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책을 읽어준다는 말에 에리얼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책이요? 갑자기? 책이요?”
“예. 책.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우선 이것부터 시작할 겁니다.”
펼친 책의 끄트머리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베르트발드가 쾌활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책부터 읽도록 하죠. ‘시계탑의 공주님’이라는 동화책입니다. 아마 공녀께서는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혹여 이미 들어보셨다 해도 너그럽게 다시 한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에리얼에게 별다른 설명도 하지 않고서 베르트발드는 ‘옛날 옛날 아주 옛날에….’ 하며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에리얼은 황당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듣기 좋은 저음이 계속 이어지자 에리얼도 점점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열한 번째 페이지를 넘겼을 즈음에는 이미 책 내용에 빠져들어 현실을 잊어버렸다.
중요한 부분에서는 ‘우와.’ 감탄하기도 했다가 아슬아슬한 부분에서는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 하며 에리얼은 충실하게 청자의 역할을 소화했다.
그렇게 기이한 낭독회가 이어졌다.
“…인사한 공주님은 다시 숲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자, 여기까지입니다.”
“아, 벌써 끝인가요….”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셨습니까.”
“네! 처음에는 그냥 유치한 동화책인 줄 알았는데 굉장히 어른스러운 내용이네요. 재미있었어요.”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토끼와 경주하던 장면이 제일 인상적이었는데, 공녀께서는 어떠셨습니까?”
“맞다, 거기 엄청 웃겼죠? 그런데 저는 공주님이 토끼와 달 케이크를 먹는 장면이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에리얼이 두 손을 맞잡고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케이크, 케이크, 달 케이크는 무슨 맛일까요?’ 중얼거리던 찰나 화음을 이루듯 꼬르르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에리얼이 새빨개진 얼굴로 배를 슥슥 문질렀다.
“아, 그게, 그게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가볍게 차라도 들까요.”
좋은 타이밍이었다. 베르트발드는 재빨리 일어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바이온에게 디저트를 내오라 지시했다.
잠시 후, 바이온이 차와 디저트를 가득 담은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바이온은 입꼬리를 실룩대며 베르트발드를 쳐다보더니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그답지 않은 인사를 남기고 다시 방을 나갔다.
상황을 재미있어 하는 태도가 못내 거슬렸지만 베르트발드는 에리얼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좋은 걸로만 준비하라 일렀는데 공녀께서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드시지요.”
다갈색 밤크림이 가득 올려져 있는 몽블랑, 건드리면 통 튀어 나갈 듯 폭신폭신한 시폰 케이크, 견과류를 잔뜩 올린 고소한 타르트와 마멀레이드를 올린 작은 파이.
그 외에도 초콜릿 케이크와 당근 케이크, 캐러멜 타르트 등등 다양한 종류의 케이크들이 쟁반에 가득 담겨 있고 한편에는 달콤한 머랭과 쿠키, 잼과 크림 등이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베르트발드는 차를 따르며 에리얼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았다. 부끄러워하던 얼굴 위로 활짝 화색이 피어올랐다.
“케이크가 이렇게나 많다니. 우리 둘이서 다 먹을 수 있을까요?”
무심코 흘러나온 말에 베르트발드의 뺨이 움찔했다.
우리 둘. 오묘한 문장이었다. 슬슬 올라가는 입꼬리를 단속하며 베르트발드는 찻잔을 에리얼 앞에 내려놓았다.
“아쉽게도 단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공녀께서 애써주셔야겠습니다. 많이 드십시오.”
“으음…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에리얼은 씩씩하게 포크를 집어 들고서 폭신폭신한 시폰 케이크를 입 안 가득 욱여넣었다.
은은한 바닐라향, 보드랍게 씹히는 케이크의 감촉이라니! 납치범에 대한 경계심 따위는 땅에 처박아둔 채 에리얼은 해맑은 얼굴로 케이크를 정복해 나갔다.
베르트발드는 티스푼으로 찻잔을 휘저으며 에리얼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해맑은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돌려보내야 하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고, 혹여 공작이 알게 되면 곤란해진다며 이성이 계속 부르짖고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을 지배하는 본능은 ‘이대로 계속 같이 있고 싶다’였다.
조금만.
조금만 같이 있다 돌려보내야지. 함께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한 시간만 더, 아니, 두 시간만 더.
아니. 일단 반나절만 같이 있을까.
조금만이라던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두 사람은 처음의 어색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엔 이 책을 읽어드릴까요. ‘두더지 홉킨스의 대모험’. 혹시 읽어보셨습니까?”
“아뇨. 처음 듣는 책이에요. 어떤 내용인가요?”
“음… 저도 오랜만에 읽어보는 거라서 잘 기억은 안 납니다만….”
멀찍이 떨어져서 눈치를 살피던 모양은 어디로 갔는지, 에리얼은 베르트발드의 옆에 딱 달라붙어 흥미로운 눈길로 책 언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리얼 또한 낯선 이에 대한 두려움을 내던지고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는 중이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남자는 내내 정중한 태도와 우아한 언변으로 자신을 대했다. 게다가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행동과 말투가 에리얼의 경각심을 희석시켰다.
