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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31화 (31/145)

31화

세상에. 왜?

심장이 이대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

하악, 하악, 숨결이 빨라져 왔다. 불규칙한 고동 소리가 귓가를 왱왱 울려댔다.

에리얼은 그의 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내려 가슴을 어루만졌다. 쿵쿵쿵,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었다.

“하, 하아, 베리, 베리, 나요….”

“에리얼. 괜찮으니까 힘 빼고… 다리 감아요. 아프지 않아.”

“흐, 하아, 하아….”

기분 나쁜 게 아니라, 아니, 지금.

지금 머릿속에서 심장 소리가 쿵쿵 울린단 말이야.

가쁘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베르트발드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

허리를 들어 올리는 손길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에리얼이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안 돼요.’ 작게 저항했지만 베르트발드의 입술에 말이 먹혀버렸다.

관자놀이 근처로 두근두근두근, 맥박이 빠르게 오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에리얼은 이게 그냥 두근거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이가 들어서 그러나. 부정맥이 와서… 자꾸 긴장하면 숨이 가빠지고 두근거리지 뭐예요.」

이거, 이거 누가 말해줬지….

아, 맞아. 가가린이 한 말이었는데….

에리얼은 의식이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힘이 빠져나가고, 베르트발드의 목을 감싸 안고 있던 손이 침대로 툭 떨어졌다.

“에리얼?”

몸을 묻으려던 순간, 베르트발드가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에리얼의 상체를 안아 들었다.

바짝 마른 상체가 힘없이 그의 품에 안겨 왔다. 학학거리는 숨결이 심상치가 않았다.

베르트발드는 에리얼을 안아 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대체 무슨.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은 꿈에서나 일어나리라 생각했지만 품 안에서 헉헉대는 꼴이 지나치게 생생한 것이, 분명 현실이었다. 베르트발드는 황당함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집사와 주치의를 불렀다.

그로부터 십여 분이 지난 후.

…베르트발드는 에리얼이 기절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 *

어둠보다 더 어두운 빛으로 시계를 가로막고 있던 안개가 천천히 뒤로 밀려나 암흑 속에 녹아들었다.

안개가 있던 곳이 빛으로 가득 차고, 빛마저 물러난 자리에 황홀한 녹음의 세상이 펼쳐졌다.

하늘 위, 거미줄처럼 펼쳐진 나뭇가지들과 함께 연한 연둣빛 새싹이 아롱아롱 초록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봄 내음이 만연한 나무 아래로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초록 그림자가 어룽거릴 때마다 함께 나부끼는 밝은 백금발, 선이 뚜렷한 콧날과 그보다 더 예리하게 각이 선 입술 선. 그 화려한 옆모습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북부의 깊은 바다를 담아놓은 듯한 푸른 눈동자였다.

…백작님이다.

중얼거렸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에리얼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 꿈은, 예지몽에서는 자신이 직접 나올 때보다 이렇게 관조자처럼 등장할 때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베르트발드는 뒤에 따라오는 누군가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딘가로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진회색 예복을 단정하게 갖춘 걸 보니 아마도 공무를 보는 중인 것 같았다.

의회에도 이런 숲이 있구나.

잘 살펴보니 녹색 삼림 건너편에 커다란 대리석 건물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집정관님. 이 새들 어떻게 좀 해주세요. 새똥 때문에 지나갈 수가 없어요.』

베르트발드의 뒤를 따르던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하늘을 쏘아보며 구시렁거렸다.

훌쩍 큰 키가 인상적이었지만 워낙 마른 체구 때문에 더욱 왜소해 보이는 남자였다. 옆에 바이온이 있어서 괜히 더 작아 보였다.

남자는 두꺼운 안경을 추어올리며 베르트발드에게 그렇지 않냐는 듯 고개를 들이밀었다.

『못 들은 척하지 마시고요. 저번에 집정관님께서도 투덜대시는 거 다 들었습니다.』

『펠만. 그 건의는 이미 여러 번 받았네만… 서령을 쓰라 권하고 있지만 대부분 전서구를 편리해하니 나로서도 달리 해결방도가 없네.』

『그냥 법령으로 지정해주시면 되잖아요.』

펠만이라는 남자가 눈썹을 잔뜩 추어올리며 서러운 듯 말을 이었다.

