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믿기지 않는 광경에 쿠델라이야가 연신 눈을 깜박였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백금발 아래 진한 암청색 눈동자가 호기심을 품은 채 자신을 응시했다.
늘 완벽한 옷차림으로 시선을 끌던 그답지 않게 셔츠 윗단이 대충 풀어져 있었고, 세팅하지 않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평소와 똑같은 베르트발드였다. 그는 여전히 냉정하고, 평온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었다.
무심하게 시선을 던지는 그 얼굴. 그 위로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저분한 곳이라면 질색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새 취향이 바뀌셨나 봅니다.”
흘리듯 말하며 베르트발드가 곁에 서 있던 호위병들에게 명했다.
“찾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뒤이어 안에 들어서던 열댓 명의 호위병들이 저택 곳곳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뭔가를 부수는 듯 요란한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다.
소란의 주동자인 베르트발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다시 쿠델라이야에게 시선을 던졌다.
“전하께서 워낙 성정이 거친 분이신 줄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만, 설마 이런 식으로 저를 자극하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다만 일을 획책하시려거든 제대로 하셔야지 않겠습니까.”
쿠델라이야의 얼굴 위로 어두운 빛이 퍼져 나갔다. 베르트발드는 뒷짐을 진 채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길드에 익명으로 의뢰를 요청한 건 나름 머리를 쓴 것 같지만 대리인을 써서 의뢰를 하는 편이 안전했을 텐데… 애석하게도 전하의 유모는 거기까지가 한계인가 봅니다.”
서슬퍼런 시선이 흘깃 메를린을 스쳐지나갔다. 무감한 눈동자가 뭔가를 가늠하듯 메를린의 목 근처를 배회했다.
“수하로 부릴 사람은 가급적 머리가 똑똑한 사람을 고르시기 바랍니다. 주인도 멍청한데 수하까지 멍청해서야 일이 제대로 굴러가겠습니까.”
“베리! 어떻게 그런 말을…!”
“됐고. 부인은 어딨습니까?”
말을 자르며 베르트발드가 주변을 휘이 둘러보았다.
지저분한 주방, 카드와 잡동사니가 널려있는 낡은 테이블, 어두침침한 지하 계단. 어느 곳에서도 사람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쿠델라이야에게 향한 그의 얼굴은 방금 전보다 더욱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설은 됐고 부인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주십시오. 바로 대답해주신다면 목숨은 살려드리겠습니다.”
“하, 목숨이라니…!”
“쓸데없는 말로 시간 끌 생각 마십시오. 도우러 올 사람 없습니다.”
베르트발드가 포켓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는 재촉하는 눈빛을 숨기지 않은 채로 다시 쿠델라이야를 바라보았다.
“릭토르들의 근무 시간도 준수해야 하니 1분 안으로 부인의 위치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1초라도 늦으면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에 희미한 날이 서려 있었다. 늘 정중하고 예의바른 태도로 황녀를 대하던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잔뜩 굳어 있던 쿠델라이야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거야? 나를? 베리, 아무리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해도 용서할 수 있고 아닌 게 있어!”
집정관이고 뭐고, 베르트발드는 그저 백작일 뿐 황녀인 쿠델라이야의 신분에 한참 못 미치는 자다. 그런 그가 릭토르를 이끌고 자신을 죽이겠다 협박하고 있다.
감히, 황제의 딸을.
제국의 가장 위대한 핏줄을. 아무리 쿠델라이야가 그에게 관대하다 해도 이건 도가 지나쳤다.
“감히 제국의 황녀를 겁박하다니! 그대가 황권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인가? 어디 한번 건드려 봐! 이런 식으로 나를 도발하려다가는 아버지가 그대를 가만두지 않을테니까!”
“…황제 폐하.”
“그러니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내게…!”
“후회? 누가 후회를 합니까?”
천연덕스레 날아온 물음에 쿠델라이야가 말을 흐리며 주먹의 힘을 풀었다. 그녀의 협박에도 베르트발드는 웃는 듯 마는 듯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무슨 꿍꿍이일까. 의구심을 파악한 듯 베르트발드가 조소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정세에 어둡단 말씀은 전해들었습니다만 이런 것도 가르쳐드려야 하나 답답할 지경입니다. 설마 폐하께서 진심으로 수석 집정관을, 저를 쥐락펴락할 수 있을 거라 여기시는 겁니까.”
“무… 슨 말이야.”
“그 잘난 황권이 유지되는 데에 누구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다 생각하십니까.”
베르트발드가 눈을 낮춰 돌바닥을 바라보았다. 반들반들하게 닳은 돌바닥 위로 쿠델라이야의 실루엣이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흐린 인영 속에 비친 일그러진 표정이 그녀의 추악한 본심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평민들은 마스코트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수도의 상징 제라늄. 황실의 수호자 흰 비둘기. 그런 겁니다. 정치력 없는 황제를 표상으로 치켜세우는 것도 모두 정치의 일환입니다. 전하께서 사는 곳, 먹는 것 입는 것… 모두 어디서 나오는 것 같습니까? 설마 아무 생각 없이 공주 노릇을 하며 살아온 건 아니시겠지요.”
“무슨, 무슨…!”
