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결혼 전에야 교양이니 사교니 하며 가문의 내정 관리가 가장 중요한 것처럼 떠들어댄들 실제로 안주인의 가장 큰 의무는 후계자를 낳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런 식으로 장난처럼 받아치다니.
“저 장난하는 거 아닌데요.”
“압니다. 이런 중요한 화제를 어찌 농으로 넘겨들을 수 있겠습니까. 저도 숙고하여 대답하는 중입니다.”
옆으로 고개를 세운 베르트발드가 맞잡은 손을 슬그머니 당겨 에리얼을 제 옆에 앉혔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운을 띄우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서두가 너무 깁니다. 본론이 뭡니까.”
나직하게 타이르는 음성과 함께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숙여 에리얼과 시선을 맞췄다.
어떤 식으로 말을 이어가야 하나 고뇌에 빠져 있던 에리얼은 따끔따끔하게 내리쬐는 시선을 느끼고서 조금 더 침착해진 어투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건 아니고요. 아이들은 정말 좋지만… 가지기 싫다는 쪽이에요. 아니, 싫다기보다는 그러면 안 돼요.”
“왜 그런….”
“그게, 왜 그런지는 묻지 마세요! 네. 저 정말 이기적이죠… 그래도 그게,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는 있는데 말씀드리기가….”
아이를 가지기 싫다는 것도 그의 입장에서 어처구니없는 말일 텐데, 그 이유가 미신에 가까운 초현실적인 사유라면 아무리 냉정한 베르트발드라 할지라도 자신을 놀리는 거냐며 노발대발할 것 같았다.
에리얼은 말끝을 흐리며 슬그머니 손을 빼냈다.
손가락이 떨어지려던 순간, 베르트발드가 재빨리 손을 붙잡아 깍지를 꼈다. 놀랄 새도 없이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이를 가지기 싫어서 잠자리를 기피하셨던 거라면 충분히 존중할 만한 사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 기피 사유를 해명하시는 이유와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결정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직설적으로 날아온 물음에 에리얼이 더욱 난처해진 기분으로 입 안을 씹었다.
솔직하게 표현해도 좋을까. 우스운 사람 취급당하면 어떻게 할까 싶어 걱정부터 앞섰다. 괜히 쓸데없는 화제를 꺼낸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와의 동침을 피할 수는 없을 거라는 확신도 생겼다. 에리얼은 머릿속에 뒤엉킨 생각을 천천히 나열한 뒤 그냥 솔직해지기로 결심했다.
“처음 청혼장을 받았을 때요. 조만간 또 파혼당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블루다이아몬드가 박힌 약혼반지. 그와 함께 도착한 서신 위에는 천칭을 든 세이렌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실링왁스를 손가락으로 더듬어 청혼 상대를 확인한 순간, 에리얼은 말 그대로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명망 높은 남부의 귀족, 수석 집정관의 청혼이라니.
대체 이 사람이 왜 나와 결혼을? 하는 물음도 잠시뿐이었고 어차피 전과 똑같은 전철을 밟을 거라 생각되어 별다른 고민 없이 청혼을 승낙했다.
“파혼당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결혼 후에 뒷방으로 밀려날 거라 생각했지요. 저 같은 사람은 공녀라는 신분 외에는 딱히 쓸모가 없으니까요. 아, 자책하는 건 아니에요. 보세요. 저 하나도 안 우울해요.”
입매를 끌어당기며 에리얼이 활짝 얼굴을 폈다. 제 쓸모를 부정하려는 마음이 기저에 있었다면 우울하겠지만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것뿐이니 우울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백작님께서는 저를 많이 배려해주시고 부인 취급까지 해주셨잖아요. 그래서 저도 백작님께 맞춰드리고 싶고… 그냥 그런 마음이 들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굳이 애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부인께서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제 몫을 다 하고 계십니다.”
정중한 답변에 에리얼이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이게 아닌데.
대화를 이어갈수록 정말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싶어 마음이 답답해졌다. 에리얼은 찌푸린 얼굴로 옆으로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슬쩍 뒤로 넘겼다.
굳이 대화를 빙빙 돌릴 필요가 있을까.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있는 자신이 싫었다.
가식을 거둬내고 에리얼은 마음속에 피어오르던 진심을 입에 담았다.
“아니, 아니에요. 사실은 이런 거 다 핑계고요. 아까 황녀 전하를 마주쳐서 화가 났어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에리얼은 화끈거리는 눈매를 가리기 위해 슬쩍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황녀 전하가 백작님을 좋아하는 게 싫어요. 아이가 없다고 제대로 백작 부인 취급받지 못하는 것도 슬퍼요. 잠자리를 못 가진다고 백작님께서… 저와 멀어지는 것도 싫어요.”
싫다는 말만 중얼거리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스스로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괜한 말을 했나. 아니, 이제 와서 말을 무를 수도 없고. 에리얼은 울 것 같은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백작님과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데… 무시당하는 것도 싫고 제대로 백작 부인으로 인정받고 싶은데. 아이를 가지면 안 돼요. 후계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도 나쁜 일인데….”
“…….”
“맞아요. 그러니까 백작님께서 정부를 들이셔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또 싫… 싫어서요. 이대로….”
백작님께 버림받을까 봐 무서워요.
본심을 내보일 수가 없어서 목구멍으로 삼켰다. 지킬 자존심 따위 없다고 생각했지만 최소한의 긍지를 지킬 만큼의 잔재는 남아 있던 모양이다.
