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헤스 제국의 치세는 약 180여 년으로 그리 길지 않다. 제국의 역사보다 긴 명맥을 유지하는 가문은 적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아이기스 가문은 400여 년이 넘는 역사로 다른 가문들과 위상을 달리했다.
북부의 아이기스령은 오 왕국, 삼 공국을 통틀어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으며 거칠고 용맹한 군사들로 인해 제국이 있기 전부터 백색 땅이라는 하나의 국가로 여겨졌다.
그러나 북부의 척박한 환경에 한계를 느낀 선대는 스스로 칭왕을 하기보다는 새로운 나라의 조력자가 되길 바랐다.
그렇게 아이기스 가문은 제국이 채 세워지기도 전에 변경백을 자처했고 타국의 간섭을 배제하며 빠르게 영지를 통합하기 시작했다. 이후, 세 개의 대영주들 중 하나인 드란델 가문에 힘을 실어주어 제국 건국에 일조했다.
백색 땅의 전사들. 그 강렬한 임팩트 때문인지 단순히 상징적인 이미지인지는 몰라도 제국 귀족들은 이후로 아이기스 가문을 체스말에 빗대 화이트룩이라는 이명으로 부르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국 건국의 일등 공신이었지만 동시에 충성 맹세 단 하나로만 이루어진 관계라는 건, 아이기스 공작이 마음만 먹으면 황가를 적으로 돌리는 게 가능하다는 뜻과 상통했다.
때문에 황가는 아이기스 공작을 하대하지 않고 친우로서 대했다. 물론, 이 명망 높은 가문의 자식들 또한 일반 귀족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쿠델라이야라고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여자는 후계가 될 수 없다는 관례를 깨고 공작의 둘째인 그웨니시스 아이기스가 버젓이 소공작 행세를 하며 돌아다니는 것도, 또 그녀가 황태자와 비슷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에리얼 아이기스가.
매번 이런 자리에 나올 때마다 쭈뼛대며 눈치 보기 바빴던 그 하찮은 에리얼 아이기스가. 장님 공녀 따위가 자신에게 훈계를 했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하, 지금, 지금 공녀가 감히 내게 예의를 가르치려는 건가요?”
“감히라는 말은 제가 먼저 알려드리고 싶네요. 제가 전하보다 연배가 많지 않나요. 사람 됨됨이와 나이가 서로 비례하지는 않지만 연장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셔야 하지 않을까요. 전하께서 원체 자유분방한 성정이시라 듣긴 했지만 도가 지나치심이 아닌지.”
담담히 말하며 에리얼은 곁을 스쳐 가던 풋맨의 은쟁반에 빈 잔을 올려놓았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쿠델라이야와 달리 에리얼의 태도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 사실이 쿠델라이야를 더욱 못 견디게 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잘근거리는 와중에 에리얼의 조용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전하께서 제 부군께 결혼 전부터 남다른 정이 있다는 이상한 소문을 전해 들었는데요. 저와 함께 계시면 그 소문이 더 난잡하게 부풀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허, 그런 하찮은 소문 따위를 제가 신경 쓸 것 같나요?”
“괜찮으시다니 저야 다행이지요. 아,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제 공녀가 아니라 얀셀 백작 부인이랍니다. 칭호를 잊으신 듯하여.”
작게 소곤거리며 에리얼은 고개를 치켜들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저 멀리서 큰 덩치의 인영과 함께 그보다 조금 작은 핏빛 인영이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이런, 괜히 여기서 마주쳤다가는 난감해질 것 같아.
에리얼은 한쪽 드레스를 들어 올리며 가볍게 묵례했다.
“그럼 황녀 전하. 즐거운 생일 되시길 바랄게요. 다시 뵐 그 날까지 안녕하시기를.”
높은 구두 때문인지 다쳤던 발목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에리얼은 최대한 허리를 편 채 차분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또박또박 걸었다. 눈이 안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외의 다른 치부를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허망한 마음 한편에 누군가의 얼굴이 몽실 피어올랐다.
눈부신 플라티나 블론드와 가늘게 내리뜬 아름다운 눈매.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낮게 가라앉은 저음과 짧게 목을 울려 웃는 특유의 웃음소리까지.
부부라는 이름으로 구속되어 있지만 한 번도 내 것이라고 느껴본 적 없는, 그저 사이좋은 타인에 불과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린 순간.
…난생처음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자신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부끄럽게 느껴졌다.
***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내내 에리얼은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베르트발드가 말을 건네려 해도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러지 말걸’이라고 하거나 으으으,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움켜쥐는 통에 섣불리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베르트발드는 절규하는 자신의 부인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관람하며 느릿하게 팔짱을 꼈다.
영문모를 행동과 달리 오늘 에리얼의 모습은 숱하게 눈에 담아왔던 모습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얀 레이스와 진주로 장식한 상앗빛 모슬린 드레스, 곱게 땋아 틀어올린 머리 위에는 요란한 머리 장식 대신 작은 진주가 달린 머리핀 서너 개만 꽂혀 있어 그녀의 단아함을 더욱 드높이고 있었다.
