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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22화 (22/145)

22화

베르트발드는 팔짱을 낀 채 그대로 굳어 정면만 바라보았다.

옆에 앉아 있는 여자가 무슨 뜻으로 말을 꺼낸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감시한다니. 뭘 감시한다는….

천천히 손을 들어 턱을 쓸다가 다시 흘깃 에리얼을 쳐다보았다. 에리얼은 여전히 꼭 다문 주먹을 무릎에 올린 채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베르트발드는 입꼬리를 슬쩍 당겨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대로 턱을 쓸던 손을 뻗어 에리얼의 입가를 어루만졌다.

흠칫하며 어깨를 뒤로 물리는 그녀를 무시하고 입가에 매달려 있던 쿠키 조각을 떼어냈다.

손톱만 한 크기의 쿠키를 혀로 날름 핥고서 베르트발드가 실소와 함께 말문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부인께서 함께하신다면… 황녀 전하께서도 쓸데없는 수작을 부리진 못할 테니 안심입니다.”

“수, 수작이요?”

눈을 굴리며 그렇게 말해도 되냐는 듯 눈치를 살피는 에리얼에게 베르트발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수작이든 개수작이든 둘만 있는데 어떤 얘기를 해도 상관없지 않나 싶었다. 쿠델라이야고 나발이고 지금은 저렇게 힐끔힐끔 눈치 보는 꼴도 귀엽게 느껴지는 자신의 콩깍지가 더 문제였다.

“부인께서 그리 결정하셨다면 저도 함께 동행하겠습니다. 다만 발이 다 낫는다는 전제하에 동행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네. 노력해볼게요.”

“그럼 여기. 더 드십시오. 자가 치유력을 높이는 데에는 잘 먹고 잘 쉬는 게 가장 좋습니다.”

버찌쨈이 곁들여진 머핀 접시를 에리얼 앞에 내려놓고서 베르트발드는 비어 있는 찻잔에 차를 따랐다. 쪼르르, 다기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허공 위로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 * *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에리얼은 일주일 전보다 자신의 볼이 훨씬 더 빵빵해졌음을 느꼈다.

아닌 게 아니라, 급하게 드레스를 맞추기 위해서 웨딩드레스를 만들었던 재단사를 다시 불렀더니 근 한 달만에 치수가 변했다며 놀라워할 정도였다.

그래봤자 마른미역 같았던 몸이 10분 정도 불린 미역 같아졌을 뿐이지만.

“북부 사람들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잘 안 찌거든.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냥 추운 곳에서는 살이 안 찌는 거였나 봐.”

허벅지를 쿡쿡 찌르며 에리얼이 신기한 듯 중얼거리자 화장을 돕던 비에타가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

“마님은 살이 찌고 안 찌고를 떠나서 너무 마르셨어요. 그래도 저는 좋네요. 얼굴도 환해지시고, 몸매도 굴곡이 살아나서 옷맵시가 좋아지셨거든요.”

“그래? 하긴… 신사들은 살집이 좀 있는 여자들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나 봐.”

에리얼이 양손으로 가슴을 주물거리며 ‘이것도 좀 커진 것 같지? 응?’ 화색을 띠고 비에타에게 물었다.

비에타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씁쓸한 표정을 떠올린 뒤 ‘아니요’, 하고 에리얼의 양손을 탁탁 쳐냈다.

“전부터 여쭤보고 싶었는데요. 마님께 그 신사들의 어쩌구 하는 정보를 알려주던 사람이 대체 누구예요?”

비에타가 분을 바르던 손을 아래로 떨군 뒤 시무룩하게 입꼬리를 내린 에리얼에게 타이르듯 물었다.

“글쎄. 그냥 사용인들이 떠들던 얘기를 우연찮게 들었던 거라서… 굳이 따지자면 가가린이려나. 간식 준다고 부엌 보조 테이블에 앉혀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들려줬거든.”

공작성의 주방을 책임지고 있던 가가린은 환갑이 훌쩍 지났음에도 사내 못지 않게 괄괄하고 호탕한 여걸이었다.

