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렇게 허술하게 일이 잘 풀릴 리가 없지. 어설프게 탈출하려다가 잡혔다면 길드원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했을 것이다. 의뢰 수행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놈들이니까.
만약 자신이 조금이라도 늦게 발견했다면. 길드와 연이 없어 영영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아마 에리얼의 시신은 고사하고 뼛조각조차 찾을 수 없었을 터였다. 생각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이었다.
에리얼은 괜찮다 했지만 자신은 괜찮지 않았다. 이 일을 주도한 황녀와 유모를 둘 다 죽이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들고 있는 두 개의 토큰은, 황족이라도 죽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저는 아직도 철이 들려면 멀었나 봅니다.”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리얼이 애틋하면서도 멀게만 느껴졌다.
나조차도 쉬이 손 댈 수 없는 여자를, 어떻게 감히.
베르트발드는 손가락으로 토큰의 부조를 더듬으며 건조하게 말을 뱉었다.
“부인처럼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대를 용서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당하면 두 배로 갚아주는 게 신사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부인께서도 애써 용서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그게.”
“성스러운 핏줄 운운한들 황족도 인간입니다. 칼질 몇 번 하면 죽습니다. 뭐, 그저 예시일 뿐입니다만 손이나 다리 하나쯤 없어도 사는 데에는 지장 없을 테지요. 황녀는 외모에 대한 자아도취가 극심하니 얼굴에 해는 입히지 않는 쪽으로 처리하면 어떨까요. 부인께서 따로 원하시는 바가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십시오.”
고저 없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말에 담긴 내용은 무시무시했다.
아니, 백작님이 원래 이렇게 호전적인 사람이었나. 에리얼이 양손을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원하는 거 없어요! 전하의 일도 이제 그만 생각하고 싶어요. 저기… 진정하세요, 백작님.”
“흥분한 적 없습니다만.”
“그, 겉으로는 그래 보이시는데 단어가 너무 과격하셔서.”
“저는 최대한 품격 있는 단어를 지향합니다. 부인께 목을 따버릴 거라든지 팔다리를 잘라서 물고기 밥으로 준다든지 하는 거친 말을 쓰지는 않지 않습니까.”
아, 아까 ‘손이나 다리 하나쯤 없어도’ 라는 말을 풀어쓰면 저 뜻이 되는 거구나. 품격 있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의 차이를 깨닫게 된 에리얼이었다.
…어쩌지.
복잡한 심정으로 베르트발드를 바라보았다. 붉은 인영 한가운데에 커다란 소용돌이가 윙윙 휘몰아쳤다. 평연한 태도와 달리 그의 인영은 감정의 격동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아마도 저 격동의 이름은 분노와 불안,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하긴, 분노할 만했다. 자신을 납치하다니.
집정관의 권위를 건드린 것과 마찬가지 아니던가.
만약 자신이 북부에서 똑같은 짓을 당했다면 아버지도 훨훨 날뛰며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걱정되기보다는, 감히 공작가의 일원을 건드렸다는 사실만으로 엄청 격분했을 것이다.
그래도 에리얼은 황녀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관여되는 것도 싫고 그냥 황녀에 대한 생각을 잊고 싶었다.
그러려면 어떻게 달래야 할까. 에리얼은 어떤 식으로 화제를 이어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묘안을 냈다.
“백작님. 혹시 황녀 전하께 복수하시려는 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건 안 돼요. 저랑 약속하신 거 있잖아요.”
무슨 말이냐는 듯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옆으로 세웠다. 에리얼은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엊그제 밤에 백작님께서 저한테….”
해맑게 말을 이어가던 에리얼이 갑자기 말문을 흐리며 입술을 오므린 채 끙끙거렸다.
엊그제, 초야를 치른 밤.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은 분명.
「허락해 주시면… 복수고 뭐고 다 잊고, 부인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에만 집중하지요.」
이거였다.
별거 아닌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떠올려보니 무척 야릇한 말이었다.
뭐 그렇다 해서 말 자체가 이상하거나 천박한 건 아니었으니까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고민하던 에리얼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백작님을 허락하면 복수고 뭐고 다 잊으신다고 했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무슨 말이었는지 기억 안 납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허락하면 저를 기쁘게 해주시는 데에만… 집중하신다고 하셔서… 제가 그….”
낭랑하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이내 모깃소리만큼 작아졌다.
‘그, 뭐라고 하나, 그거, 있잖아요, 그거’ 따위의 말 같지 않은 말을 내뱉던 에리얼이 입을 다물고 화난 얼굴로 씩씩거렸다.
이런 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제대로 된 표현을 찾지 못해서 속이 탄 에리얼이었다.
창가에 몸을 기댄 채 느슨한 태도로 그 꼴을 관찰하던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숙이고 쿡쿡 웃음을 흘렸다.
에리얼이 홱 고개를 쳐들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하게 창가를 바라보다가, 또다시 고개를 숙이고 큭큭거렸다.
아니, 누구는 이렇게 진지한데 왜 웃는 거야. 에리얼이 발칵 성을 내려던 순간 베르트발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억납니다. 그렇군요. 그런 약속을 했었지요.”
에리얼이 환한 얼굴로 손뼉을 짝 마주쳤다.
“그렇죠? 기억나시죠? 그러니까 이제는.”
