽게.’ 속삭이며 입술을 떼자 머뭇거리던 에리얼이 천천히 그의 입맞춤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