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삼백 명의 원로원 전부가 참석하는 대회의는 보통 일주일 내외로 끝이 난다.
대회의에서 제안된 법안은 다시 주요 원로원 백 명이 참석하는 센츄리온에 의해 재논의되고, 확정 및 제정된 법안들을 세 집정관이 가결, 부결을 내리는 순서로 의회가 끝을 맺는다.
의회는 보통 보름이면 끝나지만 베르트발드의 업무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가결된 법안과 부결된 법안을 나눠 정리한 다음, 바뀌는 법안에 대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물론 이런 세부적인 일은 법무관과 행정관의 일이었지만 최종 결정을 내리는 입장에서 허투루 살필 수는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부결된 법안도 타당성을 확인해 내년도 의회에 다시 재결을 올릴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제국이 전쟁 중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일까. 전쟁이라도 터지면 아예 전장으로 떠나 있어야 하니 그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져 베르트발드는 찡그린 미간을 살짝 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해서 눈앞의 서류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베르트발드는 서류를 건성으로 훑으며 펜으로 잉크통을 톡톡 두드렸다.
“법무관님.”
“예?”
처리가 끝난 서류들을 바닥에 늘어놓던 펠만이 퍼뜩 고개를 들어 베르트발드를 쳐다보았다. 이름이 아닌 법무관으로 자신을 부르는 경우는 한 가지뿐이었기에 펠만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목을 세웠다.
그리고 역시나.
“여기 계량 치수, 내가 보고받았던 건 42피트로 기억하는데 여긴 왜 40피트로 기재되어 있을까.”
“…어… 그럴 리가요…?”
“올해부터 기준 수치가 바뀌었는데 잊어버렸나 보군. 기본 전재부터 틀렸으니 하위 서류도 전부 폐기해야겠어. 이거 수정해서 다시 올리게.”
사색이 된 펠만의 얼굴 뒤로 하얗게 뜬 행정관들의 얼굴이 줄을 이루었다.
베르트발드는 펜을 들어 서류에 길게 X자를 그린 뒤 오른편에 놓여 있던 서류로 손을 뻗었다.
“이것도 아까부터 위화감이 든다 했더니… 이 부지는 개발 불가능한 땅이야. 노만쉐우드의 부지는 제국령이 아니라 황실령으로 귀속된 지 오래지. 공공시설이 들어서 있기는 해도 엄연히 황실 부지로 임대료를 납부하고 있고, 황실의 명 없이 함부로 개발할 수 없어. 오래전 일이라 서류가 미비한 건 이해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면 어떻게 하나.”
“그, 확인하긴 했는데… 죄송….”
“이것도. 이쪽 해안은 절벽이 너무 가팔라서 군 거점항으로 쓸 만한 견적이 나올 리가 없는데. 적어도 갤리온 백이십 척은 정박해둘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수치로 그게 가능할까?”
“그,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의회에서 가결되긴 했지만 실현 불가능한 부분이니까 이렇게 길게 세부 기획서까지 짤 필요 없었을 텐데.”
“그게 말입니다. 지칼덴 원로께서 분명 올해 안으로 추진될 사항이라고 강하게 요청하시는 바람에.”
“자네 상관이 지칼덴인가, 아니면 나인가.”
서늘한 음성에 펠만이 입술을 말아 물며 바닥으로 고개를 떨궜다.
베르트발드는 표정 없는 얼굴로 펠만을 바라보다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제안에 귀 기울이는 태도는 아주 바람직해. 다만 내가 지적하는 본질은 공리 공익에 입각해 생각을 전개해야 한다는 거지. 봐. 어딜 봐도 이득 없이 손해만 보는 사항 아닌가. 원로원이야 실무를 잘 모르니 가결한다 쳐도 실무자들마저 가결안에 아무런 의심 없이 그러려니 하고 따라가면 곤란해.”
베르트발드는 담담한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쏘아붙이며 연신 X자를 그려댔다. 작게는 단락 하나에 X자를 그릴 때도 있고 서류 전체에 X자를 그려 댈 때도 있었다.
펠만은 고개를 푹 숙이고 죄지은 어린 양처럼 그의 잔소리가 끝나길 기다렸다.
“여기까지. 다시 수정해서 내일 오전 중에 책상 위에 올려두도록. 나머지 서류도 갖고 가서 다시 재검토해. 재검토도 내일 오전까지 기다려주지. 그래놓고도 틀린 부분 보이면….”
베르트발드가 입을 다문 채 펜 뒷부분으로 입술 사이를 꾹 눌렀다.
서류를 노려보던 시선이 천천히 행정관들의 면면으로 이동했다. 행정관들은 뒷말을 듣지 않았음에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픈 건지 곧장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행정관들이 기운 빠진 얼굴을 한 채 서류를 모두 거둬 갔고, 마지막으로 펠만이 바닥에 깔아놨던 서류들을 추스르며 우울한 얼굴로 집무실 문고리를 잡았다.
방을 나서려던 펠만을 배웅한 건 베르트발드가 아니라 그의 곁에서 집무를 돕고 있던 호위관 바이온이었다. 바이온은 문 밖에 서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백작님께서 요즘 좀 심기가 불편하셔서 그러시니 법무관도 이해하십시오. 오래 가진 않을 겁니다.”
“의회에서는 멀쩡하시던 것 같았는데.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엄청 예민하신데요.”
바이온은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살피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이번 분기를 끝으로 집정관 직을 내려놓으시려는 것 같습니다.”
입을 떡 벌리고 있던 펠만이 벙끗거리다가 가까스로 외쳤다.
“네? 집정관 직을 내려놓다니 그게 무슨 헙!”
