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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65화 (65/145)

65화

유젠은 할 말을 잃은 채 뚫어져라 베르트발드를 쳐다보다가 하, 하며 탄식을 뱉었다. 날카로웠던 눈초리에 경계심이 더욱 짙어졌다.

“하다 하다 별 웃기지도 않는. 그웬이 자네 같은 사람에게 가당키나 한 줄 아는가?”

“…예?”

“이런 수상쩍은 짓 벌일 생각 말고, 정식으로 인사를 왔다면 고민해볼 법도 하겠지만, 지금은 글렀어. 자네는 절대로.”

“아니, 아니요. 아닙니다! 그웨니시스 소공작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싸늘하게 베르트발드를 노려보던 두 명의 시선이 천천히 허공 위에서 부딪혔다.

연한 청록빛의 눈동자 두 쌍이 의혹과 의심을 담고 베르트발드에게 시선을 향했다. 베르트발드는 미간을 좁힌 채 어떻게 운을 떼야 하나 고민했다.

“왜 소공작께 마음이 있는데 공녀를 모시고 갔겠습니까. 오해입니다. 제가 마음에 둔 분은 에리얼 아이기스 공녀입니다.”

“에리얼을?”

“언니를?”

두 사람의 눈매가 다시 사나운 빛을 띠었다.

유젠은 이거 사기꾼 아닌가 싶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베르트발드를 노려보았고, 그웬은 웬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듯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베르트발드를 쳐다보았다.

“왜 언니를! 아니, 아니지! 웃기지 마! 너 같은 놈한테 언니가 가당키나 해?!”

부전여전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그웬이 제 아버지와 똑같은 어조로 일갈했다.

“아니, 그 전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네놈과 언니가 무슨 접점이 있다고 갑자기 내놓으라 마라야!”

“첫눈에 반했습니다.”

아이기스 부녀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그웬이었다.

“…아니, 언니가 착하고 예쁘긴 하지만…!”

“진심입니다. 아이기스 공녀께 청혼하고 싶습니다.”

베르트발드가 허리를 숙이며 더없이 정중한 자세로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웬은 입을 벙긋거리며 어떻게 대꾸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지금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깨달았다.

언니를 좋아한다는 놈이 언니를 끌고 가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온 걸까. 생각이 이어짐과 동시에 그녀의 눈에 불이 붙었다.

“너! 설마, 설마 언니를 데려가서 그, 이상한 짓을 한 건가!”

“그럴 리가. 공녀를 만나 뵙고 싶어 다소 거친 방식을 쓰긴 했지만 저 또한 귀족입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무례한 짓을 저지르겠습니까.”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말을 줄줄 읊으며 베르트발드가 유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대화해야 할 상대는 그웬이 아니라 유젠 아이기스여야 했다.

팔짱을 낀 채 검지로 뺨을 톡톡 두드리고 있던 유젠에게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실상, 무표정한 얼굴 뒤로 수많은 상념이 유젠을 괴롭히고 있었다.

저 말이 사실일까. 왜 하필 에리얼을? 물론 자신의 입장에서야 에리얼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기특하고 똘똘한 딸이긴 하지만, 평범한 사내들은 그 아이를 포용할 수 없다. 그만큼 큰 단점을 지닌 아이니까.

하지만 만약….

저 발칙한 애송이가 에리얼에 대해서 잘 모른 채 외모만 보고 한눈에 반했다면.

어미를 닮아 외모가 무척 어여쁜 아이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자네. 우리 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서는 표정과 마찬가지로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인간미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태도였다.

대다수가 주눅 들어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유젠이었지만 베르트발드는 평온하게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눈이 불편하신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사교계에서 배척을 받고 계신다는 것도. 약혼과 관련해서도, 연이어 파혼당하셨다는 것도 전부 알고 있습니다.”

‘날이 춥군요.’ 따위를 읊조리는 듯이 건조한 어투였다. 유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응시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좋다고 한단 말인가.

…얀셀가의 후계자라.

나쁘지 않았다. 아니, 객관적으로만 따지면 흠잡을 데 없는 놈이었다.

퍼블릭 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마찬가지로 사관 학교 또한 수석을 놓치지 않고 있다 들었다. 개인의 역량만으로 따지면 딸의 약혼 상대로 거론된 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난 놈이다.

