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시니컬해 보이는 미소였지만 그에게 익숙한 바이온은 미소에 담긴 온후한 감정을 읽고 잔잔한 웃음을 떠올렸다.
“부인께서 어떤 선물을 사 오실지 궁금하군요.”
“그러게 말일세. 뭐가 됐든 기쁘게 받겠지만… 아, 잠시.”
천장이 탁 트인 홀을 가로지르려던 순간, 베르트발드가 바이온의 팔을 붙으며 턱짓으로 옆쪽의 회랑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돌아가야 해.”
“가로지르는 게 빠릅니다만.”
“에리얼이 새를 조심하라고 하도 잔소리를 해서. 특히 의회에서는 절대 새 있는 곳으로 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더군.”
“…어라. 부인께서 펠만과 만난 적이 있으시던가요?”
“글쎄. 똑같은 얘기를 하길래 무슨 일인가 했는데. 서로 뭔가가 통했나 보지.”
별것 아닌 이야기들을 나누며 베르트발드와 바이온이 홀을 빠져나왔다. 이윽고 입구로 통하는 거대한 회랑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평선에 걸쳐 있던 해가 산 뒤편으로 넘어가더니 이내 자취를 감췄다.
낮과 밤이 혼재하는 시간. 짙은 노을이 회랑에서부터 붉은 길을 만들어냈다. 그 붉은 길의 끝에서 익숙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주님!”
빌헬름이었다.
이 시간, 이 장소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였다. 다른 이도 아닌 빌헬름이 자신을 찾아 직접 이곳까지 오다니. 불안한 예감밖에 들지 않았다.
그 불안감은 사색이 된 빌헬름의 표정을 마주한 순간 확신이 되었다.
“마, 마님께서 지금….”
베르트발드는, 에리얼이 외출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전언을 받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 * *
…춥다.
눈을 뜬 순간, 에리얼이 처음 느낀 감각은 춥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늘하게 몸을 옥죄는 감각은 그저 춥다고만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어딘가 음울한 감정이 잔뜩 도사려 있는, 심리적인 한계가 느껴지는 공간에 자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몸을 들어 올렸다. 여러 겹으로 겹쳐 보이던 시야가 이내 선명해지고 어두운 방 안의 전경이 비쳤다.
그다지 넓지 않은, 폐쇄된 공간 구석에 테이블 한 개와 쓰러진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찬기가 느껴지는 돌바닥과 그와 같은 재질의 벽이 온기를 전부 앗아갈 것처럼 서늘하게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돌바닥과 돌벽. 익숙한 촉감이다.
요 근래 얀셀가의 저택에 익숙해져서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에리얼이 살아온 북부의 아이기스 성은 돌로 만들어진 오래된 고성이었다.
반들반들하게 닳아 옅은 반사광을 뿌리는 모서리와 돌 특유의 습한 냄새….
몸의 기억이란 무섭다. 낯선 장소임에도 묘한 그리움과 반가움이 느껴져 에리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돌바닥을 슬슬 쓸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이래서 습관이 무섭구나.”
정신 차려야지, 호다닥 자리에 앉은 에리얼이 다친 곳은 없는지 이상한 점은 없는지 몸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머리가 좀 어질어질한 게 어딘가 부딪힌 듯싶었다.
에리얼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기억을 더듬었다.
“비에타랑 같이 세담 분수에서… 음. 거기까지는 아무 일 없었는데.”
분수 근처에서 그웬이 보냈다던 마차를 찾다가 별생각 없이 편지를 꺼냈다.
편지 봉투 속, 편지를 봉해놨던 실링 왁스를 만지작거린 순간. 그때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리얼은 쯧 혀를 차며 무릎을 탁탁 두드렸다.
“그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아이기스 가문의 인장.
