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바이온은 눈에 띄게 당황하다가 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실례했습니다. 두 분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건 저도 알고 있었는데, 괜한 말씀을 드렸나 봅니다.”
“아니에요. 그냥 이상해서… 공석에서는 항상 사이 좋은 척했는데. 저랑 아버지 사이가 수도까지 소문이 났나요?”
바이온은 실언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입가를 쓸던 손짓을 멈췄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공작과 공녀 두 부녀의 이미지는 ‘장님이자 번번이 파혼당하는 가엾은 딸을 안쓰럽게 감싸는 아버지’였다.
에리얼은 항상 공석에서 공작에게 순종적이고 다정한 딸처럼 행세했다. 그녀의 말처럼 대부분의 귀족들은 부녀 사이가 좋으면 좋았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을 오랜 기간 사찰해 온 바이온을 제외하면.
바이온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둘러대는 게 좋을까. 그렇다고 ‘당신을 염탐하다가 알아냈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작님께서 말씀해주셨나 보지요? 맞아요. 아버지랑 저, 별로 사이 안 좋아요.”
스스로 납득한 에리얼이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바이온은 속으로 깊이 안도하며 그녀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유감이군요. 각하께서 원체 성미가 까다로운 분이시니 가족이라 해도 견디기 힘드실 것 같긴 합니다만.”
“까다롭다….”
에리얼은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얼굴로 흐으음, 깊은 침음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인적을 살피더니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깨닫고 바이온에게로 고개를 향했다.
에리얼은 양손을 둥글게 모아 입가에 댄 채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얼마나 까다로우신지. 아침에 일어나면 진하게 우린 다즐링에 레몬 두 조각 넣은 걸 꼭 마셔야 하고요.
차 브랜드도 정해진 것만 써야 하고, 목욕할 때 수건은 꼭 세 장을 써야 하고. 그렇게 소소한 거면 괜찮아요.
남이 준 음식은 손도 안 대고, 잉크통은 꼭 책상 우측에서 세 뼘 떨어진 자리에 놔둬야 하고요. 찻잔도 지정한 장인이 만든 것만 쓰고, 자기 자리에 누가 앉아 있으면 버럭 화부터 내세요.”
속사포처럼 이어진 말에 바이온이 놀란 듯 살짝 눈을 치켜떴다.
“…그거 강박….”
“쉿. 혹시 주변에 있을지도 몰라. 험담하면 꼭 나타나거든요. 잠깐만요.”
봐봤자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할 거면서, 에리얼은 재차 주변을 둘러보고서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조잘거렸다.
“원래 아버지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자라온 도련님이라서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죠. 그놈의 아이기스 공작가는 원래 아들들을 그렇게 키웠나 봐요. 그런 사람이 왜 굳이 황녀를 뿌리치고 남작가 출신의 어머니하고 결혼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바이온은 경탄하는 심정으로 그녀의 작은 입술을 쳐다보았다. 긴 세월 동안 에리얼을 살펴왔지만 그녀가 이렇게 빨리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처음 알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에리얼은 휴우우,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성격도 나쁘시지만 그것까지는 괜찮아요. 참을 수 있어요. 맞춰주면 되니까요. 그런데! 아버지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유치한 사람인 줄 아시면 정말 깜짝 놀랄걸요. 한 번은 어떤 일이 있었냐면.”
“어떤 일이?”
“아버지 서재 의자에 있던 쿠션을 들고 창가에 누웠어요. 햇볕이 너무 좋아서 잠깐 잠들었는데, 깨어나 보니까 머리에 베고 있던 쿠션이 없는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창문이 활짝 열려있어서 온몸이 얼음처럼 차가워져서는! 며칠 동안 감기로 고생했다니까요.”
어느새 그녀의 말에 푹 빠진 바이온이 에리얼을 바라보며 쯧쯧 혀를 찼다.