하지만 출신만큼은 뛰어넘을 수 없었다. 얀셀가가 동남부 일대를 주름잡는 대부호라는 건 유젠도 잘 알고 있었다. 대대로 원로원의 원로를 맡을 만큼 오래된 명문가라는 것도.

하나 아쉽게도 그게 전부였다.

귀족 사회는 철저한 계층 사회다. 신분 낮은 여자가 높은 지위의 남자와 결혼하는 게 상식인 곳이다. 반면 그 반대의 경우는 격이 떨어진다 해서 기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에리얼 또한 아이기스 공녀에서 백작 부인으로 격하될 텐데, 아비로서는 안 그래도 상처가 많은 아이를 또다시 사교계의 놀림감으로 전락시키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유젠은 팔짱 낀 틈새로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가늠하는 듯한 눈초리로 상대를 훑었다.

잘나고 뭐고 간에 저놈은 함부로 딸을 훔쳐 간 놈이었다. 또 무슨 미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원래 멀쩡해 보이는 놈들치고 속까지 제대로 알찬 놈은 드물었다.

게다가 저 얼굴. 저 반반한 낯짝….

여자들이 환장하게 생겼는데, 에리얼에게 첫눈에 반했다?

따져 생각해보니 사기꾼이 따로 없었다. 유젠은 음산한 어조로 말문을 뗐다.

“에리얼에게 청혼하고 싶다고 했나.”

“예, 각하.”

“자네가 우리 가문과 격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거침없는 답변에 유젠이 눈썹을 움찔했다.

허, 이것 봐라.

“알고 있다면 다행이군. 얀셀가에 대한 예의로서 꺼지라고는 말하지 않겠네. 돌아가 주게.”

“-처음에.”

베르트발드는 꺼지는 대신 미미한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 말을 이었다.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제안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다고 말입니다.”

“…제안?”

베르트발드는 뒷짐을 진 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저택에 오기 전까지 할 말들을 미리 떠올려놨지만, 막상 입에 담으려니 문장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긴장한 것이다. 공작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하는 스스로에 대한 긴장감이었다.

황족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베르트발드일진대 아이기스 공작 앞에서라고 긴장하거나 주눅들 리는 없었다. 그렇다 해서 독사 같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공작이 쉬운 상대라는 뜻은 아니었지만.

베르트발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내키지 않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6년.”

“6년?”

“6년만 기다려주신다면 격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허.”

“…허?”

두 부녀가 동시에 뭔 소리냐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탄성을 흘렸다. 그웬이 ‘무슨 개소리를…’이라고 외치기 직전, 유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격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했나.”

“예.”

“지금 에리얼의 혼처로 거론되는 상대가 어떤 수준인지 알고 말하는 건가.”

“잘 압니다. 왕가와 대공가를 후보로 넣고 계시는 듯하더군요.”

알면서 저런 말을 지껄이다니. 6년은커녕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유젠은 실소를 흘리며 오만한 눈길로 베르트발드를 주시했다. 시선을 마주한 베르트발드가 그에 지지 않으려는 듯이 천천히 입매를 끌어당겨 화사한 미소를 떠올렸다.

“남부를 자치주로 독립하면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그러면 얀셀가 또한 공작가를 자처할 수 있게 되겠지요.”

유젠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조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베르트발드는 주먹을 입가에 댄 채 한결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치주 선언을 하면 황실에서야 난리가 나겠지만… 저희 가문과 남부 연합의 힘을 동원하면 원로원의 입은 다물게 할 수 있습니다. 뭐 불협화음이 없지야 않겠습니다만 6년이면 잠잠하게 할 수 있을 듯하여.”

“…뭐.”

“북부의 아이기스 공작가, 남부의 얀셀 대공가. 공작가의 결합이라면 썩 나쁘지 않은 모양새 아니겠습니까. 그게 마음에 안 드신다면.”

“아니, 아니, 아아니. 잠깐, 잠깐.”

“미, 미쳤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공자, 당신 미쳤어?”

아이기스 부녀가 황망한 얼굴로 동시에 손을 내저었다. 당황스러운 반응에 더욱 당황한 건 베르트발드였다.

“충분히 현실성 있는 일입니다만. 남부는 다섯 개의 영지가 연합 형식으로 짜여 있지요.”

얀셀령을 비롯한 나머지 영지들은 불과 55년 전까지만 해도 비블레헴 제도로 불리며 제국과 분리되어 있던 독립국이었다.

