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에리얼은 남자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물론, 남자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첫눈에 알아챘다. 당당하면서도 나긋나긋한 손짓과 걸음걸이, 상류층 특유의 딱딱한 어휘와 차분한 말투 따위는 숨기려 해도 숨기기 힘든 귀족들의 특징이었다.
주인이라면 이 사람보다 더 지체 높은 신분의 귀족일 텐데… 아버지께 여쭤본 다음 다녀와도 괜찮겠지.
생각을 마친 에리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어렵지는 않지요.」
대답을 듣자마자 납치범이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선이 허공에 교차하고, 어색한 침묵이 발치에 내려앉았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에 에리얼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지금요?」
「예.」
「지금 당장요?」
「예.」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에리얼은 말똥히 그를 쳐다보다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 그건 조금… 아, 아버지께 허락도 받아야 하고, 이따 오후에 동생과 선약이 있거든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웬이 수도 구경을 시켜준다고 기다리고 있으라 했던 참이었으니까.
납치범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셔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만 공녀님께서 가기 싫으시다면… 제가 쫓겨나겠지요… 아, 뭐 큰일은 아니지요. 먹고살 일은 많으니까. 저 하나만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도 무척 곤란해지겠지만… 하지만 공녀님께서 정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구슬픈 목소리가 호숫가 주변을 떠돌았다. 에리얼은 어떻게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 눈을 껌벅거리다가 후다닥 손을 내저었다.
「그, 그게, 제가 신분 문제도 있고. 모르는 분을 덥석 따라갈 수는 없잖아요. 정말 죄송하지만….」
납치범은 후우우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속삭이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압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좋다고 따라갈까요. 다만 신께 맹세코, 주인께서 공녀님께 해가 되는 짓을 하신다면 이 바이온이 목숨을 다해 공녀님을….」
「바이온? 이름이 바이온이신가 보네요.」
헉, 소리와 함께 납치범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바, 바이온이 아니라 베이온입니다, 베이온.’ 납치범은 아무래도 좋을 말을 내뱉으며 필사적으로 에리얼을 설득했다.
「어쨌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저녁 어스름이 지기 전에 반드시 저택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저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하나. 어쩌면 좋지.
에리얼은 물끄러미 상대의 실루엣을 살피며 그의 체격을 가늠했다. 아버지만큼 커다란 키, 오랫동안 무술을 연마한 사람 특유의 절도 있는 행동.
저항한들 순식간에 제압당할 것 같았다.
지금은 이렇게 점잖게 행동하고 있지만 어떻게 돌변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분명… 도망쳐도 금방 잡힐 것 같은데….
시녀들을 데리고 올걸. 매일 산책 나오는 길이라고 괜히 방심해서 이런 꼴을 당하다니.
어떻게 하지.
왜 나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 걸까. 그웬이면 몰라도 자신 같은 여자와 연루되어서 좋은 점은 하나도 없을 텐데.
상념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자는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며 호숫가 근처에 서 있던 마차를 연신 흘깃거렸다.
눈치를 살피던 에리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갈게요.」
상냥하게 굴 때 순순히 따라가자.
수상쩍은 짓을 하면 바로 마차에서 뛰어내려야지. 그웬이나 아버지가 구해줄 것을 믿으며 에리얼은 잠자코 마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안대를 쓴 채 이십여 분이 지나고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라는 말과 함께 마차가 멈췄다. 마부와 납치범이 뭔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곧 새로운 마차로 몸이 옮겨졌다.
그렇게 다른 마차를 타고 또다시 이동했다. 시끌벅적하던 소리가 줄어들고 새 소리, 우스스 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여긴… 어디쯤일까. 분명 수도 근처일 텐데….”
너무 멀리 온 건 아니겠지.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희미하게 들리던 인기척마저 모두 사라지고 귓가에는 숲 소리만 남았다.
타그락, 달칵, 추임새처럼 끼어든 마차 바퀴 소리가 불안하게 가슴을 울렸다. 에리얼은 초조함을 못 이겨 엄지손톱을 꾹꾹 깨물었다.
이윽고 다시 마차가 멈췄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하며 납치범은 정중하게 에리얼을 안아 들었다.
어딘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듯싶었다.
찬기가 느껴지는 통로를 지나 끼익,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납치범은 에리얼을 푹신한 곳에 내려놓고 안대를 풀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곧 주인께서 오실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납치범이 방을 빠져나갔다.
인기척에 귀 기울이고 있던 에리얼은 주인이라는 사람이 금방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손을 뻗어 푹신푹신한 곳을 벗어났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 전경을 살폈다.
“생각보다 쾌적한걸.”
매우 넓은 방이었다. 침대와 소파 등 가구 일체가 갖춰져 있고 인형과 꽃이 방 곳곳을 수놓고 있었다.
마치 에리얼의 취향에 맞춘 듯한 호화로운 방은 창문이 창살로 막혀 있고 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는 점만 빼면 꽤 아늑하고 포근했다.
주변을 기웃거리던 에리얼이 지루함을 못 이겨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 잘난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그 덩치 큰 남자의 말로 유추해보면 적어도 자신에게 적대감을 가진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뭐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에리얼은 공손히 손을 모으고 문을 주시했다.
마침내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의 인영이 방으로 들어섰다. 하나는 아까와 같은 커다란 실루엣. 그리고 하나는 그보다 작은….
…붉은색.
“어… 부, 붉은….”
