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가주의 집무실 위로 무거운 침묵이 떠돌았다.
베르트발드와 같은 진청색 눈동자가 엄정한 빛을 띠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리히터는 거친 손길로 탁, 탁 책상을 두드리다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모를 줄 알았냐.”
중의적인 표현에 베르트발드가 무슨 말이냐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뭘 말씀하시는 건지.”
“너만 첩자 쓸 줄 알아? 네가 공녀를 염탐하던 것처럼 너도 염탐당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방학 때마다 북부에 가서 뭘 하나 했더니… 너도 참 재미있는 놈이다.”
“칭찬 감사합니다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베르트발드는 시침을 떼며 창가로 눈길을 돌렸다. 불리한 화제가 나올 때마다 모르는 척, 못 들은 척하는 건 습관에 가까웠다.
리히터는 미간을 좁힌 채 묘한 눈길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모르기는. 바이온이 다 얘기해줬다.”
“…….”
“예전에 공작가 숲에서 공녀가 널 구해줬을 때부터 뭔가 눈치가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역시 그때부터 공녀를 신경 쓰고 있었던 거냐.”
홱 고개를 돌린 베르트발드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리히터를 직시했다.
“그때 실종 소식을 알렸던 후줄근한 애가 공녀라는 걸 아버지는 알고 계셨다는 겁니까.”
“갑자기 이상한 애가 찾아와서 숲에 아들이 쓰러져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을 어떻게 믿냐.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에게만 정체를 알려주더라.”
“…….”
“그렇게 공녀가 좋으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르트발드가 책상을 탕! 내리치며 분연하게 외쳤다.
“아버지도 그런 헛소리를 하십니까. 제가 왜 그런 애를 좋아하겠습니까. 장님에, 바보 같고 칠칠찮고. 뭔 해괴한 꿈을 꾼다는 둥 이상하기 짝이 없는 그런 멍청한 꼬맹이는 한 다발을 갖다 줘도 사양입니다.”
“그럼 뭐 때문에 자꾸 공녀를 괴롭히는 건데.”
베르트발드가 우물거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리히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쓰게 웃으며 굳은 얼굴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에리얼 아이기스….
공녀라는 위치, 거기에 비해 한없이 모자란 능력과 배경.
자존심 강한 베르트발드로서 자신보다 뒤떨어진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었을 텐데, 좋아한다 인정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환경이니 현실 부정을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들의 성격을 모를 리 없는 리히터였다. 가질 수 없으니 이런 방식으로나마 훼방을 놓는 거겠지. 그리고 계속 좋아하지 않는다고 잡아뗄 것이다.
생각을 증명하듯 베르트발드가 절대 아니라는 듯 붉어진 얼굴로 휘휘 고개를 저었다.
“괴롭힌 적 없습니다. 저는 그냥 공녀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괴롭히는 거지. 남이 결혼한다는데 왜 네가 껴서 난리냐. 설마 은혜니 공덕이니 그딴 헛소리 할 셈은 아니겠지?”
속내를 들킨 베르트발드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곧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고 으으음, 침음을 내뱉었다.
그런 아들을 지켜보던 리히터는 거 보라는 듯 짙은 미소를 흘렸다.
“그렇게 좋으면 이상한 수 쓰지 말고 당당히 부딪쳐라. 뭐 공작가야 워낙 위상이 드높은 집안이니 청혼하는 게 만만치는 않겠지만 세상일이 꼭 순리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이거든. 나도 어떻게든 애써 보마.”
베르트발드가 사납게 눈매를 치켜뜬 채 리히터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순리는 거역할 수가 없는 이치입니다. 그걸 못 해서 아버지께서 어머니의 정체를 함구하신 거 아닙니까. 그 덕에 제가 사생아 취급받으면서 컸지요. 그리고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공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날카로운 비난에도 리히터는 팔짱을 낀 채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가 여태까지 이렇게 관심 쏟은 사람이 공녀 말고 또 있는 줄 알아? 공녀를 직접 만나지 않는 이유도 그런 거 아니냐. 만나면 너무 좋아질까 봐 그런 거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들아. 마음은 이성과 다르게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단다. 넌 항상 이성만 내세우며 행동하려고 하지. 그러니 혼란스러운 거다.”
“…….”
“북부에서도 매일같이 공녀를 훔쳐보러 다녔다면서.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차선책을 강구해 보자꾸나. 공작가야 물론 격이 높지만….”
“아버지.”
땅을 파고들 듯이 낮은 저음이 리히터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베르트발드가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려 리히터와 시선을 맞췄다.
방금 전의 태연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지독하게 차가운 무표정이 얼굴을 지배하고 있었다.
베르트발드는 후, 날숨을 내뱉고 마뜩잖은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 계속 저를 자극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제가 그 애와 결혼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까?”
“그럼 아니라고?”
“목숨을 살려줘서 고맙긴 한데, 달리 보답할 길이 없어서 지켜보던 중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다 이상한 놈들과 결혼하려는 게 안쓰러워 저지한 것뿐이지요.”
짙은 암청색 눈이 리히터를 빤히 직시했다. 무표정하던 얼굴 위로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베르트발드는 입꼬리에 조소를 매단 채로 말을 이었다.
“제가 공녀에게 이성으로서 관심 없다는 걸 직접 보여드리면 믿으시겠습니까.”
리히터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옆으로 세우자 베르트발드가 더욱 진한 미소를 흩뿌렸다. ‘왠지 불안한데’, 생각한 리히터가 입을 달싹인 찰나 베르트발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좋아하느냐 자꾸 물으시니 저도 긴가민가해집니다. 좋아하는지 아닌지 확인할 겸, 공녀를 만나 봐야겠습니다.”