대운하 협정을 통해 제국에 합류하긴 했지만 여전히 황실보다는 영주의 힘이 더욱 막강한 곳들이기도 했다.

남부 연합의 연혁을 떠올린 유젠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닫았고, 베르트발드는 유창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얀셀가가 그들을 대표해 남부를 호령하고 있다는 건 각하께서도 부정하지 못하실 겁니다. 독립을 주장하는 건 그다지 무리가 아닙니다. 물론 물밑 작업이 꽤 필요하겠습니다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유젠은 일그러진 미간을 꾹 누른 채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했다.

“그런 문제가 아닐세. 그렇게 쉽게… 뭣보다 자네는 후계자일 뿐.”

“퍼블릭 스쿨 졸업 이후로 실질적인 영지 경영은 제가 도맡고 있습니다. 아카데미 졸업 후에는 바로 작위를 계승받을 예정이지요. 각하께서도 소문은 들으셨을 겁니다.”

유젠이 눈매를 찌푸렸다. 베르트발드가 사교계 최고의 신랑감으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현 가주인 리히터 얀셀의 이른 은퇴로 가주의 조기 계승이 이루어질 거라는 소문이 가장 큰 여파를 미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언의 긍정에 베르트발드는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조금 더 가벼운 어조로 화제를 돌렸다.

“원로원에 힘을 실어주는 것도 방법이겠지요. 현재 집정관인 벤세라 후작과 콘타르뷔에 백작은 황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마침 후작가가 재정난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들을 후원하면 황실을 밀어내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겁니다. 뭐, 그저 허울뿐이라는 조건이 붙겠지만 공작 위 하나쯤은 대가로 받아낼 수 있겠지요.”

“…….”

“각하. 얀셀가가 돈만 많은 집안이라는 건 편견입니다.”

날카로운 지적에 유젠이 뺨을 움찔했다. 베르트발드는 최대한 겸손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작위도 돈으로 사고파는 세상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돈이라는 거, 각하께서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유젠은 할 말을 잃고 침음을 삼켰다.

대륙을 이끄는 제국, 그 제국이 제국을 자처할 수 있던 건 강력한 군대와 그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윤택한 경제 덕분이었다. 영지를 다스리는 입장으로서 돈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아는 유젠이었다.

돈만 많은 집안. 어쩌면 돈이 많기에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집안이었다. 현 백작인 리히터 얀셀 또한 가문의 정보력과 재력으로 한창 때에는 원로원의 법무관까지 이른 자였다.

원래부터도 부자인 집안이었지만 지금은 독점 무역과 희귀 광물인 백열석 광산으로 감히 넘볼 수 없는 부를 거머쥐고 있다.

그의 말대로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어떤 방식이 마음에 드십니까. 뭐가 됐든 꽤 시끄러워지긴 하겠지만, 바라는 쪽을 선택해 주십시오.”

베르트발드는 마치 시장 좌판에서 물건을 파는 행상인처럼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유젠은 눈살을 찌푸리며 느릿하게 턱을 쓸었다. 항상 매끈하던 턱에 까슬한 수염이 돋아나 있었다.

지난 사흘간 딸이 걱정되어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당연히 수염 따위 깎을 틈이 없었다. 까끌거리는 턱을 슬슬 매만지며 유젠은 골몰에 잠겼다.

「제 아들이지만 가끔은 머리가 어떻게 된 놈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뭔가에 한번 빠져들면 주변을 돌아보지를 않거든요.」

언젠가 얀셀 백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흘려들었는데… 그 말이 정답이었나 보다.

저 눈, 저 표정을 보면 장난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하기야. 주변에서 그렇게 명석하다고 떠들어대던 놈이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감히 제 앞에서 이런 말을 농으로 할 리가 없었다.

정말로 제국을 뒤집어놓을 생각인가. 그렇게까지 딸을 원하는 건가.

어떻게 해야 좋을까. 에리얼을 저런 반미치광이에게 넘겨도 괜찮은 걸까.

고뇌가 깊어갈수록 찌푸린 미간의 주름도 깊어져 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유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6년이라고 했지.”

“예.”

“다른 걸 제안하지. 6년… 6년 안에.”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청아한 빛의 연푸른 눈동자가 베르트발드의 진청색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했다. 유젠은 끄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집정관까지 도달한다면. 그러면 딸을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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