세상 사는 법을 깨우친 노인들이 으레 그렇듯 가가린은 제가 보고 경험한 것 외에는 믿지 않는 외골수였고, 저주 같은 건 다 개소리라며 에리얼을 두둔했다.

공작이 성을 비울 때마다 가가린과 에리얼은 부엌에서 은밀한 만남을 이어갔다. 노인과 꼬마 숙녀는 따뜻한 아궁이 옆에 쪼그려 앉아 차를 마시며 서로의 고민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곱고 아름답게 정제된 이야기만 꺼내는 다른 어른들과 달리 세파에 길들여진 가가린은 통속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했다.

덕분에 에리얼은 ‘남자를 꼬실 때 가장 효과적인 포즈’라든가 ‘내 흉을 떠들고 다니는 못된 계집애를 우물에 빠뜨리는 법’ 따위를 배울 수 있었다.

가가린에 대해 설명하자 비에타가 천천히 입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쯧쯧 혀를 찼다.

“대충 알 것 같네요. 남자들은 이런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는 이래야 되고, 그런 얘기 많이 했죠?”

에리얼은 대답 대신 ‘오.’ 하며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반응을 본 비에타가 들릴 듯 말듯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연하고 온화하지만 가끔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주인마님의 성향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 다른데 뭐 살집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아니고 그런 게 어디 있겠어요. 하녀들 중에서도 남자 사용인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애는 니키인걸요.”

“니키? 아, 체구는 작은데 힘이 세서 에바가 자주 부르던 그.”

“맞아요. 그 삐쩍 마르고 입도 험한 여자가 제일 인기 많다니까요. 뭐… 저도 왜 인기 많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마다 매력 포인트는 다르다는 거죠.”

비에타는 군데군데 뭉쳐 있던 분가루를 손가락으로 슬슬 문지른 다음, 머리를 장식했던 핀을 다시 꼼꼼히 살폈다.

마지막으로 작은 진주 귀걸이를 매달고서 흐뭇한 웃음을 떠올렸다.

“마님께서는 지금 이대로도 훌륭하세요. 아마 백작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걸요.”

난데없이 날아든 다정한 말에 에리얼의 눈매가 살짝 붉어졌다. 부끄러운 듯 뺨을 긁적이자 비에타가 화장 망가지는데 무슨 짓이냐고 기겁하며 손을 떼어냈다.

다시 화장을 고치자 오 분여가 훌쩍 지나 있었다. 비에타는 뾰족해진 눈으로 ‘절대 긁으시면 안 돼요.’ 신신당부를 한 뒤 에리얼을 내보냈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에리얼 혼자 덩그러니 복도에 남겨졌다. 에리얼은 고개를 휘휘 저어 인기척이 있는지 살폈다.

“오늘따라 아무도 없네.”

오렌지빛 어스름으로 물든 복도가 유난히 고적하게 느껴졌다.

백작님 기다리시겠다. 빨리 가야지. 에리얼은 길게 숨을 내쉬고 손에 든 지팡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현관에 이르자 문 앞에 서서 마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붉은 인영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인영이 가까워질수록 바람 내음이 섞인 싸한 베르가못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부인께서는 늘 성급하시군요. 지금 막 모시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만… 여기. 손 주십시오.”

안기라는 듯 베르트발드가 양팔을 벌렸다. 단호한 몸짓을 보니 ‘어제 의사가 괜찮다고 했는데요’, ‘혼자 걸을 수 있는데요’, 이렇게 얘기한들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게 뻔했다.

에리얼은 체념한 얼굴로 베르트발드의 손에 몸을 맡겼다.

그녀를 안아 든 채 지그시 얼굴을 내려다보던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갸웃하며 에리얼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의아한 눈빛을 되돌리자 ‘아무것도 아닙니다.’ 흘리듯 중얼거리더니 에리얼을 마차에 태웠다.

“출발하지.”

채비를 미리 끝내놓은 건지 말하기가 무섭게 마부가 곧장 채찍을 휘둘렀다. 몸이 뒤로 젖혀지는 감각과 함께 따각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

에리얼은 지팡이를 문 쪽에 기대놓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림자 연극 같은 시계 속에 새카만 수풀이 휙휙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창틀 사이로 새어드는 청량한 공기가 오랜만의 외출을 독려하는 것 같았다.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이십니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에리얼을 내려다보고 있던 베르트발드가 무심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에리얼은 손가락으로 창문 유리를 문지르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무래도요. 사교 모임에서는 좋은 기억이 없어서 긴장되네요.”