만나 본다는 말에 리히터가 화색을 떠올렸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마침 사교 시즌이니 공녀도 수도에 머무르겠구나. 사교 활동은 거의 안 하고 있지만 초청장을 보내면….”
“그런 곳에서 만날 일은 없습니다.”
베르트발드는 턱을 쓸며 고뇌에 잠긴 얼굴로 바닥을 응시했다.
개방된 곳에서 그녀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 에리얼이 자신을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여태껏 쌓아온 모든 게 틀어진다.
에리얼을 만나서 재회하려던 목표는 옛날 옛적에 풍화되어 사라졌다. 수년 동안 과거를 곱씹으며 목표를 재설정했다.
지금 설정된 목표는 그녀가 곤란에 처해 있을 때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것, 그게 전부였다.
그때, 숲에서 에리얼이 보여줬던 모습처럼.
용감하게, 멋있게 나서야 했다. 세련된 모습으로 그녀를 도와준 뒤 ‘그때, 기억나? 그때는 네가 날 구해주려고 했지. 건방지게.’ 하고 말하는 것.
두 번째 재회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그래야만 이 끈적끈적하고 불편한 마음의 빚을 청산할 수 있을 터였다.
숲에서 헤어진 날부터 지금까지 베르트발드는 에리얼만 떠올리면 안절부절못하고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왜 그런 걸까. 이유 모를 초조함에 짜증스럽기도 했지만, 그렇다 해서 딱히 그녀가 싫은 건 아니었다. 나름 귀엽기도 하고 위태위태해서 안아주고 싶을 때도 있었다.
아, 대화하고 싶은 적도 많았다. 아는 체하면서 슬쩍 손을 잡아보고 싶기도 했고. 같이 숲을 걷고 싶다는 생각도 조금은 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감정은 어디까지나 안쓰러움에 기인한 것일 뿐 이성적인 호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래.
정체를 밝히지 않는 선에서 한번 만나 볼까.
만나 보면 알겠지. 왜 계속 그 애를 염탐하고 싶어 하는지, 얼굴만 봐도 간질간질한 느낌이 드는 것도 왜 그런지 다 알게 되겠지.
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감정 나도 정리하고 싶었는데…. 차라리 잘됐어.
까짓거 정체가 알려지면 마도구라도 써서 기억을 지우면 그만이고. 얼굴만 보고 다시 데려다주면 되잖아.
베르트발드는 고민을 끝내고 후련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아버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공녀에 대한 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알아서는 무슨-”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베르트발드는 리히터의 말을 무시하곤 집무실 문을 쾅 하고 닫았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와 곧장 바이온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공자님.”
뭔가 또 싸한데. 바이온은 베르트발드를 보자마자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늘 무표정하던 얼굴은 어디 가고 청아한 미소가 입가에 떠올라 있었다. 베르트발드가 바이온을 보고 웃을 때는 대부분 곤란한 명령을 내릴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에리얼 좀 데리고 와.”
난데없는 명령에 바이온이 잇새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그로부터 이틀 후. 에리얼은 이름 모를 괴한에게 납치되었다.
그것도 아주 기묘한 방식으로 납치되었다. 에리얼이 이상하다고 느낀 건 납치된 순간이 아니었다. 납치범의 태도가 가장 이상했다.
“저, 조금 불편하시겠지만 눈을 좀 가리겠습니다. 장소가 어딘지 알려지면 곤란해서요….”
납치범은 매우 정중한 태도로 에리얼의 눈에 천을 씌웠다. 뒤통수에 예쁘게 리본을 묶고서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금방 도착합니다.’ 하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어차피 잘 보이지도 않는데 왜 안대를 씌운 걸까.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차에 몸을 기댔다.
오늘도 별일 없는 하루라고 생각했는데. 에리얼은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하루를 회상했다.
아침을 먹고서 호숫가를 산책하기 위해 수도 저택을 나서던 참이었다. 몸에 익은 길이라서 하녀와 시녀 없이 에리얼 혼자 덜렁덜렁 걸어 나왔다.
그렇게 호수 근처에 다다랐을 때쯤,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인적 드문 곳에 사람이 있다니. 에리얼은 놀람 반, 반가움 반인 심정으로 즐겁게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이 시간에 호숫가에 사람이 있는 건 처음 보네요.」
「풍경이 무척 예쁘군요. 공녀님께서는 매일 이 부근을 산책하십니까?」
스스럼없이 자신을 공녀라 칭하는 남자의 모습에서 에리얼은 근처에 저택을 두고 있는 귀족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의심을 거두고 생긋 웃었다.
「네. 숲 내음이 무척 향기롭거든요. 새 소리, 바람 소리도 굉장히 듣기 좋아요.」
「그렇군요. 눈을 감으니까 소리가 더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두 사람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찌르륵, 삐륵 울리는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한데 어울려 숲의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수면에 파동이 일었다.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납치범이 작게 웃음 소리를 흘리며 말문을 열었다.
「사실 제 주인께서 공녀님을 정중히 모셔오라는 명을 내리셔서 아침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아, 물론 주인께서 직접 오셔서 공녀님을 뵈었다면 좋았겠지만 사교계에서 아주 유명한 분이시기에 공작가의 가신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곤란한 일이 벌어져서 말입니다.」
「아, 네에.」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공녀님께 해가 되는 일은 없을 테니 잠시 주인께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납치범이 매우 정중한 태도로 에리얼에게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