전담 하녀가 그녀의 치장에 공을 쏟는다 듣긴 했는데 오늘 보니 전담 하녀의 주급을 두 배는 올려줘야 될 것 같았다.
베르트발드는 에리얼의 옷매무새를 살피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옷차림도 그렇지만 사실 옷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새카만 머리에 햇살처럼 빛나는 하얀 얼굴, 낮과 밤이 함께 담긴 그녀는 그 자체로 완벽했다.
아닌가, 눈썹 사이를 좁히며 생각의 꼬리를 이어갔다.
완벽하다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랐다. 남자에게 있어서 완벽한 차림이라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최고일 터. 물론 한 겹씩 벗기는 묘미까지 생각하면 역시 옷을 입고 있는 게 좋겠지만….
“저기…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끄는 듯한 목소리로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목을 축 늘이고 눈만 위로 올려 베르트발트를 살피는 모양이 꼭 풀죽은 망아지 같았다.
말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무릎 언저리의 레이스를 한참동안 만지작거리던 에리얼이 휴우우, 날숨을 내뱉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백작님.”
“예.”
에리얼의 뇌리에 핑크빛 별이 반짝거렸다. 진회색 그림자 인간 둘이서 입을 쭈욱 빼고 서로 뽀뽀하는 풍경과 두 실루엣이 뒤엉켜 서로를 끌어안고서 토닥거리는 풍경도 함께 떠올랐다.
빈곤한 상상력과, 남체를 보지 못한 에리얼로서 남녀 간의 교합에 대한 상상은 거기서 더욱 나아가질 못했다.
에리얼은 고개를 숙여 붉어진 얼굴을 그림자 속에 감췄다.
“저, 저요. 오늘 밤… 준비가 된 것 같아요. 오늘,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러십니까.”
베르트발드는 결연한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흠, 하고 팔짱 낀 손을 빼 턱을 괴었다.
그렇게 침묵이 찾아왔다.
예상했던 반응은 이런 게 아닌데. 당혹스러움에 휩싸인 에리얼이 레이스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더욱 빠르게 꼼질거렸다.
베르트발드는 작은 손가락이 레이스 끄트머리를 쥐었다 폈다 하는 모양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말입니다. 정말 제가 생각하는 그 뜻이 맞습니까.”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인 에리얼이 슬그머니 눈동자를 위로 움직여 베르트발드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백작님께서 그, 준비되면 알려달라고 하셨잖아요. 혹시 싫으시다면.”
“혹여 연회장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움찔, 에리얼의 어깨가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베르트발드의 눈썹이 미세하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
베르트발드는 세심한 눈길로 그녀를 살피며 말문을 이어갔다.
“공작 각하를 만나 뵈었다고 바이온에게 들었습니다만. 혹시 부인께 상처 되는 말이라도 하신 건 아니겠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상처를 받은 사람이 공작이었으면 공작이었지 에리얼은 아니었다.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가 상처 받아서 문제였지만.
에리얼은 어떻게 운을 떼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따로 준비가 필요한가요. 부인은 남편이 원하면 언제든 순종해야 하잖아요. 저는, 저는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으니까. 백작님께서 혹시 저를 취하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저야말로 괜찮습니다. 그때 말씀드렸다시피 부인께서 마음의 준비를 마치실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단지 부부라해서 의무적으로 부인을 취할 생각은 일절 없습니다.”
“그런 게 아니고요… 제가 준비를….”
“아닙니다. 그저 때가 되면….”
“아니, 정말! 그런 게 아니고요!”
에리얼이 덥석 베르트발드의 손을 붙잡았다. 마차 한가운데에서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에리얼의 눈동자 속에 보기 드문 갈망이 엿보였다.
에리얼은 입술을 쭉 빼고 억울한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눈을 꼭 감고 외쳤다.
“솔직히 말할 테니까 저를 혐오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약속하겠습니다.”
입을 벙긋거리며 당장이라도 말을 우다다 쏟아낼 것 같았던 에리얼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지그시 베르트발드를 노려보던 에리얼이 재차 입술을 두어 번 달싹이더니 ‘제가, 제가요.’ 하며 말문을 뗐다. 그럼에도 말을 이을 수가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 바닥으로 고개를 떨궜다.
말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베르트발드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맞잡고 있던 그녀의 손등을 슬슬 쓸었다.
손가락이 지나친 자리 위로 미미한 열기가 남았다. 다정한 손짓에 에리얼이 동요를 삭히며 숨을 골랐다. 이윽고 힘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백작님.”
“예.”
“저는 사실… 아이를 가질 수가 없어요.”
“그렇습니까.”
후계를 이을 수 없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에도 베르트발드는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에리얼의 손등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당황한 에리얼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왜 안 놀라시죠?”
“뭐 굳이… 필요하십니까?”
“그… 그야 당연하죠. 아이를 낳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꼭 그게 의무는 아닙니다만… 뭐 그래도. 정 부인께서 아이를 원하신다면 방계에서 후계를 들이는 것도 방법이겠지요.”
할 말을 잃은 에리얼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베르트발드를 마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