『집정관님은 가결 완료된 서류에 새똥 맞아본 적 없으시죠? 이틀 밤을 새워서 만든 자료에 인장된 서류를 다 합쳐서 갖고 가다가 주먹만 한 새똥이 서류에 딱 떨어지는데! 얼마나 눈물 나는지 아십니까?』

『그냥 나한테 미루지 말고 자네가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는 게 어떨까.』

『제 의결권, 재임 기간 중에 딱 다섯 번밖에 못 씁니다! 그걸 고작 새똥 때문에 쓰라고요?』

『그럼 나는?』

『집정관님은 수석 집정관이시잖아요…. 의결권 같은 거 없어도 마음대로 얘기할 수 있으면서.』

『그러니 더 언행에 주의해야 하지 않겠나. 자네 진심으로 내가 의장석에 앉아서 새똥 따위를 얘기하길 바라나.』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채 베르트발드가 놀리듯 묻자 펠만이 에효,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뭐 어쩔 수 없다고 쳐도’, 하고 말을 덧붙이더니 자신의 안경을 까마귀가 채가려 했다는 둥, 떨어진 안경을 주우려고 했더니 까마귀 떼들이 모여들어 자신을 유린했다는 둥 넋두리를 이어갔다.

베르트발드는 앞서 걸으며 아무 관심 없는 표정으로 저런, 곤란했겠군, 따위의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그 모습을 살피던 에리얼이 조금 짠한 기분으로 펠만을 바라보았다.

의회에도 이런 고충이 있구나.

새가 많이 날아다닌다고 해서 굉장히 우아하고 신성한 곳일 줄 알았는데.

에리얼의 시야가 위로 움직였다. 새파란 창공 위에 수많은 점들이 이리저리 움직여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우와… 저게 전부 새야? 똥 걱정할 만하네.

…어라.

허공을 펄럭이던 새 한 마리가 천천히 날갯짓을 줄였다. 그리고, 새가 스친 자리 밑으로 쏜살같이 추락하는 까만 점이 보였다.

에리얼은 점점 커지는 점의 정체를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저거!

여기! 배, 백작님이 걷는 자리로 떨어지잖아!

“안 돼-!!”

에리얼이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물과 눈곱으로 단단히 감긴 두 눈은 여전히 암흑 속에 있었지만 가슴이 이렇게 두근거리는 걸 보니 분명 현실이었다.

“우, 우와….”

예지몽 중에서 이렇게 긴장감 넘치는 건 처음이었다.

양손으로 가슴을 꾹 누른 채 헉헉, 숨을 내뱉었다.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에 회색빛 세계가 어른거렸다.

“부인.”

옆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에 에리얼이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에 익숙한 붉은 인영이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앉아 있다가 급하게 일어선 듯, 발치에 동그란 스툴이 뒹굴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몸은, 정신은, 아니, 아니 지금… 괜찮은 겁니까?”

늘 어딘가 초연했던 그답지 않게 말미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에리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과 자신이 누워 있던 침대 가장자리, 잠옷 차림의 자신을 순서대로 쳐다본 후 다시 베르트발드에게 시선을 향했다.

멍하던 의식이 점차 깨어나고, 지난밤 있었던 기억이 스멀스멀 뇌리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어, 저, 그, 어, 으… 어어….”

“부인, 부인! 혹시 또 어디가 아픈 겁니까?”

“아, 아니,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와. 이걸 어떻게 하니.

이대로 딱 눈 감고 다시 기절하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말 기절한 척이라도 할까. 창피해서 도저히 백작님을 볼 수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눈앞에 거세게 일렁이는 핏빛 인영을 보고 있노라니 쓰러진 척하면 아주 난리가 날 것 같았다.

백작님… 엄청 걱정하셨나 봐.

아니, 그렇게 씩씩대놓고 픽 쓰러졌으니 누구라도 깜짝 놀라긴 하겠다. 에리얼은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 올리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괘, 괜찮아요. 저기… 놀라셨죠….”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혹시 이대로 못 깨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습니다.”

잔뜩 갈라져 쉬어있던 목소리가 점차 차분한 어조로 바뀌었다. 베르트발드는 턱을 쓸며 내키지 않는 듯 입을 열었다.

“자주 그럽니까? 만약 이런 식으로 자주 쓰러지면….”

“아니에요! 저도 처음이었어요. 그냥, 너무 두근거려서… 막, 머릿속까지 심장이 쿵쿵 울리더라고요. 그냥 제가 너무… 긴장했나 봐요.”

살면서 굉장히 많은 일들을 겪었고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에리얼이었지만 어제의 일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너무 두근거려서 기절하다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병인가? 부정맥인지 뭔지 알아봐야 하나?

아닌데… 가가린이 부정맥은 조금만 긴장해도 엄청 두근거린다고 했는데….

