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나도 참.”
슬퍼지려던 순간, 스스로가 웃겨서 에리얼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슬플 게 뭐가 있을까. 홀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백작님은 좋은 사람인 걸.
잘난 것도 하나 없으면서 바랄 걸 바라야지. 대체 언제쯤에야 철이 들까.
“마님. 찜질 좀 해드릴게요.”
비에타의 낭랑한 목소리가 우울에 잠겨 있던 에리얼을 현실로 끌어 올렸다.
비에타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대야를 협탁에 내려놓고 창가에 앉아 있는 에리얼을 어린아이인 양 질질 끌어 침대 위에 앉혔다.
“좀 어떠세요? 아직도 시큰거리세요?”
“괜찮은 것 같아. 이젠 통증도 거의 사라졌거든.”
비에타가 에리얼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붕대로 감싸인 발목을 신중하게 짚었다. 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방긋거리던 표정 대신 엄숙한 표정으로 발목을 어루만지더니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많이 나으셨어요. 걷는 것도 많이 좋아지셨고. 의원에게는 안 가봐도 되겠는데요.”
“응. 살짝 삔 거라서 금방 낫는다고 했잖아. 찜질도 괜찮아.”
“그나마 찜질해서 부기가 빨리 가라앉은 거예요. 어디, 이쪽으로 누워보세요.”
“비에타, 잠시… 으앗!”
비에타는 거침없이 등을 밀어 에리얼을 눕힌 다음 능숙한 솜씨로 붕대를 풀었다. 그리고는 제 팔목보다 가느다란 발목을 덥석 붙잡고 뜨거운 수건을 둘둘 감은 뒤 그 위를 다시 도톰한 천으로 덮었다.
‘와, 엄청 빠르네.’ 숙련된 손길에 에리얼이 자신도 모르게 작은 감탄사를 뱉어냈다. 과연 남동생이 다섯 명이나 있는 집의 장녀다웠다.
비에타는 들춰낸 드레스 자락을 다시 조심스레 정돈하며 작은 탄성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맞다, 맞다. 마님께 편지가 왔어요.”
“나한테? 내게 올 편지라고 해 봤자 우리 집뿐일 텐데. 혹시 아이기스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니?”
“아뇨. 집사님께 듣기로는 황궁에서 온 거라고 하던데요.”
“황궁에서?”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후다닥 밖으로 나간 비에타가 정중한 손길로 은쟁반을 들고 다시 방에 들어섰다. 쟁반에는 하얀 봉투 하나와 페이퍼 나이프가 놓여 있었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에리얼이 쟁반 가운데에 놓인 편지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으로 표면을 쓸어보자 울퉁불퉁한 실링의 감촉이 느껴졌다. 제라늄꽃이 그려진 방패. 정말로 황가의 인장이었다.
“백작님께 잘못 온 거 아니야?”
“아뇨. 가주님께는 별도로 편지가 왔어요. 두 분께 각각 따로 온 것 같아요.”
“이상하네… 이 시기에는 황궁에 아무 행사도 없을 텐데.”
에리얼은 고개를 갸웃하며 봄에 열리는 행사들을 머릿속으로 나열했다.
첫 파종 시기에 열리는 수확 기원제 하나, 그리고 장미 꽃봉오리가 맺힐 때쯤 열리는 크리켓 대회. 크리켓 대회가 끝나면 곧바로 사교 시즌이 시작되고 황궁에서도 무도회, 다과회 등이 연이어 열린다.
하지만 초봄이 무르익어 가는 요즘은 아무 행사도 없었다. 아니, 아무 행사도 없어야 했다. 의회가 한창인 지금은 원로원 소속의 제국 귀족들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편지가 온 걸까. 에리얼은 잠시 고민하다가 쟁반 위에 편지를 내려놓았다.
“비에타. 네가 활약할 시간이야.”
“예?”