“그 전에 선행되었던 말이 있던 것 같은데. 부인께서는 기억 못 하십니까.”
베르트발드가 웃음을 억누르며 창가에서 몸을 뗐다. 짓궂은 얼굴로 에리얼을 바라보다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 앞에 섰다.
“부인께서 제 몫의 복수를 가로채셨으니 그 몫만큼 대가를 치러주셔야 한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고개를 숙여,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쉽게도… 제가 만족할 만큼 부인께 대가를 받지 못해서.”
잔잔히 파문이 이는 붉은 인영. 이유 모를 저항감에 에리얼이 주춤주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베르트발드도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놀란 에리얼이 다시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그래서 이렇게 분이 풀리지 않는 걸까.”
두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의아할 따름입니다.”
밀착하듯 몸을 붙여왔다.
후다닥, 뒤로 물러선 에리얼의 발길을 벽이 가로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베르트발드가 양손을 벽에 짚고 지그시 에리얼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또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걸까. 에리얼은 손으로 벽을 더듬거리며 억지로 방싯 웃어 보였다.
“어… 대… 대가를 뭘로 드려야 할지…”
“문장에 답이 있지 않습니까. 남자는 생각보다 단순한 동물이지요. 저를 만족시켜 주시면 복수고 뭐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겁니다.”
검지 손가락이 스르르 벽을 타고 내려와 에리얼의 뺨을 쓰다듬었다. 부풀린 스커트 속, 딱 붙어 있던 허벅지 틈새를 그의 두꺼운 허벅지가 억지로 비집고 들어왔다.
성적인 의도가 다분한 몸짓에 에리얼이 흠칫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돌렸다.
열기를 품은 웃음소리가 스치듯 귓가를 울리고, 커다란 손이 허리를 붙잡고서 에리얼의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아직도 아래가 아픕니까?”
끄는 듯한 목소리에 초조함과 열망, 걱정과 기대가 옅게 묻어났다. 에리얼은 괜찮다고 대답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첫날밤을 보낸 다음 날. 에리얼은 반나절 이상을 침대 위에서 보내야 했다.
붙어있을 때는 쾌락에 젖어 몰랐는데 다음 날 일어나려고 보니 도저히 걸을 수 없을 만큼 아래가 따끔거렸다.
이래서 새벽에 연고를 발라준 거구나.
원래 다들 이런 걸까.
분명… 기분은 좋았지만. 다음 날 후환이 두려워 두 번은 못 할 짓인 것 같았다.
“지금은 아프지 않은데요….”
하고 싶지는 않아요, 라고 차마 말할 수는 없어 우물쭈물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어질 말을 눈치챈 베르트발드가 눈을 갸름하게 뜨고 에리얼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여 에리얼과 이마를 맞댄 베르트발드가 천천히 눈을 감고 타이르듯 속삭였다.
“부인께서 내키지 않으시다면 절대 강요하지 않을 겁니다. 안심하십시오. 어찌 제 욕망 따위를 부인의 안전과 건강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사려 깊은 말에 에리얼이 감탄 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앞에는 잘게 일렁이는 붉은색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붉은색이… 왠지 평소보다 고운 핏빛처럼 느껴졌다.
남자들은 한번 동하면 허겁지겁 여자에게 달려든다고 들었는데, 역시 백작님은 어른스러워. 괜히 신사가 아니구나.
그런 에리얼의 상념 속에 나지막한 저음이 새어 들어왔다.
“다만 제 성정에도 일장일단이 있으니, 언짢은 기분으로 내내 있을 수는 없겠지요. 다른 곳에 화풀이하는 정도는 부인께서도 감내해 주셔야 합니다.”
“네? 그게 무슨.”
“안타깝지만 황녀에게 애도를 표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말을 매듭지으며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손등으로 뺨을 쓸어내리는 행위는 무척 정중하고 우아했지만 에리얼은 딱 그만큼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 어쩌다가 이런 분위기가 된 거지.
내가 지금 왜 황녀를 감싸고 있는 거지? 백작님은 정말 나를 안고 싶으신 건가? 아니면 그냥 놀리는 게 재미있어서 이러시는 건가?
찰나의 순간 수많은 물음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답을 낼 수는 없었다. 에리얼은 그저 본능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손을 들어 올려 목의 리본을 주욱 푼 다음, 버튼을 톡톡 풀고 단호한 의지와 함께 말을 뱉었다.
“만족할 때까지 해, 해볼까요!”
베르트발드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입꼬리가 위를 향하고 불량한 미소가 얼굴 가득 피어올랐다.
세상 물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새끼 오리 같은 여자가. 무슨… 만족할 때까지 해보겠다고?
아무튼 욱해서 객기부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질 않았다.
베르트발드는 에리얼의 턱을 들어 올려 입술에 쪽, 스치듯 입을 맞추고 말했다.
“그러시다면 기꺼이. 침실로 모실까요.”
“아, 아뇨, 뭐… 굳이… 저기 소파 있잖아요.”
에리얼은 부끄러움도 없는지 먼저 나서서 주섬주섬 버튼을 끌렀다. 길게 이어진 버튼을 모조리 풀더니 허리를 고정하고 있던 리본도 훌훌 풀어 내렸다.
이윽고 스커트가 툭,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