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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20화 (20/145)

20화

…아니, 아직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함락시키기 위해서도 직위는 필요하니까.

입매를 비스듬히 끌어당겼다. 반쯤 감은 눈매 위로 금색과 은색을 섞은 듯한 고운 속눈썹이 섬섬하게 내려앉았다. 벽에 장식된 백열석이 그 수려한 얼굴 위로 우아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매혹적인 외모에 화사한 미소. 상대의 경계를 푸는 데에는 이만큼 좋은 무기가 없었다. 다만 가장 중요한 상대인 에리얼에게는 이 무기를 써먹을 수 없다니 매우 아쉬울 따름이었다.

“부인, 베르트발드입니다. 들어가도 괜찮습니까.”

노크하며 묻자 ‘네에.’ 하고 작은 대답이 이어졌다. 베르트발드는 작게 헛기침을 내뱉고서 차분한 발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회상할 때의 모습과 같이 에리얼은 창가에 앉아 뜨개질감을 쥐고 있었다.

쓸데없는 가구와 장식을 배제한 방은 층고가 높아 파하르의 방보다 훨씬 더 넓어 보였다. 때문에 원래도 자그마한 에리얼의 체구가 상대적으로 더욱 작아 보였다.

“백작님. 지금 오셨나 봐요.”

창가 구석에 등을 기대고 있던 에리얼이 살짝 몸을 틀어 베르트발드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몸을 돌린 순간 그녀의 허벅지 참에 얹혀져 있던 실뭉치가 베르트발드의 발치로 데구루루 굴러왔다.

난감한 얼굴로 뜨개바늘을 만지작거리던 에리얼은 베르트발드가 실뭉치를 집어 건네자 활짝 핀 얼굴로 재차 말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뜨개질을 하고 계셨나 봅니다.”

“네. 습관적으로 숄을 뜨려고 했는데 남부는 따뜻해서 필요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테이블보로 변경했어요.”

그녀가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뜨고 있던 테이블보를 살짝 들어 올렸다. ‘포도 무늬로 만들었어요. 예쁘죠?’ 중얼거리며 밝은 얼굴로 수다를 이어갔다.

“밖에 나가고 싶다고 했더니 빌헬름이 갖다 주더라고요. 앞이 안 보이니까 뜨개질이 취미라고 하면 대부분 깜짝 놀라는데… 뜨개질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참 신기해요.”

“그렇습니까. 뭐 집사로서 주인의 취미나 기호를 알아내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빌헬름도 부인께 관심이 많았나 보군요.”

뜨끔한 기색도 없이 베르트발드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동의하듯 에리얼이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목소리가 무뚝뚝해서 저를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빌헬름 정말 친절해요. 식사도 간식도 제가 좋아하는 것만 챙겨줘요. 오늘 저녁 식사로 뭐가 나왔는지 아세요?”

“뭐였습니까?”

“말린 돼지비계를 넣은 물만두요!”

에리얼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고서 츄릅 침을 삼켰다.

“쫄깃하게 볶은 버섯이랑 겨울 시금치도 잔뜩 넣어서… 정말 얼마나 맛있었는지 몰라요. 백작님은 드셔보셨나요?”

“처음 듣는 음식이군요.”

“역시, 백작님도 모르시는구나. 돼지비계 물만두는 북부에서도 겨울에만 주로 먹거든요. 수도 사람은 모르는 음식일 텐데… 그런데 오늘 먹은 건 공작성에서 먹던 거랑 맛도 똑같았어요.”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과연 빌헬름이었다. 물만두로 주인마님을 공략할 생각을 할 줄이야.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얀셀가의 집사다웠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무슨 맛일지 궁금하군요.”