“글 읽는 연습 열심히 하고 있잖아. 이것 좀 읽어줘.”
“어… 그게. 이런 중요한 편지를 제가 읽어도 되나요?”
“나 혼자서는 읽을 수도 없어. 알잖아.”
에리얼이 눈매를 문지르며 씨익 웃었다, 그 태연한 미소에 비에타는 입을 일자로 다물고 아차 싶은 표정을 떠올렸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것 외에는 워낙 아무렇지 않게 저택을 돌아다니는 터라 그녀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꾸 깜박하고는 했다.
비에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편지를 뜯었다. 테두리를 금박으로 입힌 작은 엽서는 과연 황궁에서 온 물건답게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럴싸한 겉피와 달리 편지의 내용은 무척 짤막했다. 비에타는 작게 입을 벌린 채 한 글자 한 글자를 신중하게 읽어내렸다.
어디 보자… 생일? 단어가 조금 다른데.
이건 이름인가. 아, 이 이름. 어디서 들어본….
미간을 찌푸린 채 단어를 입으로 되뇌던 비에타가 느릿하게 서신을 읊기 시작했다.
“쿠델라이야… 헤스 반 드란델. 제2 황녀 전하의 생… 생탄제에 귀하를 초청합니다. 모쪼록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기를 바랍니….”
다. 마지막 말을 끝내는 비에타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비에타가 힐끔 에리얼의 표정을 확인했다. 에리얼은 평온한 얼굴로 ‘그게 끝이야?’ 되물었고 비에타는 굳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얼은 베개에 뒷머리를 푹 파묻고 천장으로 시선을 향했다.
황녀의 생탄제라.
황제면 몰라도 황족의 생일까지 참석해야 하는 걸까. 어머니께서는 이런 행사에 참석하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아니지. 공작 부인과 백작 부인은 격이 다르니까 그런 거일 수도 있고.
“가기 싫은데. 그래도 이제는 공녀가 아니라 백작 부인이니까 가야 되는 거겠지?”
“어… 글쎄요. 저도 이런 쪽은 영 몰라서….”
그냥 가지 마세요, 비에타가 입 안에 빙빙 맴도는 말을 삼키며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쿠델라이야 헤스 반 드란델.
제2 황녀의 이름은 평민인 비에타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사춘기 때부터 백작을 쫓아다녔다던 그 황녀는 백작이 사관학교에 입학하자 언제 쫓아다녔냐는 듯 조용해졌다. 그러나 방학 때, 백작이 파하르에 내려오면 자신도 휴양을 핑계로 남부에 내려와 하루가 멀다 하고 백작저를 찾아왔다.
비에타는 황녀를 만난 적 없지만 그 시기를 보냈던 하녀들 모두 한목소리로 ‘진짜 최악이었어’라며 황녀의 흉을 보곤 했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사용인들 입장에서는 황녀의 존재가 여간 버거운 게 아니었을 것이다.
황녀가 싫은 이유라 해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왜 하필 가주님을 넘봐서’로 귀결되는 걸 보면, 그냥 에리얼을 불편해하던 것처럼 이성으로서 견제하려는 행동이었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왠지,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드는데.
기분 탓일까.
비에타는 눈매를 찡그린 채 서신을 쏘아보다가 다시 에리얼에게 시선을 돌렸다.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에리얼은 침대 위를 뒹굴거리다가 이불을 확 뒤집어썼다.
‘빨리 발목이 나아야 할 텐데’, ‘버터 감자’, ‘이불 덮었더니 나른해진다’ 따위를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곧 아무 말도 없어졌다.
몸을 낮춘 비에타가 가만히 침대로 귀를 기울였다. 적막 사이로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이어졌다.
“마님. 주무세요?”
슬그머니 이불을 내리자 작게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에리얼의 모습이 동공에 들어찼다. 그 태평한 모습을 보니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서 비에타는 자신도 모르게 쿡 웃음을 터트렸다.
