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에리얼은 벽에 바짝 붙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갇혀 있던 방에서 두 번째로 떨어진 방. 분명 이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당겨 봤지만 안쪽에서 문이 잠겨 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낮게 몸을 웅크린 채 문고리 근처에 귀를 갖다 댔다. 귀를 기울이자 말 대신 욱욱거리며 말이 되지 못한 신음 소리가 귀 언저리를 맴돌다 사라졌다.
직감적으로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자신과 비슷하게 끌려온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누구일까. 비에타라면 다행인데….”
주머니에서 머리핀을 꺼내 들고 아까처럼 서너 번 쑤셔대자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에리얼은 웅크린 몸을 펴고 소리 죽여 방 안에 들어섰다.
먼지가 부옇게 쌓여있는 휑한 방. 모서리에서 비라도 새는 건지 곰팡내가 폴폴 풍겨왔다.
벽을 장식하고 있는 두 개의 창문,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 자신이 갇혀 있던 방과 구조는 똑같았다.
다만 방구석에 팔다리가 결박된 채 쓰러져 있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점이 달랐다.
“으응! 으웁!”
회색빛 인영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끙끙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아마도 입이 막혀 있는 듯했다.
에리얼은 가까이 다가가 코를 킁킁거렸다.
우유 배달집의 아가씨라서 그런 건지, 단순히 우유를 좋아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비에타에게는 유난히 버터 밀크향이 진하게 풍겼다.
그리고 역시나. 은은한 버터 밀크향 사이로 비에타가 늘 주머니에 들고 다니는 민트 사탕 냄새가 화악 코를 자극했다.
에리얼은 그림자에게 바짝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비에타. 나야, 에리얼.”
“응, 으으읍! 으읍으으읍!”
“풀어줄 테니까 조용히 있어야 돼. 알겠지?”
“으읍!”
입을 묶고 있던 천을 풀자 비에타가 휴우우, 긴 숨을 내쉬었다. 에리얼은 손을 더듬어 팔다리를 묶고 있던 밧줄도 풀어냈다.
몸이 자유로워진 비에타가 에리얼을 덥썩 끌어안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네요. 마님은 괜찮으신 거예요? 어디 다치신 데 없어요?”
“응. 멀쩡해. 난 묶어놓지도 않았어. 아마 앞이 안 보인다고 생각해서 그랬나 봐.”
“그, 그랬어요? 그런데 어떻게 나오셨어요?”
“다 방법이 있어.”
에리얼이 씨익 웃으며 비에타의 몸을 일으켰다.
“도망치자, 비에타.”
잔뜩 겁먹은 비에타와 달리 에리얼은 일부러 여유로운 몸짓으로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두렵고 무서웠지만 내색할 수가 없었다.
내색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질질 짜고 앉아 있어 봤자 구하러 오는 사람은 없다. 희망보다 체념에 익숙하다는 건 슬프지만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꽤 효율적이기도 했다.
지금은 냉정해질 때였다. 에리얼은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올려 조용히 하라 이르고 비에타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일단 신발 벗어. 응. 양말도. 스커트도 벗고.”
“마, 마님처럼 다 벗으라고요?”
“슈미즈만 남기고 다 벗어. 거추장스러운 건 전부 다.”
좋은 생각이 있어, 속삭이며 에리얼이 비에타를 재촉했다. 비에타는 망설이다가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지시에 따랐다. 풀썩, 옷 벗는 소리를 귀에 담으며 에리얼은 창살에 희끄무레하게 비치는 그림자를 통해 해의 위치를 가늠했다.
시간이 되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두 사람은 살금살금 까치발을 들고 복도로 향했다.
* * *
쨍하니 밝은 빛을 뿌리던 태양이 어느새 노란 황금빛으로 세상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황궁의 하얀 벽도 노을에 잠겨 금을 바른 것처럼 노오란 색을 뿜어냈다.
빛이 내리쬐는 3층, 황녀의 방.
