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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43화 (43/145)

43화

에리얼은 품을 열어젖힌 베르트발드를 빤히 쳐다보다가 턱을 가리며 싱긋 웃었다.

평범한 레이디였다면 드러난 상체를 보고 얼굴을 붉히거나 수줍어 했겠지만 그녀에게는 그저 붉은 인영이 회색빛 모포를 나풀거리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에리얼은 헐렁거리는 소매로 턱을 부비적거리다가 품에 안기는 대신 베르트발드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아쉬운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던 베르트발드가 쓴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상대를 규정하는 데에는 저마다의 기준이 있지요. 이상한 꿈을 꾼다든가 색으로 사람의 감정을 읽는다든가, 세상이 회색빛으로 보인다든가… 부인께서 단점이라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은 제가 당신을 규정하는 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든 베르트발드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에리얼은 그 자체로 에리얼인 것을. 그녀가 귀머거리든 다리가 없든, 전혀 상관없이 에리얼은 지금처럼 자신의 마음을 지배했을 것이다.

그의 성격처럼 담담한 고백이었다.

하지만 에리얼의 귀는 전혀 다른 곳에 포인트를 짚고 있었다. 예지몽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랐는데, 감정이 색으로 보인다는 것조차 알고 있다니.

감정이 보이는 건 정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감정이 읽힌다는 사실은 누구나 꺼림칙하게 여길 테니까. 입장 바꿔 베르트발드가 자신의 감정을 색으로 엿본다 생각하면 창피하고 쑥스럽지 않은가.

때문에 감정에 대해서는 어머니에게도, 그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에리얼은 홉뜬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저를 잘 아세요?”

“궁금합니까?”

“그야 당연히 궁금하죠.”

“얌전히 있겠다 약속하시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베르트발드가 살짝 몸을 숙여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에리얼은 비장한 얼굴로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감고 약속했다.

옅은 미소를 띠운 채 그녀를 내려다보던 베르트발드가 손을 뻗어 에리얼을 들어 올렸다. 바르작거리는 에리얼을 무릎 위에 앉힌 채 모포로 자신과 그녀를 단단히 둘러 감았다.

재킷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녀의 굴곡이 벗은 상체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여체가 맞닿은 순간, 베르트발드가 저도 모르게 살짝 몸을 굳혔다.

생생한 촉감에 몸이 굳은 건 에리얼도 마찬가지였다. 헐벗은 살갗 사이의 장애물이라고는 고작 얇은 재킷 하나뿐이었다. 넓고 두툼한 가슴, 그 아래 살짝 도드라진 복근이 팔에 닿아 단단한 형체를 알리고 있었다.

자신의 몸과는 너무 다른 남자의 체형. 선이 가느다란 얼굴이라 몸도 가느다랄 것 같았는데 베르트발드는 예상 외로 근육질 체형이었다. 그리고 키도 크고 상반신도 자신의 두 배는 될 만큼 널찍했다.

…그러고 보니.

밤을 보내려다가 기절했었던 그날.

제 품으로 내려앉은 상체가 바윗덩어리처럼 단단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등을 끌어안자 두 손바닥 안으로 꽉 짜인 등 근육이 달라붙고, 오금 아래로 두꺼운 허벅지가 밀려들던 감각이 바로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했다.

아버지처럼 커다란 덩치의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았는데… 백작님은 아버지보다 더 큰 것 같아.

발그레하게 붉어진 뺨을 숨기기 위해 그의 쇄골 근처에 얼굴을 비볐다. 둥둥 울리는 고동에 귀를 기울이며 슬그머니 눈을 들어 올렸다. 연한 회색 동공이 베르트발드를 담고서 어둡게 반짝였다.

베르트발드는 얌전히 안겨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스듬히 입매를 끌어당겼다. 그렇게 시야에 새기듯 시선을 고정한 채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는 기억하지 못하실 테지만. 아주 어렸을 때 부인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백작님과 제가요? 어디… 황궁에서요?”

“아니요. 공작령 부지의 숲에서였습니다. 하도 옛날이라 부인께서는 기억나지 않으실 겁니다. 그때 분명… 또래 친구를 만나서 반가웠던 건지 부인께서 자신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지요.”

“그때 제가 꿈이랑 감정 얘기까지 했었다고요?”

“그렇습니다.”

에리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어렸을 때 숲에서 백작님을 만났다고? 그런 걸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텐데.

숲은 자주 가던 곳이라 익숙하지만 그곳에서 그웬과 사용인들 외에 낯선 사람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방인, 게다가 이성 친구를 만났다면 스치듯 만났더라도 분명 기억에 남았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에 대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 안 나요. 만났다면 기억할 텐데. 이상하다….”

베르트발드가 빙긋 웃으며 에리얼의 팔뚝을 쓸었다.

당연히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그가 직접 기억을 지웠으니까.

베르트발드는 고개 숙여 에리얼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고 웃음기 섞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굳이 기억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철이 없을 때라 신분 차이를 무시하고 부인께 건방진 말을 지껄였을 겁니다.”

“왠지 신선하네요. 철없고 건방진 백작님.”

“나이가 꽉 찬 지금도 건방지다는 소리를 자주 듣곤 하지요. 부인께서 그리 느끼지 못하셨다면 다행입니다.”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에리얼의 작은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입술이 닿아 있는 정수리에서도 자잘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움직일 때마다 특유의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스쳐 갔다.

익숙한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신 순간, 내내 베르트발드를 괴롭히고 있던 감정의 종말이 다가왔다.