베르트발드는 흐뭇하게 웃으며 에리얼이 앉아 있던 창가 옆에 허리를 기댔다. ‘그런데 겨울도 아닌데 시금치를 어디서 구했을까요?’, 손을 꼼지락거리며 즐겁게 재잘대는 그녀가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기억 속의 모습과 흡사하게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에리얼의 모습이 왠지 허상 같았다. 눈앞의 그녀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키가 콩알만큼 더 커진 것 외에는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회상과 다른 점이라면 그때와 달리 길게 머리를 풀고 있다는 것과 어깨에 숄 대신 모포를 두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에리얼은 북부 출신답지 않게 추위를 많이 탄다. 계속 창가에 있는 게 걱정되어 그녀 주변에 꼭 모포를 갖다두라 일렀는데, 비에타라는 하녀가 제 말을 충실히 이행한 모양이었다.

에리얼.

에리얼 아이기스.

“…는 저녁에 나와서. 깜짝 놀랐는데요. 뭔가 했더니….”

아니.

지금은 에리얼 얀셀이지.

내 성을 따르고 있는 내 가족, 내 부인.

…내 여자.

“…래서요, 비에타랑 같이 잎을 말려서….”

입꼬리가 자꾸 위로 움직여 턱에 바짝 힘을 주었다.

에리얼 얀셀.

얀셀이라는 성이 마음에 든 건 생전 처음인데.

“백작님? 듣고 계세요?”

회상에 젖어 있던 베르트발드가 옆으로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을 바라보는 에리얼을 마주하고서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 예, 그러셨습니까.”

“…백작님. 제 얘기 안 듣고 계셨나 봐요.”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베르트발드의 시선은 에리얼의 얼굴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하얀 얼굴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목구비는 정말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동그란 코끝에 시선을 둔 채 베르트발드는 뭐라고 운을 떼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러던 중 타이밍 좋게 하녀들이 음식을 갖고 방 안에 들어왔다.

로스트비프를 넣은 샌드위치와 치즈를 얹은 크래커, 갓 구워 낸 따끈따끈한 머핀과 새콤한 향이 물씬 풍기는 버찌잼. 그리고 달콤한 우유 냄새가 가득한 연유 쿠키가 차례차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코코아와 물, 테이블 냅킨과 식기까지 세팅을 마친 하녀들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조용히 밖으로 물러났다.

“어라, 차 마실 시간도 지났는데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가져왔지?”

뭔가 싶은 얼굴로 테이블 위의 음식을 쳐다보던 에리얼이 퍼뜩 놀란 표정을 떠올렸다.

“혹시 백작님. 아직까지 저녁 식사를 안 하신 거예요?”

“식사 시간에 맞춰서 저택에 돌아오려고 했는데 일 때문에 시간이 계속 밀려서 말입니다. 차와 다과도 함께 내오라 일렀으니 괜찮다면 부인께서도 함께 드시겠습니까.”

“저는 아까 먹어서 괜찮은데요….”

거절하려던 순간, 에리얼이 그의 첫마디를 되새겨 보았다.

식사 시간에 맞춰서 돌아오려고 했다, 이 말은 여태까지 일부러 자신을 방치하던 게 아니라는 반증이었다.

시큰둥한 얼굴로 예, 예, 대답만 하던 백작에게 살짝 빈정이 상하려고 했는데, 뜻밖의 말을 들으니 그 시큰둥한 반응도 피곤해서 그랬나 보다 하며 저절로 합리화가 되었다.

내가 귀찮은 건 아닌가 보다. 결론을 내린 에리얼이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조금만 먹을게요.”

“그렇습니까. 그럼, 잠시.”

“제가 아래… 으앗! 배, 백작님!”

서슴없이 허리를 붙드는 손길에 에리얼이 히익,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베르트발드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에리얼을 덥석 안아 들고서, 꿈틀거리는 몸을 강하게 눌러 압박한 뒤 성큼성큼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푹신푹신한 1인용 소파에 에리얼을 내려놓고서 베르트발드는 재빨리 쿠키와 찻잔 등을 그녀 앞에 대령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어… 어어….”