물결무늬가 부조된 화려한 창틀 위, 턱을 괸 채 수도를 내려다보고 있던 쿠델라이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돌렸다.
“그 여자를 잡았다고?”
메를린이 함박웃음을 띤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세월의 흔적과 같은 팔자 주름이 노을빛에 반사되어 평소보다 짙은 음영을 그렸다.
“예. 제가 말씀드렸지요? 아이기스 소공작과 공녀 자매가 워낙 애틋한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요. 소공작의 명의를 위조해 공녀를 끌어냈지요.”
“세상에… 역시 메를린이야! 지금 어디 있어?”
“북쪽 슬럼가에 미리 준비해둔 저택이 있어요. 거기에 가둬놨습니다. 수면초를 썼더니 정신을 못 차리더랍니다.”
갑작스러운 희소식에 방실거리던 쿠델라이야가 안색을 바꿔 물었다.
“백작가랑 공작가는? 꼬리가 밟히면 안 되는데.”
“아휴, 제가 그런 것도 모를까 봐요. 어젯밤부터 백작이 수배령을 내리긴 했다던데… 세림 분수가 워낙 사람이 많잖아요. 목격자를 찾는 데만 해도 일주일은 걸릴 거예요. 저택도 마차도 전부 다른 사람 명의니까 절대 찾아낼 수 없을 거라 장담합니다.”
하긴, 지저분한 일에는 도가 튼 메를린이다. 쿠델라이야는 자신을 위해서 온갖 더러운 짓을 마다않는 유모를 보고 감동에 휩싸였다.
흡족한 얼굴로 그녀가 양팔을 벌렸고, 메를린은 더욱 짙은 웃음을 흘리며 황녀와 포옹했다.
“잘했어, 메를린. 당장 마차 준비해. 황궁 표식이 없는 단순한 마차로. 어떤 꼴로 울고 있는지 내 눈으로 봐야지.”
“아유, 직접 그러실 필요 없는데요. 가둬 둔 곳이 워낙 지저분한 곳이라서요. 전하께서는 그냥 명령만 내려주세요.”
“아니야. 내가 보고 처우를 결정할 테니까.”
빨리 준비해. 명이 내리자마자 메를린이 다른 시녀와 함께 외출 준비에 나섰다. 쿠델라이야는 외출용 장갑을 꺼내며 음흉한 웃음을 떠올렸다.
일단 그 거추장스러운 흑발을 싹둑싹둑 잘라버려야지.
질질 짜면서 사과하는 꼴도 보고 싶고… 뭐 납작 엎드려서 빌면 용서해 줄까.
그래봤자 죽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마차로 걸음을 옮기며 쿠델라이야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공녀를 처치한다고 해서 베르트발드의 마음이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단순한 화풀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다른 사람도 가질 수 없어야 했다. 이건 황녀의 긍지를 지키는 정의로운 일이다.
“바보 같은 베리. 진작 내게 왔으면 좀 좋아.”
저택으로 이동하는 동안 쿠델라이야는 창밖을 바라보며 베르트발드에 대한 회고에 잠겼다. 그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쿠델라이야의 마음을 흔들어놨다.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뭐라고 했었더라.
얼굴에 홀려 자신답지 않게 평소에는 하지 않을 싸구려 언사를 지껄였던 것 같았다. 분명….
「나는 당신을 사생아라고 폄하하지 않겠어요.」
불쾌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베르트발드는 웃음을 터트린 뒤 부드럽게 속삭였다.
「황녀 전하께서는 연치가 적으심에도 무척 개방적이시군요. 향후 성장하실 날이 기대됩니다.」
교양 없는 말을 지껄였음에도 그렇게 우아하게 받아치는 자세라니. 외모나 행동도 완벽했지만 온몸에서 풍기는 지배자의 아우라가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쿠델라이야는 동화 속 왕자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데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시니컬하고 현실적인 그녀에게 남자란 예쁜 여자를 쫓아다니는 본능적인 짐승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시종일관 우아하고 빈틈없는 태도로 사람을 대하며 여지를 주면 줬지 누군가에게 얽매이는 법이 없었다.