핏빛처럼 어두운 붉은색을 온몸에 휘감은 사람이 천천히 에리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리얼 또한 홀린 듯 붉은 인영에 시선을 고정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에리얼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붉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회색이었다. 색을 가진 사람은 에리얼의 삶에서 손으로 꼽을만치 드물었다. 그런데 다른 색을 갖고 있다니.
그것도 저렇게 강렬한 붉은색이라니.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노란색이나 초록색, 적어도 파란색이었다면 신기하다 생각하고 말았을 텐데.
지나치게 어두운 붉은색은 눈에 담은 순간부터 까닭 모를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에리얼은 소름이 돋아난 팔을 무의식적으로 슥 문질렀다.
“자리 좀.”
나직한 저음에 에리얼이 퍼뜩 눈을 깜박였다. 붉은 인영이 턱짓으로 문을 가리키자 함께 들어왔던 납치범이 목을 꾸벅 숙이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적막이 가득한 방 안에 두 사람의 인기척만이 서로를 가늠하듯 주변을 떠돌아다녔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고막을 스쳐 갔다.
붉은 인영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에리얼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가 불렀으면 인사라도 할 것이지, 왜 저렇게 가만히 서 있는 걸까.
묘한 압박감이 어깨를 짓눌러 도무지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섣불리 말을 걸었다가는 날카롭게 벼려진 긴장감에 몸이 베일 것만 같았다. 에리얼은 초조한 심정으로 상대가 먼저 인사를 건네길 기다렸다.
기나긴 침묵 끝에 붉은 인영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베르트발드가 최대한 차분하게,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손에 땀이 나는 것 같아서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에 미리 준비해 둔 구슬이 달각거리며 소리를 냈다. 무뚝뚝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 또한 긴장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만난 에리얼은 겨울에 봤을 때보다 훌쩍 커 있었다. 포동포동했던 볼은 젖살이 빠져 갸름해졌고, 밋밋하던 체구는 어느새 부드러운 곡선이 생겨 여성스러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자연스레 늘어뜨린 흑발은 곱게 광택이 돌고 있었고, 얼핏 드러난 목선은 작은 어깨와 더불어 가녀린 인상에 일조했다.
이상했다.
원래 이랬나.
에리얼 아이기스가 이렇게 예쁘장했던가.
분명 작년까지만 해도 조금 귀엽네 싶었던 소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아름다운 여자가 되어 제 앞에 앉아 있었다. 착각인가 싶어 이리저리 뜯어봐도 여전히 예뻤다.
새하얀 피부와 장밋빛 입술,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앙증맞은 코. 눈을 깜박일 때마다 촘촘하게 자리한 속눈썹이 고운 음영을 만들어냈다.
그 아래, 초점이 흐릿한 잿빛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롯이 자신만을, 베르트발드만을.
…나만을.
“안녕하세요. 저기….”
낭랑한 목소리가 베르트발드의 상념 속으로 파고들었다. 에리얼은 눈치를 살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납치범님에게 들었는데요.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고요.”
“예. 만나고 싶었습니다.”
베르트발드는 에리얼에게 시선을 못 박은 채 의식의 흐름대로 대꾸했다.
아무래도 좋았는데, 정말 아무 관심 없었는데.
저 하얀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녀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고….
“저어, 뭔가… 용건이 있어서 부르신 게 아닌가요?”
“아… 예. 용건. 예, 용건이 있었지요.”
용건. 용건은 당연히 있었다.
그냥 얼굴만 보고 ‘거 봐, 난 아무 감정도 안 든다니까.’ 하며 스스로에게, 또 아버지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그녀로 채운 지난 육 년의 세월이 그저 한순간의 치기였을 뿐이라고, 멍청한 장님에게 측은지심이 들어 오지랖을 부렸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에리얼을 마주하니 다른 용건이 마구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 번쯤 저 볼이 빵빵해지는 걸 보고 싶었는데 오늘이 그날이군.
맛있는 걸 잔뜩 먹이자. 북부에서 먹기 힘든 달콤한 과일, 신기한 디저트들로 상을 가득 채우는 거야. 망고나 파인애플 같은 건 안 먹어봤을 테니까 갖다 주면 무척 좋아하겠지.
아, 맞다. 머리도 빗질해주고 싶었어.
저 새카만 머리카락, 딱 한 번 만져봤을 때도 되게 매끈매끈했는데 지금은 더 매끄럽겠지. 흑발에는 역시 진주가 어울릴 테니까 진주 장식을 매달아주고…. 아, 아니다. 다이아몬드도 잘 어울리겠는데.
잠든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괜찮겠지. 창가에서 매일 꾸벅꾸벅 조는 모습도 귀여웠지만 제대로 누워서 자는 게 훨씬 편해 보이니까.
북부에서 쓰던 투박하고 무거운 이불 말고 새털처럼 보드라운 거위 털 이불을 덮어줘야지.
그다음에는… 아.
「공녀님은 같이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해. 소꿉놀이도 좋아해. 책 읽어주는 거 진짜 진짜 좋아.」
언제고 그녀가 떠들어대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
그 약속부터 지키자.
“이렇게 모시게 되어 대단히 송구합니다. 용건이 끝나는 대로 곧 다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공녀를 곤란케 해드릴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그럼 우선은.”
베르트발드는 벽에 늘어서 있던 책장으로 다가가 매우 신중한 눈길로 책을 꺼내 들었다.
팔락팔락 책장을 넘기며 에리얼의 건너편 스툴에 자리를 잡았다. 수려한 얼굴 위로 어린아이 같은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우선, 지금은 책을 읽어드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