“지금이라도 말을 돌리시겠습니까? 같이 감기라도 걸렸다고 둘러대면 괜찮을 텐데요.”

“그, 그건 안 되죠! 말도 없이 불참하는 건 엄청난 실례잖아요. 게다가 겨울도 아닌데 무슨 감기를….”

에리얼이 난색을 표하며 손을 내저었다. 저 남자는 말투가 늘 한결같아서 장난인지 아닌지 도통 가늠할 수가 없다.

“사교계에서 떠도는 말들은 익숙하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백작님께 누가 될까 봐 그게 걱정이에요.”

“누가 부인을 앞세워 저를 깎아내릴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어내며 베르트발드가 짧게 웃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단호한 어조에 에리얼이 미심쩍은 표정을 떠올렸다. 백작님이 뭘 몰라서 그러시나 본데, 하는 눈치에 베르트발드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선점했다.

“여태까지 곁에서 지켜본 결과 부인께서는 저를 대단히 과소평가하고 계신다 사료됩니다. 제가 그냥 길가에 굴러다니는 백작 나부랭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 그게, 그럴 리가요.”

길가에 백작이 어떻게 굴러다니겠어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에리얼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팔짱을 낀 채 창밖을 쳐다보던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에리얼과 시선을 마주했다. 차분한 얼굴 위로 짓궂은 빛이 머물렀다.

“혹시 원로원의 개념을 아십니까.”

“어… 폐하의 영광을 빛내는 정치 의결 기구요.”

“그렇습니다. 영지를 지닌 귀족들이 모여 나랏일을 의논하는 곳이지요. 원로원에 등재된 귀족이 대략 300명입니다. 그 300명 중에서 장악력이 큰 귀족 100명을 차출해 백인의회를 엽니다. 그게 현 의회의 기초인 건 아시겠지요.”

조곤조곤하게 설명하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욱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에리얼은 착한 학생에 빙의해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렇게 의회에 소속된 가문 중에서 법무관 열둘, 감찰관 두 명을 뽑지요. 감찰관은 단기직이니 논외로 치고. 법무관이 뭘 하는 사람인지 아십니까?”

“네! 제국법에 따라서 판결을 내리는 판사님이시잖아요. 일을 중재하기도 하고 조정하기도 하고… 의회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역시 견문이 넓으시군요. 맞습니다. 법무관은 제정된 법에 의거해 일을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법은 누가 만들까요.”

“음… 집정관이요.”

베르트발드가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뜬 채 싱긋 웃으며 ‘맞습니다.’ 대꾸했다.

“정치 구조에 꽤 해박하시군요. 의회에서 가결된 사항을 확정하는 게 집정관의 일이지요. 그럼 집정관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에리얼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베르트발드는 미소를 띤 채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의 집정관이 집정관 회의에서 찬반투표를 통해 일을 처리합니다. 주요한 안건은 만장일치가 나오지 않으면 대부분 부결되곤 하지요. 사실 하는 일 자체는 크지 않습니다만 주요 안건을 두루 살피는 게 꽤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뜻밖의 정보에 에리얼이 입을 벌리고 작게 감탄을 뱉었다.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집정관이 세 명인 거였구나. 그냥 수석 집정관이 가장 높은 직위라고 하길래 혼자서 다 결정하는 줄 알았거든요.”

베르트발드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떠보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집정관과 수석 집정관의 차이를 아십니까.”

“음, 수석 집정관은 유일하게 군사 지휘권을 가지고 있어서… 제국군을 움직일 수 있다고 들었어요. 의회의 승인을 얻으면 황권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권력이 너무 강해서 공석인 경우도 자주 있었다고 들었는데….”

눈을 깜박이던 에리얼이 고개를 들어 눈앞의 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와 눈이 마주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빤히 에리얼을 쳐다보던 베르트발드가 건조한 음성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게 부인의 남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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