어쩜 그렇게까지 완벽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만큼 완벽한 남자였다.
쿠델라이야는 오랫동안 그를 관찰하며 그가 완벽한 이유를, 그에게 끌리는 이유를 찾아냈다.
그는 동류였다.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해 쟁취해내고야 마는 그 성격.
그게 도덕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목표하는 것을 반드시 손에 거머쥐어야 하는 맹목적인 기질. 그의 성격을 알아낸 순간 쿠델라이야는 환희에 휩싸였다.
끌릴 수밖에 없지.
이렇게 닮았는걸.
그조차도 모르는 그의 본성을 쿠델라이야는 알고 있었다. 규범, 도덕, 법률, 정해진 틀 안에서만 움직이는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성격을 이해할 수 없다.
오직 동류만이, 쿠델라이야만이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와 자신은 완벽한 한 쌍이었다.
…그런데 왜.
운명의 짝을 눈앞에 두고 그는 바보 같은 선택을 한 걸까.
일부러 나를 도발하는 거지.
이런 것도 다 당신의 계획의 일부였을까? 일부러 다른 여자를 선택해서 내 마음을 옭아매려고 하는 거겠지.
만약 그렇다면….
“기꺼이 맞춰 줄 테니까.”
빙긋 웃으며 바깥으로 시선을 향했다.
어느새 마차가 멈춰 섰다. 메를린이 문 앞에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쿠델라이야는 조심스레 마차 밖으로 나와 저택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정원에 발을 디딘 순간.
그녀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미소가 어느새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오래 묵어 찐득찐득한 땟자국, 하얗게 뜬 지붕. 돌로 지어진 건물은 슬럼가 특유의 음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외벽에 쌓여 있는 커다란 오크통과 찢긴 채로 나부끼는 커튼, 끼익거리는 철문. 설마 이런 곳에 사람이 살까 싶을 만큼 관리되지 않은 저택이었다.
쿠델라이야는 미간을 찡그린 채 부채를 펴 입을 가렸다.
“더러워.”
공녀를 혼쭐내기 위해 찾아오긴 했지만 막상 미관을 보니 한 발자국도 들이기 싫을 만큼 더럽고 끔찍했다.
황성과 별저에서만 생활하던 쿠델라이야에게 이렇게 지저분하고 천박한 장소는 면역이 없었다.
윽, 저 까만 건 뭐야.
먼지가 쌓이면 저렇게 되나?
정원에 물웅덩이 봐… 어쩜 이렇게 지저분할까.
한 걸음, 한 걸음 현관에 가까워질 때마다 쿠델라이야의 미간이 점점 더 좁혀들어 갔다.
불쾌한 감정은 현관문에 다다른 순간 절정에 달했다.
세월이 흔적이 묻어나는 문손잡이. 손잡이 가운데에 시커먼 손때와 녹슨 자국이 합쳐져 더러움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쿠델라이야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메를린! 돌아가야겠어!”
“전하. 기왕 오신 거 공녀를 보고 가시지요….”
“그러면 적어도 문은 열어놔야 할 거 아니야! 세상에. 여기 너무 더럽잖아!”
메를린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그 뒤로 ‘메를린, 나 만지지 마.’ 하는 황녀의 냉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귀하신 몸이기에 이렇게 유난을 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메를린은 다정한 어조로 그녀를 다독였다.
“제가 그래서 오지 말자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렇게까지 불쾌한 곳일 줄은 몰랐지!”
메를린이 입 안쪽을 세게 깨물고 억지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성격에 면역이 될 만큼 됐다고 생각했는데 오판인 것 같았다.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찾느라 여기밖에 선택지가 없었답니다. 조금만 참으시지요.”
달래는 어조에 쿠델라이야가 입꼬리를 아래로 끌어 내리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저택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