가까스로 펠만의 입을 막은 바이온이 검지 손가락을 올려 쉿, 쉿 하며 침묵을 종용했다. 장난으로라도 퍼져나가서는 안 되는 말이었고 베르트발드가 듣기라도 하면 더더욱 곤란했다.
뜻이 전달되었는지 펠만은 진지한 얼굴로 바이온에 맞춰 목소리를 죽였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계속 재임하시면서 천년만년 독재자처럼 사실 것 같은데요.”
“저도 그냥 추측입니다만, 머지않아 수도 활동은 모두 정리하고 아예 영지로 내려가실 것 같습니다.”
“아니… 왜 그런… 왜요…?”
백작의 영지인 파하르가 중요한 곳인 건 알지만 그렇다 해서 집정관을 내려놓을 필요는 없었다.
파하르는 백작의 보좌인 셰인 비체가 대리 역으로 잘 꾸려가고 있었고, 원로원은 황실과 균형을 이루는 베르트발드의 수완을 높이 사 재임을 바라고 있었다.
이대로 이견이 없는 한, 그는 계속해서 집정관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리 명문가 출신의 귀족이라 해도 집정관까지 도달한 자는 손에 꼽는다. 거기에 군사권까지 지닌 수석 집정관은 더더욱.
그런 명예직을 제 발로 걷어차다니 제정신이 아니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뭐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백작님께서는 차기 집정관으로 법무관을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를요?”
“그러니 그렇게 혹독하게 가르치려는 거겠죠. 실수하지 않도록.”
“그, 그게 말이 돼요? 저, 법무관 된 지 고작 2년밖에 안 됐습니다만.”
말을 흐리며 펠만이 손바닥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행정관 2년, 법무관 3년, 이후 암묵적인 관례였던 안찰관과 독재관 과정을 타파하고 곧장 집정관에 오른 이가 바로 베르트발드 얀셀이었다.
그라는 선례가 있으니만큼 베르트발드보다 나이가 많은 펠만이라고 집정관이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펠만은 자신의 역량을 잘 알고 있었다. 내내 아카데미 수석을 놓친 적은 없었지만, 단지 많이 배우고 똑똑하다 해서 집정관이 될 수 있다면 집정관 자리가 세 개뿐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밑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암투, 시기와 견제를 견뎌야 하는 건 기본이고 일부가 아닌 전체를 볼 줄 아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 이게 최소 조건이었다.
주어진 업무를 쳐내며 원로원 사이에서의 정쟁뿐만 아니라 황실과의 관계까지 능숙하게 다루는 베르트발드의 수완은 지금의 펠만으로서는 흉내 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지금 그에게는 법무관조차 버거운 직책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집정관이라니.
“그 자리가 탐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요. 지금 그만둔다고 하시면 제가 나서서 집정관님 다리를 붙들 겁니다. 그러니까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뭐 그렇다면 농으로 듣고 잊으십시오.”
그런 농담 재미없어요, 질색하는 얼굴로 덧붙인 펠만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사무소 쪽으로 달려갔다.
농담이면 좋을 텐데 농담이 아니라서 문제지. 속내를 삼키며 바이온이 쓴웃음을 머금고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베르트발드는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으로 법전과 서류를 대조하고 있었다. 피곤할 법한데도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매무새는 늘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성정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었다.
선대 얀셀 백작조차 자신의 아들에게 ‘지독한 완벽주의자 새끼’라고 혀를 내둘렀고, 그 감상은 2대에 걸쳐 얀셀가를 섬긴 바이온 또한 적극 공감하는 바였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감상이 더 추가되었다. 지독한 완벽주의자이자 그보다 더 지독한 로맨티시스트.
아니, 로맨티시스트보다는 스토커에 더 가까울지도.
“셰인에게 보고 받았나.”
갑작스레 날아온 물음에 바이온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베르트발드는 여전히 시선을 법전에 고정한 상태로 펜 끝을 이용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배편으로 우회해서 들여오라고 한 그 신무기. 셰인이 먼저 받아서 검수를 끝냈을 텐데 그거 보고 받았느냐고.”
“아, 예. 아마 지금쯤 상단을 통해 수도에 도착했을 겁니다. 이게 샘플입니다.”
바이온이 허리 뒤편에서 무언가를 꺼내 베르트발드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바이온의 검지보다 살짝 긴 은색 총열, 고동색 그립과 그와 같은 총신. 총신 끝에는 제국을 상징하는 제라늄이 은으로 새겨져 있었다.
은색과 고동색이 우아하게 어우러진 엔틱한 분위기의 리볼버였다. 베르트발드는 탐탁지 않은 눈길로 제라늄 꽃이 새겨진 부분을 쳐다보다가 느릿하게 리볼버를 집어 들었다.
쥐었다 폈다 하며 총을 파지하는 모습과 안전핀을 뽑고 탄창을 확인하는 손길이 초보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능숙했다.
베르트발드는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핀 후 다시 바이온에게 리볼버를 건넸다.
“나쁘진 않은데 그렇다고 썩 좋지도 않군. 보급용이니 어쩔 수 없나.”
“총은 처음 써봅니다. 서부에서는 꽤 유행이라고 하던데, 백작님께서는 쓸 줄 아십니까?”
“사관 학교에 있을 때 조금 써 봤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구식이어서 관리하기가 영 까다로웠지. 지금도 군용으로 보급하기에는 예산 낭비인 것 같은데 언제까지고 검만 휘두를 수는 없으니.”
아직까지는 검이 나은 것 같은데, 중얼거리며 베르트발드가 다시 펜을 들었다. 그러더니 흘리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추가했다.
“장부가의 2할은 잊지 말고 빼놓게. 황실로 들어갈 돈이니까.”
바이온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황실로 들어갈 돈. 비자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