못난 말만 지껄이는 입이 주책스러워 에리얼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무릎에 놓인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숨소리조차 내보이는 게 부끄러워 한껏 숨을 속으로 삭이던 순간.
“에리얼.”
그만 말하라는 듯 기다란 손가락이 다가와 에리얼의 입술을 꾹 눌렀다.
“고개 좀 들어봐요.”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에 에리얼이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망막 한가운데에 새빨간 그의 모습이 들어찼다.
베르트발드는 붙잡힌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에리얼을 무릎 위에 앉혔다.
작은 몸에서 나오는 미미한 열기가 허벅지를 타고 베르트발드에게 전해졌다. 그 위로 어디에 손을 둬야 할지 난감해하는 에리얼의 표정이 시야에 가득 찼다.
어쩔 줄 몰라하는 저 얼굴은 마주할 때마다 기이한 만족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베르트발드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상체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짙게 풍기는 라벤더 향, 그 사이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보드라운 체향이 함께 콧속에 스며들었다. 향기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로 에리얼이 한 말을 뇌리에 되새겼다.
그와 가까워지고 싶고, 황녀가 그를 좋아하는 게 싫다고 말했다.
질투하는 꼴까지 어설퍼서 대체 어떡하면 좋을까. 그 와중에도 제 눈치를 살피며 쭈뼛거리는 모양새가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냥 안아달라고 하면 될 것을 이렇게까지 순진해 빠져서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걸 참기가 힘들었다. 베르트발드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웃음을 삼킨 뒤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뗐다.
“부부 관계라는 건 꼭 후계를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서로 정을 나누기 위해서도 필요한 행위지요.”
“그건 저도 아는데요. 그럴 거면 차라리 저보다 다른….”
“잘 봐요. 이렇게.”
얄팍한 아랫배 근처에 놓여 있던 에리얼의 작은 손을 베르트발드의 커다란 손이 감싸들었다.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편 후 펴진 손바닥 한가운데를 느릿하게 쓸었다.
홀린 듯 그 자취를 따라가는 에리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베르트발드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감각에 집중해봐요. 그래요. 눈 감고서 이렇게… 여기. 간지러우면서도 어딘가가 안절부절못한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럼, 부인께서도 저와 똑같이 해 보십시오.”
눈을 뜬 에리얼이 베르트발드의 손바닥을 펴고 손금이 펼쳐진 한 가운데를 검지로 슬슬 문질렀다. 닿을 듯 말 듯 조심스러운 손길에 베르트발드가 실소를 흘렸다.
희미한 웃음소리가 에리얼의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에리얼은 잠시 망설이다가 웃음소리에 용기를 내, 손을 펴서 커다란 손바닥을 살살 쓸었다.
마디가 불거진 큼직한 손은 무척 따스하고 거칠었다. 에리얼은 마디와 지문, 손금까지 천천히 문지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포개 그와 깍지를 꼈다.
아주 잠시 움찔하던 그의 손가락들이 깍지낀 에리얼의 손등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베르트발드는 강하게 손을 끌어당기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 위에 뺨을 기댔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작은 머리통을 내려보다가, 속삭이듯 말을 읊었다.
“살갗의 느낌이 생소하지요? 체온도 골격도 전혀 달라서 이상하고, 궁금하고… 더 만져보고 싶고.”
비어 있는 손을 들어 에리얼의 손을 붙잡아 천천히 포갰다. 깍지 낀 손 틈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뜨거운 체온이 달라붙어 손끝을 홧홧하게 만들었다.
“더 닿고 싶지 않습니까.”
건조한 음성으로 야릇한 본심을 숨겼다. 기대어 있는 뺨으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그런 겁니다. 그저 닿고 싶고, 온기를 좀 더 나누고 싶어서. 남녀 사이의 관계란 후계가 우선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목적이 더 큽니다.”
“…….”
“그리고 오해를 바로잡자면 후계를 위해 정부를 두는 남자는 없습니다. 정을 나누고 싶어서 하는 짓일 뿐이지요. 정부가 낳은 아이를 괜히 사생아 딱지 붙여 차별하는 이유가 달리 있겠습니까.”
사생아라며 핍박당하던 남자가 하는 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진솔하고 담백한 이야기였다.
에리얼이 목을 움츠리며 그의 눈치를 살피자 베르트발드가 신경쓰지 말라는 듯 작게 웃었다.
“후사에 대한 갈망 때문에 부인을 취하고자 했던 건 아닙니다. 제가 부인과 밤을 함께하고 싶은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정을 나누고 싶어서. 그저… 부인께 닿고 싶어서입니다.”
“백작님도요?”
“예. 아마도 부인께서 저를 원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에리얼이 고개를 위로 치켜올려 시선을 맞췄다.
부옇게 흐려져 있던 잿빛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살짝 벌린 복숭앗빛 입술이 뭔가 말하려는 듯 달싹이다가 다시 다물려졌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찬기가 도는 푸른 눈동자가 에리얼의 얼굴을 떠돌다 입술 위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하얀 피부와 대비되어 더욱 붉게 도드라져 보이는 입술. 연회에 참석하기 전, 마차에서 우연히 스친 입술.
그 감촉이 아직도 선명한데… 이렇게 보고 있으려니 참기가 힘들었다.
뚫어져라 입술을 쳐다보던 베르트발드가 맞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여지껏 다독여왔던 인내심이 순식간에 증발하는 것 같았다.
베르트발는 짧은 숨과 함께 온 힘을 쥐어 짜내 속삭임을 토했다.
“부인.”
“네.”
“눈 감아요.”
네? 낭랑한 물음과 함께 에리얼이 말문을 뗀 순간,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