시각이 둔한 만큼 촉각이 예민한 에리얼이다. 분명 익숙한 인장이었는데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인장 테두리가 이렇게 굵었나? 매일 발주하던 실링 왁스와는 감촉이 너무 다른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버렸다. 이런 일에는 감이 좋은 에리얼이니만큼, 그때 돌아갔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때마침 마부라는 사람이 와서 자신들을 구석의 마차로 이끌었다.
그렇게 마차에 올라선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강하게 몸을 압박하며 젖은 수건을 입에 댔다. 향수를 뿌린 듯 젖은 수건에서 강렬한 냄새가 밀려 들어와 콧속을 괴롭혔다.
축축한 풀 내음, 물비린내와 생강이 섞여 있는 듯한 기이한 냄새.
예지몽을 고친답시고 주술사들에게 시달려왔던 에리얼에게 무척 익숙한 냄새였다.
“맞다! 그거. 분명 수면초 냄새였어.”
머리가 아픈 게 그거 때문이었구나.
마부, 수면초를 적신 수건. 아마 자신을 끌고 온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끌고 왔을 것이다.
뭘 노리는 걸까.
아버지의 힘? 아니면 백작님일까?
돈이 목적일 수도 있겠지. 내게 가치라고는 그 정도뿐일 테니.
…비에타.
비에타는 괜찮을까.
무사해야 할 텐데….
생각이 미친 순간 에리얼이 조심스레 구두를 벗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주변을 탐색했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별다른 소리도 없는 걸 보니 이 근방에는 자신뿐인 것 같았다. 아마도 앞이 안 보일 거라는 생각에 보초도 세워두지 않고 허술하게 내버려 둔 모양이었다.
단단히 잠긴 문, 두 개뿐인 창문도 걸쇠로 잠겨 있었지만 어떻게 애쓰면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리얼은 문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까부터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졌는데. 상황을 정리해보니 그 기시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거, 기억 속의 그때랑 똑같은 것 같은데.”
성인식 이전, 이와 비슷하게 납치된 적이 있었다.
자세히 떠오르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고압적인 태도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느낌만은 선명했다. 떠올린 순간 왠지 소름이 돋아 에리얼이 팔뚝을 슥슥 훑어내렸다.
제멋대로 감금하더니 며칠 뒤 제멋대로 풀어준 이상한 사람. 대체 왜 자신을 끌고 간 건지, 왜 다시 풀어준 건지 이유라도 알면 좋으련만 안개를 뿌린 것처럼 대부분의 기억들이 뿌옇게 흐려져 또렷하게 기억나는 게 없었다.
별다른 해코지 없이 갇혀 있었지만 그때 느낀 무력감은 지금도 에리얼의 뇌리 한구석을 좀먹고 있었다.
…아니. 지금은 그때와 달라. 그때는 어렸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주먹을 꽉 쥐며 상념을 떨쳐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나가는 것만 생각하자.
생각을 정리한 뒤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에리얼은 창가로 가서 지금 갇혀 있는 곳이 지하인지 지상인지 살폈다.
그다지 높지 않은 층수임을 확인하고 머리에 꽂혀 있던 머리핀 하나를 뽑아냈다. 머리핀을 쳐다보는 에리얼의 눈이 예리하게 반짝였다.
“…좋아. 해보실까.”
대부분 에리얼을 처음 본 순간 그녀가 장애로 인해 늘 집에만 갇혀 있던 가엾은 요조숙녀라고 추측하곤 한다. 이 조용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공녀가 제멋대로 바깥을 활보하던 왈가닥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북부의 아낙들은 갓난아기를 업은 채 갈퀴로 산적 하나쯤은 우습게 때려잡는 인종들이었다. 화이트룩의 땅이자 전사들의 혈통인 북부 여자라면 저녁 사냥감 정도는 스스로 마련할 줄 알아야 했다.
에리얼이 태어난 땅은 그런 곳이었다. 과격함을 따지자면 그녀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마 베르트발드는 에리얼이 들고 다니던 하얀 지팡이가 원래 산토끼 사냥용으로 만들어진 피어스라는 사실은 죽었다 깨도 모를 것이다.