잠든 그녀를 제대로 눕힌 다음, 발목에서 미지근하게 식은 수건을 빼낸 뒤 다시 붕대를 단단히 감쌌다. 마지막으로 목 끝까지 이불을 덮은 다음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미온한 고요가 다시 방 안을 차지했다.
얕은 바람에 흔들리는 포플러 잎새가 창가에 어른어른 그림자를 자아냈다. 파상적인 그림자 너머로 파스스, 잎이 스치는 소리와 사용인들의 소곤거림이 한데 섞여 고요 속에 녹아들었다.
평화가 지배한 오후.
“쿠델라이야….”
그 속에서, 에리얼이 작은 속삭임이 먼지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 * *
베르트발드가 저택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저녁 어스름을 한참 넘긴 시간이었다.
가주의 귀환을 기다리던 집사가 상기된 얼굴로 ‘식사 준비를…’ 하고 운을 떼자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저었다.
의회가 시작되면 늘 이랬다. 먹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먹을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집사는 곁에 서 있던 하녀에게 샌드위치를 준비하라 이른 뒤 가주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수도 저택의 집사인 빌헬름은 집사라기보다는 그의 개인 비서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 시기쯤이면 베르트발드가 의회 때문에 꽤 예민하다는 것도, 잘 시간도 쪼개서 온종일 일에 매진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빌헬름은 자연스럽게 2층의 집무실 쪽으로 먼저 몸을 틀었다.
하지만 베르트발드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는 집무실 쪽으로 걷던 빌헬름에게 어딜 가는 거냐 타박하고서 피곤한 듯 미간을 문질렀다.
“정신 차리게, 빌헬름. 부인께서는 방에 계신가?”
“예. 쉬고 계실 겁니다.”
“부인께 별일은 없었고?”
“예. 다만 퍽 답답해하시는 것 같아 가주님께서 해 주신 조언대로 뜨개질감을 드렸습니다.”
“어떻던가?”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솔직히 어떻게 뜨개질을 하실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손으로 더듬어가면서 무늬를 확인하시더군요.”
베르트발드는 창가에 앉아 부산스레 뜨개질바늘을 움직이는 에리얼을 떠올렸다.
층층 땋은 검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늘어뜨린 채 어깨에 숄을 걸치고, 삐쭉 입을 내민 채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
공작저에서 몰래 훔쳐보던 그 모습을 이제 눈앞에서 당당히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베르트발드는 입매를 손으로 쓸어 웃음을 억누르고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빌헬름을 돌아보았다. 한 치의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여느 때처럼 고고하고 지적인 가주의 얼굴이었다.
“부인 방으로 식사와 차를 갖다 주게. 간식도. 차는 생크림 넣은 코코아와 커피, 간식은… 저녁 식사로 혹시 감자가 나왔던가?”
“예, 식사 때마다 꼭 챙기고 있습니다. 조리법을 다양하게 해서 드리고 있습니다만 구운 감자를 가장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항상 무표정하던 빌헬름의 얼굴 위로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떠올랐다. 잘 먹는 백작 부인을 몹시 귀여워하는 중인 집사였다.
베르트발드는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안다는 듯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머핀과 버찌잼, 혹시 있다면 연유 쿠키를 부탁하지.”
“식사는 뭘로 준비할까요?”
“내 건 아무거나 괜찮아.”
평소처럼 담담한 어조였지만 조목조목 지시하는 태도에 서두르라는 기미가 엿보였다.
가주의 조급함을 눈치챈 빌헬름이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그를 주시하던 베르트발드가 다시 에리얼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도에 올라온 이후로는 새벽같이 의회당으로 출근하는 터라 아침에는 에리얼을 만날 수가 없었다. 저녁 식사만큼은 꼭 같이하고 싶었는데 귀찮게 물고 늘어지는 노인들이 어찌나 많은지 대응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애써서 얻어낸 집정관 자리가 지금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족쇄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