에리얼의 잿빛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몇 발자국 되지도 않는 거리를 굳이 안아서 옮기다니.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눈앞의 남자가 워낙 태연한 것 같아서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버버거리는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아직도 부기가 빠지지 않았나 봅니다. 제가 곁에 있을 때에는 안아서 모실 테니 가급적 걷지 마십시오.”

에리얼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진한 붉은색의 인영은 아무런 미동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안아서 모신다니, 농담인 줄 알았는데 농담이 아니었던 건가. 에리얼은 간신히 말을 쥐어 짜냈다.

“저도 걸을 수 있, 아니 그보다! 숙녀를 이렇게 번쩍번쩍 안아 들면 못 써요.”

“부인을 안으면 안 됩니까?”

“다, 당연하죠…!”

고개를 삐딱하게 세운 베르트발드가 몇 초쯤 에리얼을 응시한 뒤 평연한 어조로 대꾸했다.

“부인께서 아직 자아 성찰의 시간이 부족하셨던 모양입니다. 부인께서는 숙녀이기 전에 얀셀가의 안주인입니다. 저는 부인의 반려자이고, 함께 후계를 생산해야 할 의무가 있지요.”

베르트발드가 샌드위치를 내려놓고서 찻잔으로 손을 뻗으며 말을 이었다.

“안아 드는 것도 부끄러워하시면 부부 관계는 어찌하려고 그러십니까.”

에리얼이 입을 벌린 채 멍청한 얼굴로 베르트발드를 쳐다보았다. 늘 새하얗던 얼굴 위로 진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그냥, 그게, 갑자기 안으시면 깜짝 놀라니까.”

“이 정도로 깜짝 놀라시면….”

베르트발드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천천히 놓았다. 에리얼을 담고 있던 푸른 동공이 내려온 눈꺼풀로 인해 종적을 감췄다. 이윽고 끄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밤에 제가 할 일을 말씀드리면 실신하실지도 모르겠군요. 역시 당분간은 이대로.”

옅은 조소로 말을 마무리한 뒤 베르트발드가 다시 샌드위치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음식을 입에 집어넣으며 무심한 얼굴로 에리얼을 쳐다보았다.

그의 부인은 눈만 깜박이며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원래도 식욕이 없었지만 지금 옆에 앉아 있는 그녀를 쳐다보니 식욕보다 훨씬 큰 욕망이 스멀스멀 치밀어 올랐다. 물론 그 욕구가 뭔지 모를 만큼 베르트발드는 풋내기가 아니었다.

밥이고 뭐고 테이블 위의 잡기를 다 쓸어버린 다음, 저 작은 몸을 이 위에 눕혀서….

아니, 아니지. 아니야.

욕구불만인 풋내기도 아니고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눈매를 찡그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거기까지. 더 이상 가면 안 돼.

제게 온전히 기대오기 전까지는 손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마음이 없는데 억지로 안아 봤자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상념을 떨치고 입 안의 샌드위치를 꾹꾹 씹었다. 지금 나는 배가 고픈 거다, 스스로 세뇌하며 마지막 샌드위치 조각을 입에 털어 넣은 순간, 작은 속삭임이 귓바퀴를 스쳤다.

“그럼 저랑 그… 그러고 싶으시다는 뜻… 인 거죠?”

손가락을 조물거리며 수줍게 내뱉은 말에 베르트발드가 움직임을 멈췄다.

에리얼이 슬그머니 눈동자를 들어 파동이 이는 붉은 인영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처럼 감정이 보이면 좋으련만 눈앞의 남자는 붉은색뿐이라 속내를 알 수가 없어 곤란했다.

꿀꺽 침을 삼킨 뒤 더욱 작은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백작님께서 저랑 닿기 싫어서, 그래서 그런 게….”

“부인께서는.”

말을 자르는 나지막한 저음 속에서 뭔가 억누르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에리얼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그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 속된 말을 해서 화를 내는 건지, 아니면 무슨 소리냐고 타박하려는 건지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짧은 침묵 끝에 이어진 말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생면부지의 사람과 살을 섞는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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