“이런. 반응을 보니 제 추측이 맞나 보군요. 뭐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1분 지났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르트발드가 옆에 서 있던 바이온의 뒷춤으로 손을 뻗었다.
바이온이 뭔가 제지하기도 전에, 그가 은빛 리볼버의 안전 장치를 풀고 쿠델라이야를 조준했다.
어리둥절한 그녀의 얼굴이 가늠쇠 위로 어른거린다. 베르트발드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리볼버를 겨냥한 채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부인 어딨습니까.”
“나, 나, 나는 모른다고…!”
타앙-!
쿠델라이야의 머리 위, 레이스와 리본으로 치장한 하얀 모자가 처참하게 찢겨져 나풀나풀 바닥으로 떨어졌다.
굳어버린 쿠델라이야의 의식 너머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이런… 얼굴을 노렸는데 빗나갔군요. 아쉽게도 저격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 그…!”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부인 어디에 숨겼습니까.”
“나, 나는 모… 모, 모르….”
“우리도 몰라! 하녀와 함께 도망쳤다고 했단 말이야!”
쿠델라이야를 막아서며 메를린이 절규하듯 외쳤다.
베르트발드의 눈빛에 잠시 흥미가 서렸지만 이내 김빠진 숨을 픽 내뱉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전하께서 개 한 마리는 참 잘 키우신 것 같습니다.”
-탕!!
메를린의 스커트 옆에 휭, 바람 구멍이 났다. 베르트발드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앙, 탕!
스커트 반대쪽과 어깨 위, 부풀어 있던 퍼프 양쪽이 너덜너덜하게 찢겨졌다.
당차게 앞을 막아설 때는 언제고 메를린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달달 떨다가 천천히 아래로 허물어졌다.
뒤에 서 있던 쿠델라이야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망가진 것처럼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말하지 않으면 죽는다. 정말 죽일 거야.
죽음이 그녀의 눈가를 어른거리다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베르트발드는 기절한 메를린을 힐끗 쳐다본 후 쿠델라이야에게 시선을 옮겼다. 푸른 눈동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갛게 그녀를 투영하고 있었다.
“자꾸 빗나가는군요. 한 발 남았습니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겁니다.”
총구가 쿠델라이야의 미간을 노리며 허공에 멈춰섰다. 베르트발드는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마지막입니다. 어딨습니까.”
“허, 허억, 헉, 우리, 우린, 모, 모르….”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서 베르트발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에리얼만 찾으면 황녀야 중요한 건 아닌데….
입장이 조금 곤란해지긴 하겠지만 딱히 죽여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저 귀찮은 면상을 볼 필요가 없다는 것도 꽤 매혹적이고.
황제가 적으로 돌아서면 상단을 꾸려서 남쪽으로 도망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집정관도 때려치우고 싶었고 영지 일도 귀찮았는데, 에리얼과 같이 남쪽 섬에서 느긋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파하르의 저택을 에리얼이 좋아했지. 남쪽… 라핀 공국이 살 만하다고 들었는데.
제국과 사이는 안 좋지만 집정관인 자신에게는 꽤 호의적인 나라였다. 그냥 망명했다고 하고 제국 기밀을 전부 넘겨버리면 라핀에서도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음.”
고민하던 베르트발드가 눈가를 살짝 찡그린 채 펼쳐두었던 생각들을 정리했다.
그럼 저 여자를 죽이고 황궁에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에리얼을 찾아내서 바로 남쪽으로 떠나야겠다.
가신들과 사용인들은 같이 갈 사람만 추려내고, 나머지는 셰인에게 뒤처리를 맡기면 될 테지. 돈이야 집사인 레오 명의로 관리하고 있으니 괜찮을 테고….
레오에게 바로 서신을 보내서 라핀 북부에 살 만한 저택을 미리 구입하라고 하는 게 좋겠다. 아이기스 공작과 멀어져서 슬프겠지만 어차피 자신이 옆에 있으니 외로울 일은 없을테지.
눈 깜짝할 사이에 망명할 계획을 마친 베르트발드가 후련한 기분으로 다시 황녀를 조준했다.
그때였다.
“죽이면 안 돼요!”
부엌 근처에 놓여져 있던 오크통에서 쑤욱, 머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난데없는 출현에 베르트발드가 반사적으로 총구를 돌렸다.
그렇게 방아쇠를 당기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손가락에 저항감을 심었다.
“으! 배, 백작님! 저예요, 저! 에리얼!”
얼음처럼 굳은 베르트발드의 시야 속으로 음식물 쓰레기에 절어 있는 여자의 얼굴이 들어찼다.
오크통 밖으로 반쯤 튀어나온 상체는 바싹 말라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오렌지의 하얀 속껍질과 밀가루 반죽이 뒤엉킨 채 검은 머리카락에 잔뜩 눌어붙어 있었고, 새하얀 슈미즈는 빨간 물에 젖어 비위생적인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었다.
무자비할 만큼 더러운 여자였다. 손사래를 치던 여자가 천천히 손을 아래로 떨궈 제 얼굴을 드러냈다.
연신 깜박거리는 잿빛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겉피를 싸고있던 더러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졌다.
“…에리얼.”
베르트발드가 총을 바닥으로 내던지며 그녀에게로 발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