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에리얼이 고개를 들어 사자를 응시했다. 좁아든 미간과 축 처진 입꼬리에서 불쾌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자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보석 중에서 최고의 호가를 자랑하는 핑크 다이아몬드를 보고 저런 소리를 할 줄이야.
사자가 눈을 휘둥그레하게 뜬 채로 고개를 저었다.
“예? 아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라고 하셔도 사자님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루비랑 사파이어도 구분 못 하는 사람에게 이런 걸 주셔 봤자 별 쓸모도 없답니다. 이거 무슨 보석인가요?”
사자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곁에 서 있던 베르트발드에게 도와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팔짱을 낀 채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베르트발드는 조용히 한 발 물러서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제스처에 결국 사자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토했다.
“핑크 다이아몬드입니다. 경매장에서 무려 백만 골드를 호가했던 물건으로, 황후 폐하께서 무척 어렵게 구하신 희귀한….”
“황후 폐하께서요? 전하께서 보내신 선물이 아닌 건가요?”
“…물건을 황녀 전하께 양도하신 겁니다. 황녀 전하께서 부디 마음의 위안이 되셨으면 한다며 직접 포장해 보내셨습니다.”
에리얼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목걸이를 쳐다보았다. 손에 들고 조몰락거리자 잘그락잘그락, 목걸이에 달린 보석들이 서로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아니 그 귀한 걸 그렇게 만지시면….’ 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에리얼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외침이었다.
장애로 인해, 그리고 예지몽으로 인해 숱한 차별을 겪어온 그녀였다. 온갖 부당한 일에 익숙한 에리얼이었지만 지금 황녀의 사과 방식은 부당함을 떠나 그저 옳지 않다고 느껴졌다.
쓸모도 없는 보석 따위를 건네주고 입막음이라도 할 속셈인가.
차라리 사과를 하지 말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제대로 찾아와서 고개 숙이고 미안하다고 말을 할 것이지.
사자를 통해 대신 사과하며 선물을 건네는 이 작태는 자신의 오만함을 유지하면서 명목을 챙기려는 귀족 특유의 사고방식, 그뿐이었다.
에리얼은 목걸이를 다시 상자에 넣어놓고 탁 소리 나게 상자를 닫았다.
“사자님.”
“예, 부인.”
에리얼은 공손히 상자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사자님께는 죄송하지만 이 선물은 받을 수가 없어요. 다시 갖고 가셔야 할 것 같아요.”
사자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에리얼은 조금 더 앞으로 상자를 내밀며 한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게 보석은 의미가 없어요. 그리고… 사자님께서 아실지 모르겠지만 얀셀가는… 재력이라면 충분히 차고 넘치는 집안이라서 더더욱 의미가 없고요.”
기어들어 가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베르트발드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한 목소리였다.
진귀한 것을 보듯 오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베르트발드가 한쪽 입매를 당겨 웃으며 사자에게 관심을 돌렸다.
“우리 부인께서는 그 희귀하다는 붉은 다이아몬드도 서랍장에 두고 방치하시는 분이시오. 아마 그 목걸이는 그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게 될 테니 미안하지만 갖고 돌아가시는 게 좋겠소.”
“하지만 백작님…!”
“지금 부인께서 받고 싶으신 건 보석 따위가 아니오. 용서를 빌고자 하는 마음이지. 아마 전하께서 직접 오셔서 사과하셨다면 너그러이 용서하셨겠지만, 그런 의도가 비치지 않는다는 건 그대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오.”
“…….”
“뭐… 폐하께서 직접 고개를 숙이셨으니 일단 내 선에서는 용서하겠소. 하지만 부인의 마음을 돌리는 건 오래 걸릴 듯싶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오.”
에리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베르트발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직접 고개 숙여 사과했다고? 금시초문이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입만 움직여 말을 걸어보았지만 베르트발드는 그러거나 말거나 무관심한 태도로 사자의 응대에 초점을 맞출 뿐이었다.
분위기에 맞춰 평온한 얼굴로 서 있던 에리얼은 사자가 돌아가자마자 놀란 얼굴로 베르트발드의 소매를 붙들었다.
“두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붉은….”
“붉은 다이아몬드는 결혼 예물로 선물한 겁니다. 목걸이, 귀걸이 두 개 세트일 텐데 아마 부인의 드레스 룸 안쪽, 장신구 보관함 구석에 먼지와 함께 놓여 있을 겁니다.”
“예물이요?”
“예. 구색을 갖춘답시고 이것저것 꽤 쌓아두긴 했는데… 그나마 희귀한 건 그 붉은 다이아몬드 세트와 페리도트 티아라, 문스톤 반지 정도겠군요. 문스톤이 부인께 정말 잘 어울릴 듯싶어 꼭 선물하고 싶었는데, 순도가 높은 건 워낙 찾기 힘들어서 조금 고생했습니다.”
“그… 그랬나요? 그런 게 있는지 전혀 몰랐어요….”
결혼할 때 의례상 주고받는 선물이라고만 생각해서 그 안에 뭐가 담겨 있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미안한 기색을 보이자 베르트발드가 ‘괜찮습니다.’ 하며 운을 이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인께서야 당연히 보석 따위에 관심 없으실 테니 그냥 저의 과시용 선물이라고 넘어가셔도 무방합니다. 어차피 그런 건….”