“그때 바로 깨달았어요. 아버지가 자기 쿠션을 허락 없이 가져갔다고 저한테 골탕을 먹인 거예요. 담요를 덮어주지는 못할망정 열 살짜리 여자아이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그것도 겨울이었는데!”
“아이고, 저런.”
“아버지는 항상 그런 식이세요. 그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겨울 끝 무렵에….”
“에리얼.”
“왜요, 아버지. 저 지금 말하는 중이니까 나중에….”
에리얼이 말을 흐리며 커다란 눈을 깜박거렸다.
방금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잔뜩 굳어 바이온에게 시선을 돌리니, 그도 그대로 굳어버린 건 마찬가지였다.
바이온의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아주 익숙하고도 그리웠지만, 지금은 절대 듣고 싶지 않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했다.
“골탕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다니. 안 본 사이에 꽤나 천박해졌구나.”
거봐. 꼭 험담하면 어디선가 나타난다니까.
속으로 중얼거린 에리얼이 끔찍한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마주 보던 바이온 또한 느리게 몸을 움직였다. 삐걱삐걱 소리가 날 것처럼 어색하게 뒤로 고개를 돌린 바이온은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흡, 숨을 삼켰다.
자신과 비등할 정도로 거대한 체구, 새하얀 백발에 냉기가 서린 푸른 눈. 안 그래도 서늘한 인상에 새카만 예복까지 갖추고 있으니 위압감이 엄청났다.
바이온은 고압적인 태도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젠 아이기스에게 공손히 묵례했다.
“고, 공작 각하. 안녕하십니까.”
“호위관. 자네는 딸이 아비 흉을 떠들어대는 걸 듣고도 안녕할 수 있나 보군. 아쉽게도 난 그런 대인배가 아니라서 말일세.”
“…죄송합니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게. 가족끼리 할 말이 있으니.”
공작의 말에 바이온이 슬쩍 고개를 틀어 에리얼을 쳐다보았다. 원래도 하얀 얼굴이 밀랍 인형처럼 새하얗게 질려서 퍽 안쓰러워 보였다.
바이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백작님께서 꼭 곁에 붙어 있으라고 하셨는데….
공작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부인. 제 입장도 이해해 주십시오.
속으로 사과하며 바이온이 슬금슬금 옆으로 물러났다.
에리얼은 그런 바이온을 보고 썰물에 놀라 도망치는 꽃게를 떠올렸다.
입술을 꼭 다물고 눈앞의 공작을 쳐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바이온을 보고 입을 뻐끔거렸다. ‘호위해준다고 했잖아요’, 입 모양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빤히 알 수 있었지만 바이온은 모른 척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에리얼은 슬픈 기분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웬이 그랬지. 삶은 각자도생이라고. 침을 꿀꺽 삼키고 억지웃음을 떠올렸다.
“오랜만이에요, 아버지.”
“입이 살아 있는 걸 보니 꽤 살 만한가 보구나. 걱정하고 있던 내가 우습게 느껴질 만큼.”
“아버지가 저를 걱정하셨다고요. 그냥 옆집 멍멍이가 고양이를 낳았다고 하시지 그러세요.”
“너 같은 망나니를 집정관 옆에 떨궈놨는데 걱정하지 않으면 그게 사람이겠느냐? 축생이지.”
저 변함없는 말투를 보니 아버지는 별일 없이 무탈했던 것 같다.
다행이네. 에리얼은 눈매를 가늘게 뜨고 공작을 쳐다보았다. 커다란 인영 한가운데에 작은 파문이 잔잔하게 미동하고 있었다.
진한 다홍빛과 연한 분홍빛이 마블링처럼 뒤섞여 있는 파동. 서로 상반된 두 색을 볼 때마다 에리얼은 혼란에 빠졌다.
대체 아버지는 나를 싫어하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까.
뚱한 표정으로 공작을 올려다보던 에리얼이 갑자기 공작의 앞으로 다가갔다. 공작이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리려는 찰나, 그녀가 먼저 손을 뻗어 공작의 양 뺨을 붙잡았다.