여태까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다고. 그냥, 백작님이 그렇게 막… 그렇게 하니까.

귓가에 퍼지는 뜨끈한 숨결, 고막을 뒤흔드는 낮은 목소리. 살결을 타고 내려오는 손길과 콧속에 가득 들어찬 베르가못 향기까지.

눈이 보이지 않아 더욱 예민해진 감각들이 한 목소리로 베르트발드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

감각을 되돌이킨 순간 얼굴로 열기가 확 밀려들었다. 에리얼은 목을 움츠린 채 슬그머니 눈만 들어 베르트발드를 쳐다보았다.

“죄송해요.”

“뭐가 말입니까?”

“기절해서요….”

하아아, 베르트발드가 꺼질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초췌한 얼굴로 에리얼을 바라보던 그가 등을 돌린 채 침대 근처에 걸터앉았다.

감당하기 힘든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참다못한 에리얼이 입을 달싹인 순간, 베르트발드가 불쑥 말을 꺼냈다.

“부부 사이에 미안하고 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제게는 부인의 건강이 가장 중요합니다.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디가 툭 불거진 손이 에리얼의 뺨을 어루만졌다. 무심한 어조와 달리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유리 공예품을 다루는 것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다정한 손길이 에리얼에게는 그저 죄책감으로만 느껴졌다. 에리얼은 피부를 오가는 손 위로 제 손을 포갰다.

크고 뜨거운 손. 손등 위 도드라진 핏줄이 어딘지 야성미를 느끼게 했다. 에리얼은 얼굴을 손바닥에 폭 기댄 채 머뭇거리며 말문을 뗐다.

“저기. 백작님.”

“말씀하십시오.”

“지금은 괜찮은데… 다시 한번 시도해볼까요?”

눈앞의 여자가 무슨 말을 떠드는 건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베르트발드는 모호한 표정으로 말의 자취를 더듬어가다가 곧 의미를 깨닫고 허, 하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글쎄요. 또 기절하시면 곤란합니다.”

“두 번째는 괜찮지 않을까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깜박깜박 눈꺼풀을 움직이는 에리얼의 모습은 요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천진했다.

뜻이나 알고 지껄이는 건가.

그냥 기절했을 때 모른 척하고 안아버릴걸. 그래야 저런 헛소리를 안 하지.

이대로 쓰러트려 울리고 싶은 파괴적인 충동과 소중하기에 쉬이 손댈 수 없는 망설임이 동시에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는 저 맹랑한 여자보다 훨씬 어른이었다.

이성을 되찾은 베르트발드는 입을 다문 채 손바닥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생명체를 오묘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참고, 참고, 참아왔다가 드디어 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온몸이 터져버릴 것 같았는데. 아쉽게도 자신이 터지기 전에 이 여자의 정신이 먼저 터져버렸나 보다.

혹시 일부러 이러는 건가.

마차에서 먼저 자신을 도발한 건 에리얼이었다. 입술이 닿은 순간, 에리얼이 목을 끌어안고 열렬히 입술을 부딪쳐 왔다. 들이박듯이 세게 비벼대는 통에 입술이 쓰릴 정도였다.

서툰 입맞춤을 부드럽게 유도하며 베르트발드는 치밀어오르는 욕정을 필사적으로 달랬다. 애송이처럼 허겁지겁 안고 싶지는 않았다.

부드럽게, 조금 더 어른스럽게….

「저도 닿고 싶어요. 안아주세요. 백작님.」

…하려고 했는데. 고작 그 한 마디에 넘어가서.

요망한 여자다. 생각을 떠올리니 다시 열이 뻗쳤다.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욕망과 저 작은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추고 싶다는 욕망이 서로 부딪혔다.

베르트발드는 검지를 들어 에리얼의 아랫입술을 슬슬 쓸었다. 입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쉬운 한숨을 뱉었다.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지금은 부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드릴 수 없겠습니다. 밤새 부인을 보살피느라 눈을 붙이질 못했습니다. 지금은 좀… 자고 싶군요.”

“헉. 하나도 못 주무신 거예요?”

“정 제게 뭔가를 해 주고 싶으시다면… 제가 깨어날 때까지 곁에 있어 주십시오. 그래야 서로 균형이 맞겠지요.”

자리에서 일어난 베르트발드가 이불을 살짝 들쳤다. 뜻을 알아챈 에리얼이 슬금슬금 옆으로 이동했고 그녀가 누워 있던 자리에 베르트발드가 푹, 몸을 뉘었다.

“이리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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