말끝을 흐리며 베르트발드가 들릴 듯 말듯 침음을 흘렸다.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지그시 에리얼을 내려다보다가 창가에 허리를 기댄 채 벽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항상 예리하게 날이 서 있는 눈동자 속에 뭐라 단정할 수 없는 모호한 빛이 일렁였다. 벽이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를 골몰히 노려보던 베르트발드는 뭔가 말할 것처럼 뜸을 들이다가 다시 가늠하는 듯한 시선을 에리얼에게 쏟아냈다.
“…그런 것 모두 별 의미 없는 물건이지만. 그 문스톤 반지는 부인께 매우 잘 어울릴 듯싶은데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조금 아쉽군요. 언제고 한 번쯤 착용한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기쁠 겁니다.”
말미에 담긴 웃음기에 에리얼의 안색이 환해졌다. ‘지금이라도 끼고 올까요’, 말하려던 찰나 다른 궁금증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진중한 표정이 되었다.
휙휙 변하는 얼굴을 재밌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베르트발드가 먼저 화제를 입에 올렸다.
“그리고 폐하께서 사과하셨다는 건 사실입니다. 신분을 떠나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은 전부 황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황실에 있습니다. 황녀를 엄격히 단속한다고 하셨으니 앞으로 부인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 겁니다.”
황제는 사리 분별에 밝은 인간이다. 아니, 사리 분별에 밝으니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황실의 체면 운운한다면 그나마 남아 있는 황권도 원로원에 의해 깡그리 증발하리라는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터였다.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먼저 사과하지 않더라도 사과하게끔 만들면 그만이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었다. 베르트발드는 검지손가락 마디로 턱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골랐다.
“왠지 우습다는 생각이 듭니다.”
“뭐가요?”
“용서하고 자시고 부인께서는 이미 마음을 비우신 지 오래인 듯싶은데… 정말 그 쓰레기 세례로 황녀를 용서하신 겁니까.”
에리얼은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슥슥 문질렀다. 그 말대로 황녀에 대한 증오나 분노 따위는 쓰레기 포옹으로 깨끗이 잊어버렸다.
“전하께서는… 저 때문에 기절하셨잖아요.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나쁜 감정은 마음에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체력과 정신을 갉아먹는다. 그리고 에리얼은 좋은 일보다 우울한 일이 더 많은 삶을 살아왔다.
억울한 일, 부당한 일,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이런 일련의 감정을 지나쳐 에리얼이 도달한 것은 ‘나쁜 감정은 털어낼 수 있을 때 그냥 훌훌 털어버리자’였다.
누구를 미워하는 일에도 꽤 많은 기운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에리얼은 황녀를 용서하고 잊어버리기로 결심했다. 사과고 뭐고 할 필요 없이 그저 잊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베르트발드는 그렇지 않았다. 용서할 마음 따위 전혀 없었다. 그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에리얼을 응시하다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투로 툭 말을 내뱉었다.
“아쉽군요. 저는 충분하지 않습니다만.”
베르트발드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은밀히 숨겨두었던 토큰 두 개를 만지작거렸다.
각 토큰에는 수도를 양분하고 있는 두 길드, 노스라이드와 사우스빌의 길드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서로 앙숙이라고 소문난 두 길드의 뒷면에는 길드장끼리 남매 관계라는 우스운 내막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남매가 얀셀가의 충신이라는 점 또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올빼미 노스라이드, 까마귀 사우스빌.
낮과 밤을 불문하고 모든 소리를 듣는다는 노스라이드는 올빼미라는 이명답게 정보를 주류로 취급했다.
반면 사우스빌은 의뢰가 주류로 암살, 약탈, 납치 등등 온갖 의뢰를 수행하는 해결사 역할을 자처했다. 뒷세계 답게 모든 의뢰에는 거액이 오가고, 거액이 오간다는 뜻은 의뢰주의 대부분이 부유한 젠트리나 귀족이라는 뜻과 상통했다.
어떤 귀족이 어떤 의뢰를 청탁하는가. 귀족들의 이면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길드는 자유무역항과 함께 베르트발드의 가장 큰 무기였다. 원로원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기반에는 두 길드가 있었다.
하지만 베르트발드가 대대적으로 길드를 이용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노스라이드의 길드장하고는 애매한 사이이기도 했고, 사우스빌 또한 중요하다 싶은 일에만 활용했다.
정보 수집을 위해 이용한 적은 종종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은밀하게, 보조 수단으로 사용해왔을 뿐이었다. 얀셀 같은 명문가가 뒷세계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큰 파문이 일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길드를 이용하고 싶었다. 아주 대대적으로 이용해서 쿠델라이야를 나락으로 처넣고 싶었다.
만약 자신을 건드렸다면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멍청한 황녀는 제 주제도 모르고 에리얼을 건드렸다.
감히, 내 에리얼을.
에리얼을 그딴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게 하다니.
얼마나 겁이 났을까.
분수도 모르고 매번 아무렇지 않은 척, 명랑한 척하는 에리얼이다. 정말로 쓰레기통에 숨어 있다가 때 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도움을 요청하고, 하녀를 구해서 다시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걸까.
어쩜 이렇게 순진한지.
…아니, 바보 같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