“지금 뭐 하는…!”
“가만히 좀 있으세요. 어디 바뀐 데 없나 좀 만져보게요.”
“뒤쪽에 사람들 있는 거 안 보이느냐?”
“당연히 안 보이죠. 집에서 쫓아낸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딸이 맹인인 걸 잊어버리시면 어떻게 해요.”
얼굴을 더듬거리는 딸의 모습을 황망하게 쳐다보던 공작이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에리얼은 웃는 듯 못마땅한 듯 기이한 표정을 띠고 아버지의 양 뺨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세상에… 살다가 아버지가 반가운 날이 오다니. 결혼이란 건 참 신기한 제도예요.”
“네 주둥이에서 반갑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어지간히 백작에게 미움받고 있나 보구나. 내 그럴 줄 알았다.”
“결혼하라고 내쫓은 사람이 아버지셨으면서! 그러길 바라세요?”
“허, 쫓겨나는 사람이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나서?”
에리얼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우물쭈물 대꾸했다.
“…아니, 꼭 제가 잘못한 것처럼 말씀하시면….”
“리라는 왜 다 때려 부수고 나갔지? 벽난로에서 활활 타고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
“보나마나 나 보라고 그렇게 해 둔 거겠지. 그렇게 아낄 때는 언제고, 정말로 네가 미친 줄 알았다.”
시무룩하던 에리얼의 얼굴 위로 사나운 기색이 비쳤다. 에리얼은 눈썹 끝을 치켜올린 채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가 그런 짓 때려치우고 애나 가지라고 하셨으니까요.”
대답 대신 코웃음이 들려왔다. 반박하지 않는 꼴이 아버지다웠다. 에리얼은 입을 샐쭉하고서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
“아무튼 여전하시네요. 아버지 말고 그웬이나 어머니께서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솔직함은 미덕이라지만 지나치면 건방져 보일 뿐이지. 고작 황녀 생일 따위에 아이기스 일가 전부가 와야겠느냐.”
“그럼 아버지는 왜 오셨어요? 이런 데 원래 참석 안 하시잖아요.”
“백작과 네가 어떤 꼴로 마주 서 있나 궁금해서 와 봤다.”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 알 수가 없어 에리얼은 고개를 삐뚜름하게 세우고 아버지를 힐끔거렸다. 공작은 무심한 눈길로 그런 딸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초록과 파랑이 섞인 맑은 눈동자에 맹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리얼이 비쳤다.
햇빛을 못 받아 창백한 낯, 딱히 주눅 든 기색 없이 말을 되받아치는 꼬락서니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못 살겠다고 징징 짜면서 어미 품으로 달려올 줄 알았더니 의외로 딸은 새로운 둥지가 퍽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긴, 권모술수에 능한 얀셀 백작에게 세상 물정 모르는 딸 하나 꼬시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터였다. 애초부터 목 빠지게 제 딸을 원하던 놈이라 내어준 거였는데, 딸의 옷매무새와 혈색을 살피니 어지간히 애지중지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막상, 좋아 보이는 딸의 얼굴을 보니 묘하게 아니꼬운 기분이 들었다. 공작은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는 복잡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아이 얘기가 나와서 말이다만. 신혼이면 얼굴 살이 빠져야 정상인데 토실토실해진 걸 보니 백작과 관계가 영 소홀한가 보구나.”
“…무, 무슨 말씀이세요.”
“에리얼.”
공작은 뭔가를 가늠하는 듯 진지한 눈길로 에리얼을 마주 보았다. 가늘게 치켜뜬 눈매 속에 초록이 섞인 물빛 눈동자가 유난히 차가운 빛을 품고 딸을 투영했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백작에게 쫓겨나기 싫다면 빨리 애부터 가지거라.”
싸늘한 충고에 에리얼이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마음 한편에 묵혀 놓았던 고민이 그의 한마디로 너덜너덜해졌다. 충고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모욕적인 말에 에리얼이 사나운 눈으로 아버지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