왠지…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멍하니 생각하며 에리얼은 남자의 어깨에 스르르 머리를 기댔다. 배부르고 몸도 편안하고. 나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자면 안 되는데.
돌아가야 되는데….
그웬이… 아버지는….
에리얼은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윽고 새근새근, 잠이 들어버렸다.
머리를 기댄 순간부터 뚫어져라 에리얼을 직시하고 있던 베르트발드는 그녀가 잠이 들었음을 깨닫고 조용히 책을 덮었다. 그리고 혹여 깨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에리얼을 침대에 누였다.
에리얼은 미동조차 없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베르트발드는 잠시 망설이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주었다.
“진짜 잠들었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은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평온을 전이시켰다. 베르트발드는 한참 동안 에리얼을 바라보다가, 조금 더 용기를 냈다.
기다란 검지손가락이 에리얼의 뺨을 스쳤다.
연분홍빛이 감도는 동그란 뺨은 갓 구워낸 흰 빵처럼 보들보들하고 말랑거렸다. 윤곽을 손에 새길 것처럼 둥글게 뺨을 덧그리다가 천천히 이마와 눈꺼풀, 작은 코끝을 쓸어내렸다.
닿을 듯 말듯 미간을 쓸어내리던 손가락이 작고 오목한 인중을 스쳐 입술 위에서 멈춰 섰다.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새근대는 숨결이 느껴졌다. 뜨겁고 습한 온기가 손가락 주변을 떠돌다 산화하고 허공에는 은은한 꽃향기만이 남았다.
익숙한 향기였지만 무슨 향기인지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여자들은 좀 더 강렬하고 화려한 향수를 쓰던데… 이건 처음 맡아보는 향수인데.
아니, 하지만 분명 익숙한 냄새였다.
향기의 정체가 궁금해 좀 더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댔다. 알 것 같기도 한데 아직도 영 모르겠다.
무슨 향기였더라.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했다. 향기가 좀 더 진해지고, 정체가 뇌리에 잡힐 듯 말 듯했다.
세탁물에서 자주 맡던 향기인데. 부드럽고 상쾌한….
허브향인가 싶으면서도 좀 더 꽃향기에 가까운. 이불에서 자주 맡을 수 있던….
아.
“라벤더.”
멍한 얼굴로 눈을 껌벅거렸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지?
라벤더 향기가 섞인 숨결이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바로 코앞에, 채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얼굴은 평소의 귀여운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어딘가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발갛게 익어 예쁜 빛이 감도는 장밋빛 입술은 정말이지….
초조한 기분을 못 이겨 애꿎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닿으면 어떤 감촉일까.
뜨거울까? 입술에서도 라벤더 향이 날까?
또라이 같은 짓 하지 말라며 이성이 저를 붙들었지만 아쉽게도 본능의 무게를 이기기에는 이성의 끈이 너무나도 얇았다.
쓰린 얼굴로 에리얼을 바라보던 베르트발드가 천천히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포개자 예상했던 대로 포근한 라벤더 향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말캉하고 따스한 촉감. 손가락으로 문질렀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촉이었다.
고개를 틀어 더욱 깊이 입술을 머금었다. 흰빛이 도는 금색 머리카락이 사르락거리며 에리얼의 뺨으로 내려앉았다.
에리얼이 간지러운 듯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작은 비음이 새어 나왔다. 신음까지 모두 삼킨 베르트발드는 아쉬운 듯 두어 번 더 입술을 겹친 뒤 느릿하게 고개를 뒤로 물렸다.
잠든 에리얼의 뺨에 은은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의 뺨에서도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베르트발드는 아랫입술을 살짝 핥고서 그대로 입술을 깨물었다. 온기가 아쉬워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하염없이 깨물어댔다.
“미치겠네.”
잔뜩 가라앉은 음성이 혼란스러운 그의 심상을 대변하고 있었다. 정말로 미칠 것 같았다.
왜 에리얼이 게속 신경 쓰였던 건지, 왜 그녀의 약혼 소식에 열받았던 건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유 모를 두근거림에 잠 못 이루었던 것도, 에리얼만 떠올리면 단전 부근이 묵직하게 내려앉던 이유도. 애매하게 뇌리를 떠돌아다니던 모든 상념들이 방금 전의 입맞춤으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냈다.
이런 거였나.
아버지가 좋아한다고 물었던 게 이런 뜻이었구나. 빌어먹을.
「제가 왜 그런 애를 좋아하겠습니까. 장님에, 바보 같고 칠칠찮고. 뭔 해괴한 꿈을 꾼다는 둥 이상하기 짝이 없는 그런 멍청한 꼬맹이는 한 다발을 갖다 줘도 사양입니다.」
자신이 내뱉었던 멍청한 말들을 뇌리에 되새겨보았다.
미친. 한 다발을 갖다 줘도 사양한단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베르트발드는 침대 벽에 제 머리를 쿵쿵 박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