걱정과 염려, 뇌리를 잠식하고 있던 고뇌와 언제고 튀어나올 채비를 마치고 있던 슬픔까지. 마음을 옭매고 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훌훌 흩어져 종적을 감췄다.

걱정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보고 싶었다. 많은 말들이 입 속에 떠돌다 목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다른 감정이 불쑥 솟아올랐다.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입 밖에 낸 순간 본 의미를 잃고 무언가로 규정될 것만 같은 그 마음을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베르트발드는 말 대신 행동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조심스럽게 등을 어루만지다가 선을 긋듯이 도드라진 등뼈를 쓸어내렸다. 다른 손으로는 모포 밖으로 드러난 뺨과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체온을 만끽했다.

“가, 간지러워요, 백작님.”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네.”

귓불을 조물거리던 손을 옮겨 하얀 뺨을 손가락으로 슬슬 쓸었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에리얼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향했다.

부끄러운 걸까. 베르트발드는 타이르듯이 등을 토닥거리며 에리얼의 턱을 살짝 치켜올렸다. 고개를 젖힌 뒤 그대로 에리얼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댔다.

열감이 느껴지는 살결이 황홀하리만치 부드럽게 입술에 달라붙었다.

“열은 없는데… 여전히 몸이 차갑습니다. 그러고 보니 식사도 계속 거르셨겠군요.”

“아… 그러고 보니까 엄청 배고프네요.”

에리얼이 서툴게 웃으며 베르트발드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배 위에 올렸다.

뭔가 싶어 베르트발드가 손을 빼내려던 찰나, 대담하게도 에리얼이 제 손으로 손등을 꾹 눌러 배에 밀착시켰다.

“배가 엄청 울려요. 아까부터 계속 꼬르륵거렸는데. 한번 만져보세요. 여기 계속 꼬르륵거리죠?”

말해놓고도 웃긴 듯 에리얼이 입가를 올려 활짝 웃었다. 보통은 부끄러워할 텐데 뭐가 재미있다고 웃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호한 눈길로 에리얼을 바라보던 베르트발드가 손을 쫙 펼쳐 배를 어루만졌다. 납작한 배 안쪽에서 그녀의 말처럼 간헐적으로 꼬르륵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손가락을 길게 뻗어 천천히 배를 어루만졌다. 손가락이 움직일수록 꾹꾹 눌러뒀던 욕망이 스멀스멀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두꺼운 재킷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말랑말랑한 여체가 솟구치는 음심에 부채질을 더했다.

“저기, 백작님. 이제 그만….”

민망해진 에리얼이 손을 밀어내려던 찰나, 베르트발드가 그녀의 턱을 붙잡아 올림과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종알거리며 말을 토해내는 입술 위로 젖은 입술을 포갰다. 까칠해진 그녀의 입술이 영 신경에 거슬린다. 부드러워지도록 혀를 내밀어 살살 빨면서 움찔거리는 작은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모포가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근육질의 상체가 에리얼의 몸을 제 덩치로 숨기며 거세게 옥죄어왔다.

뺨을 붙잡고 있던 손이 미끄러져 내려가 희게 드러난 허벅지를 쓸었다. 보드라운 살결을 음미하다가 재킷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얄팍한 허리를 지분거렸다.

갑자기 들이닥친 손길에 에리얼이 퍼뜩 몸을 떨었다.

“…으….”

이래도 되나? 밖에서 이래도 괜찮은 건가?

좋으면서도 싫은 기분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왠지 이건 아닌 것 같아 끙끙거리며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단단한 상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짓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베르트발드는 더욱 거칠게 입을 맞추며 에리얼을 탐했다. 한 손으로는 어깨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재킷 단추를 끄르며 에리얼의 입 속을 유린했다.

잘근잘근 깨물어 도톰해진 아랫입술이 자꾸 그의 시선을 앗아갔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가 사랑을 속삭이는 밀어 같았다. ‘좀 더 매달려봐요’, 입 안으로 속삭임을 흘려 넣은 뒤 힐긋 아래로 시선을 향했다.

처연할 정도로 가느다란 팔다리와 다르게 살집이 붙어 봉긋 솟아오른 가슴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보다 아래, 재킷이 바스락거릴 때마다 은밀한 곳이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내보이고 있었다.

무심코 손이 움직이려던 순간, 베르트발드가 인상을 찡그린 채 손을 미끄러트려 허리를 세게 부둥켜안았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과 함께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백, 작… 여, 여기서는 싫….”

“안 할 겁니다.”

무심코 입을 맞췄을 뿐 야한 짓을 하려는 의도는 일절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너무 매혹적이어서.

지나치게 예뻐서.

베르트발드가 에리얼의 아랫입술을 깨물며 ‘진심입니다.’ 하고 덧붙였다.

가슴을 들썩거리며 호흡을 가다듬던 에리얼이 고개를 젖혀 그와 다시 시선을 맞췄다. 흐릿한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붉게 달아오른 눈매가 그녀의 흥분을 알리고 있었다.

“백작님, 하아, 음흉하세요. 이, 일부러 그러시는 거 아니죠?”

“안 할 겁니다. 맹세코. 믿으십시오.”

“아니… 그게,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니고요.”

에리얼이 몸을 틀어 베르트발드의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두툼한 가슴팍에 열기 서린 뺨을 부비적거리다가 하아, 깊은 한숨을 토했다.

숨이 스친 자리에 아주 작은 목소리가 함께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여기서는… 싫다고 한 거예요.”

베르트발드는 어두운 시선으로 품속에 안겨 있던 요망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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