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백작님?”
붉은 인영이라면 그밖에 없는데. 놀란 얼굴로 묻자 그도 놀란 듯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트레이를 끌고 방에 들어섰다.
베르트발드는 입구에 서서 사용인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가 싶더니 다시 방으로 돌아와 트레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저 때문에 깨셨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곁에 있을 걸 그랬나 봅니다.”
“아뇨. 그냥… 그런 건 아니고요.”
“잠시만 그대로 앉아계십시오.”
트레이 위에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가 놓여 있었다. 참방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베르트발드가 따끈따끈 김이 올라오는 수건을 갖고 와서 에리얼 앞에 섰다.
당혹에 잠겨 있던 에리얼이 이불을 조몰락거리며 그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백작님… 돌아가신 게 아니었네요?”
“돌아가다니요?”
“깨어 있을 때 옆에 안 계시길래 그… 침실로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베르트발드는 이건 또 무슨 희귀한 헛소리인가 싶은 눈으로 에리얼을 내려다보았다. 눈길을 모르는 에리얼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왜 있잖아요.’ 하며 말을 이었다.
“합방하는 날 외에는 부부라도 각자 침실을 쓴다고 들어서요. 아무래도 원래 자던 곳이 편하기도 하고… 백작님께서도 그러셨던 게 아닐까 싶어서.”
“그런 경우가 있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전 아닙니다.”
베르트발드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로 에리얼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가슴을 가리기 위해 양손을 교차하고 있던 에리얼이 맥없이 픽 침대로 쓰러졌다.
베르트발드는 소리 나지 않게 짧게 웃은 뒤 침대가에 걸터앉아 에리얼의 허리 부근을 슬슬 쓸어내렸다.
뭘까, 지금 이건 대체 뭘까.
눈만 굴리고 있던 에리얼의 의식 저편에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마저 닦아드리겠습니다. 혹여 깨실까 봐 아래쪽은 닦아드리지 못했습니다. 약 바를 거니까 끝날 때까지 눈 감고 계십시오.”
“저, 저저저기!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베르트발드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걷어 올렸다. 파닥거리는 허벅지를 손으로 누른 뒤 최대한 상냥한 어조로 에리얼에게 말했다.
“초야 때에는 몸에 무리가 많이 간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물고 깨문 상처도 있어서… 덧날지도 모르니까 얌전히 계십시오.”
“제가 할 수 있어요!”
에리얼은 갓 태어난 애벌레처럼 온몸을 꿈지럭거리며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에서도 붉게 달아오른 뺨을 알아볼 수 있었다. 순간 망설이던 베르트발드는 고개를 저으며 에리얼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움직였다.
놀란 에리얼이 상체를 일으키며 손을 뻗은 순간 젖은 수건이 그녀의 몸을 스윽 훔쳤다.
에리얼이 흡, 숨을 멈춘 채 몸을 굳혔다. 맞닿은 곳에서부터 홧홧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상처와 통증에는 무딘 편이었지만 이렇게 살이 꼭꼭 저며지는 듯한 고통은 처음이었다.
“그냥 얌전히 누워계시라 했습니다. 금방 끝낼 겁니다.”
베르트발드는 다시 에리얼의 가슴을 밀어 침대에 눕힌 뒤 조심스러운 손길로 몸을 닦아주었다.
에리얼은 숨을 멈춘 채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홉뜬 눈으로 부들부들 손을 떠는 모양이 썩 처량했다.
이렇게 비실비실하고 약해빠진 몸으로 한 번, 두 번, 세 번을 연달아 정을 나눴다. 초야에 이렇게 무리를 했으니 몸이 멀쩡할리가 없었다.
베르트발드는 약통으로 손을 뻗으며 ‘죄송합니다.’ 하고 운을 뗐다.
“몸도 안 좋으신데 너무… 자제를 못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지요.”
땅을 기듯이 낮은 속삭임 속에 진심 어린 자책이 서려 있었다.
진심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이성을 놓았어도 이런 실수를 하다니.
바로 어제까지만해도 미친 여자에게 납치당해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던 에리얼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텐데, 벗은 몸에 홀려서 홀라당 먹어버릴 줄이야. 게다가 그렇게 짐승처럼 몰아붙이다니.
첫 경험은 무조건 다정하게 대해주리라 마음먹었건만.
다정하게, 살살 녹아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어서 자신에게 매달리게 했어야 했는데. 더 해달라고 조르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녀가 조르기는커녕 넋이 나가서 지쳐 쓰러진 에리얼을 붙잡고 내내 괴롭히지 않았던가. 정말 짐승이 따로 없었다.
왜 이러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하얗게 드러난 허벅지를 보자마자 아래로 열기가 쏠렸다.
베르트발드는 짜증을 억누르며 손가락으로 연고를 뭉갰다. 허브와 향유가 섞인 차가운 연고에서 약 특유의 진한 향기가 솔솔 풍겼다. 손가락 가득 연고를 묻힌 뒤 베르트발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에리얼에게 속삭임을 건넸다.
“부인. 잠시 이불 좀 걷어주십시오.”
“왜… 왜요?”
엉거주춤한 자세로 하체를 드러낸 채 이불을 꽁꽁 뒤덮고 있던 에리얼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손가락을 아래로 향했다.
“읍-!!”
상처에 차가운 연고가 닿자마자 에리얼이 퍼득 허리를 튕겼다. 신음이 튀어나오려던 순간, 베르트발드가 입술을 포개 목소리를 삼켜버렸다.