에리얼은 능숙한 손길로 머리핀을 잠금쇠 안에 쑤셔 넣었다. 밖은 위험하다는 아버지의 잔소리 때문에 허구한 날 방에 갇혀있어야 했던 에리얼이었다.
물론 얌전히 방에 갇혀 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머리핀과 시침핀, 코바늘. 셋 중 하나라도 있으면 에리얼은 어느 문이든 딸 수 있었다.
“어디… 조금만 더.”
소리 나지 않게 문고리를 꼭 붙들고 진지한 얼굴로 머리핀을 휘저어댔다. 이윽고 달캉,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다시 바닥에 엎드려 귀를 기울였다. 소리 없이 약한 진동이 뺨을 통해 전해져왔다. 이 층에는 사람이 없지만 아마 아래층에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에리얼은 몸을 낮춰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창 모양으로 내려앉은 햇살이 어두운 복도 중간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어딘지 침침한 구석이 느껴지는 햇빛, 아마도 해 질 녘 무렵인 것 같은데.
분수대 근처에서 마부를 만난 시간이 정오쯤이었으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아, 아니다.
만약 수면초를 먹고 잠들었다면… 적어도 반나절 이상은 잠들었을 텐데.
생각을 증언하는 것처럼 배 안쪽이 꼬르륵거리는 게 느껴졌다.
“으… 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나 봐.”
다시 문 안쪽으로 들어온 에리얼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꿨던 꿈, 그 예지몽.
긴가민가했는데… 이 상황을 알려주는 거였을까.
에리얼은 천천히 눈을 감고 꿈을 떠올렸다.
버터를 넣어 고소한 향기가 폴폴 나는 따끈한 감자, 크림소스를 곁들인 연어 스테이크. 옆에는 깍지콩 샐러드….
아니, 아니야.
꿈을 떠올려야지. 먹는 것 말고!
배를 쓰다듬으며 다시 생각에 잠긴다. 예지몽은 다른 꿈들과 다르게 뇌 속에 달라붙은 것처럼 아주 선명하게 기억나는 터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해가 저물어 그림자가 발치에 이를 만큼 아주 짧아진 순간.
자물쇠를 따고 누군가가 들어온다. 아마도 남자 둘. 그들에게 끌려가 지하로 내려간다.
그때 보였던 이 장소의 구조….
에리얼은 떠올린 기억들을 조각내 페이지를 넘기듯 한 장면, 한 장면을 곱씹기 시작했다.
복도를 우회해서 방 두 개를 지나치면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고 다시 왼쪽으로 이동, 끝에서 오른쪽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1층에 도달한 순간 오른쪽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금방 오실 테니까 지하에 가둬 놔.」
그 뒤로 발소리 하나 더. 이쪽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지하로 내려가기 전, 왼쪽 방에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린다. 플래시, 투 페어, 카드 게임을 하는 남자들의 목소리. 웃음소리. 서로 다른 무게의 발소리. 어림잡아 네 명에서 다섯 명.
지하에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이 건물 안에 사람은 열 명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라.”
생각을 멈추고 후다닥 문으로 다가가 귀를 붙였다. 돌로 만든 건물답게 층고가 높고 조용해 작은 소리도 크게 울렸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누군가의 목소리. 가늘고 엷어서 귀 기울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놓쳐버릴 것만 같은 목소리.
아마도… 여자.
“비에타가 여기 있나?”
창가로 다가가 그림자의 길이를 확인했다. 네 뼘 정도의 작은 그림자가 발 근처에 어른거린다. 남자들이 오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질질 끌리는 스커트를 벗어 던지고 목을 장식하고 있던 리본을 풀어내 머리를 질끈 동여맸다.
구두는 이미 벗어뒀으니까 발소리는 안 나겠지.
에리얼은 은밀히 몸을 움직여 복도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