벌린 입 속으로 ‘금방 끝납니다.’ 낮은 저음이 웅웅 울렸다. 베르트발드는 키스로 에리얼의 관심을 끌며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부어오른 부근을 중심으로 둥글게 덧그리다가 다시 한번 연고를 찍어 그 위에 덧발랐다.
오므라드는 허벅지를 억지로 벌리고 연고를 바르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타액으로 비벼지는 입술, 연고가 스민 상처 부위에서 젖은 소리가 울려 베르트발드의 심상을 어지럽혔다.
점점 깊어지는 입맞춤에 에리얼이 할딱거리며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제야 아차 하며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푸른 눈동자 속에 흐트러진 표정으로 색색 숨을 몰아쉬는 작은 얼굴이 비쳤다.
너무 가련해서 보호해주고 싶은 얼굴이지만 왠지 가학적인 감정을 이끌어내는 얼굴이기도 했다. 평소의 명랑하고 차분한 그녀에게서 이끌어내기 힘든 표정이기에 더욱 희소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끝났습니다.”
웃음을 삼키며 베르트발드가 에리얼의 뺨에 스치듯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그리고 빠른 손길로 다시 이불을 덮어준 뒤 수건과 약통을 정리했다.
때마침 똑똑, 하며 노크소리가 울렸다. 베르트발드는 발갛게 익은 에리얼의 얼굴을 힐긋 쳐다본 다음 문 쪽으로 다가갔다.
“가주님.”
문을 열자 집사인 빌헬름이 그답지 않게 밝은 얼굴로 이런저런 음식들이 놓여 있는 배드테이블을 내보였다.
“지시하신 것 모두 준비했습니다. 차는 어떻게 할까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도 좀 쉬도록 해.”
베르트발드는 배드테이블을 빼앗은 뒤 재빨리 문을 닫아버렸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방 안에 쏟아졌다. 무뚝뚝한 빌헬름까지 저 모양인데, 아침이 되면 저택이 꽤나 시끄럽겠구나 생각하며 베르트발드가 배드테이블을 침대로 날랐다.
고소한 냄새가 침대 가를 떠돌았다. 냄새를 맡은 순간 에리얼의 배 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배는 눈치도 없지, 중얼거리며 에리얼이 머뭇머뭇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피곤하시겠지만 가볍게라도 식사를 하고 주무시는 게 나을 듯싶은데 어떠십니까. 부인께서 좋아하시는 것만 내오라 일렀습니다.”
베르트발드는 따뜻한 수프와 버터 감자, 작은 과일이 담긴 배드테이블을 에리얼 앞에 내려놓고서 꽃향기가 풍기는 허브차를 조르륵 따랐다.
한 잔은 에리얼에게, 한 잔은 자신이 들고 빨리 먹으라는 듯 테이블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네. 그럼… 조금만 먹을게요.”
에리얼은 망설이다가 못이기는 척 스푼을 들었다.
사실 엄청나게 배가 고팠다. 어제 낮부터 하루 반나절이 지난 지금까지 물 말고는 아무것도 먹질 못했으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수프를 그릇 채 들고 꿀떡꿀떡 삼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람이란 허기질수록 밑바닥이 드러나는 법이다. 먹는 걸 좋아하는 에리얼로서는 까딱 잘못하면 게걸스러워 보일 것 같아 체면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에리얼은 먹기 싫은 듯이 시무룩한 표정을 떠올린 채 조신하게 수프를 떠 입에 넣었다.
“…흑.”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뻔했다.
버섯 스프인가? 치즈 향이 너무 좋아. 대체 몇 끼를 굶은 거야.
에리얼은 괜히 억울한 표정으로 수프를 떠먹다가 옆에 앉아있는 베르트발드의 눈치를 살폈다.
허겁지겁 먹고 싶은데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먹기가 불편했다. 시선을 눈치챈 듯 베르트발드가 말했다.
“시장하셨나 보군요. 더 준비하라고 할까요?”
“괜찮… 백작님은 안 드세요?”
“전 다른 걸로 배가 차서 괜찮습니다.”
만약 에리얼이 베르트발드를 볼 수 있었다면 그 음험한 표정으로 말속의 뉘앙스를 파악할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느긋한 목소리만 듣고서는 ‘백작님은 따로 식사를 하셨나.’ 하며 납득할 뿐이었다.
에리얼은 체면을 벗어던지고 감자를 한입 가득 입에 넣었다. 맛있다,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말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체면치레를 우선하기에는 배가 너무 고팠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가 새벽의 고요함을 잔잔히 깨부쉈다.
베르트발드는 차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차를 입에 머금었다. 흐린 초승달이 찻잔 속에 스며들어 우아한 그림자를 자아냈다.
* * *
사건 이후 에리얼이 가장 걱정했던 건 황실의 반응이었다.
집정관의 위치가 대단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감히 황녀를 협박하다니. 귀족 사회에 익숙한 에리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자신은 아이기스가의 딸이기 때문에 협박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곤란해도 자신이 곤란할 일은 없었고 뒤처리 또한 아버지인 아이기스 공작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생각해 보니 지금 일도 원인을 따지면 황녀가 먼저 자신을 건드린 게 아니던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아버지 이름을 팔아도 될 듯싶어 정식으로 서신을 보내려던 찰나, 황실에서 사자가 찾아왔다.
“지난번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사죄드리고자 하오니 부디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사자가 건넨 상자 속에는 분홍빛 다이아몬드가 달린 호사스러운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상자를 더듬거리던 에리얼은 상자 속에 담긴 게 보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실망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혹시 황녀 전하께서 저를 놀리는 건 아니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