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는 우위에 올라서기 위해서 자신의 외모와 배경, 재력, 능력 모든 것을 이용했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흠모하는 사람이라면 여성도 남성도 가리지 않고 홀려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본 순간 본능적으로 거리감을 계산한다. 이 사람이 어디까지 나와 가까워질 수 있을까? 베르트발드는 그 점을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는 완벽한 매너와 함께 미묘한 여지를 남기고 상대를 대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매력에 홀린 사람들은 자진해서 그의 충신이 되곤 했다.
그렇게 매료된 이들은 그의 체스말로 이용당한 뒤 버려졌다.
일찌감치 작위를 승계받고 최연소 집정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이용해 자리에 올라섰다. 빈틈없이 완벽한 베르트발드의 이면은 사실, 텅 비어 있었다. 그에게 사람이란 그저 체스말이었다.
허, 순정남?
그 장님 공녀와 결혼한 이유도 아이기스 공작을 이용해 황실을 견제하려는 목적일 터다. 결혼조차도 집안끼리의 배신을 견제하는 제도일 뿐이라던 사람이 순정은 무슨 순정.
누가 누구에게 순정을 운운하는 건지.
펠만이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눈길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차가운 눈빛으로 베르트발드를 흘겨보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훌쩍 큰 키 때문에 눈까지 시선이 닿지가 않았다.
축복이란 축복은 다 받아 처먹었다니까. 아침마다 예배도 거르는 주제에.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아이기스 공작은 왜 온 건가요? 어차피 의회에서 볼 텐데.”
같은 집안 사람이 되었다고 인사라도 하러 온 건가? 하지만 아이기스 공작의 오만한 성격을 생각하면 자신이 있는 곳으로 베르트발드를 부르면 불렀지 스스로 솔선해서 집무실에 올 만한 인간은 아니었다.
“부인께 전언이 있다고 하시길래 잠시 뵈었지. 애지중지하던 딸을 타지로 보내 각하께서도 걱정이 많으신가 보더군.”
미간을 좁힌 채 진지한 어조로 말하는 통에 비아냥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졌다.
무슨 소리냐 싶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펠만을 등진 채, 베르트발드가 먼저 대기실에 들어섰다.
작은 서재형 구조의 대기실 벽에는 엄청난 수의 법전이 빼곡히 들어차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이 특별한 장소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켰다.
두 명의 집정관은 이미 채비를 마치고 나간 건지 대기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이온은 익숙한 손길로 벽에 걸린 의복을 꺼내 베르트발드에게 내밀었다.
다른 집정관들이 입는 푸른 의복과 달리 베르트발드의 의복은 짙은 붉은색이었다.
군사 지휘권을 지닌 유일한 집정관의 표식, 수석 집정관의 색.
붉은색.
베르트발드는 걸치고 있던 재킷을 바이온에게 넘긴 후 성의 없는 손길로 의복을 걸쳤다.
마지막으로 검은 장갑에 손을 집어넣은 순간 대회의장과 이어진 복도에서 유리를 치는 듯한 맑은 소리가 흘러들었다. 풍경 소리였다.
“다녀오십시오. 백작님.”
깊게 허리를 숙이는 바이온, 그 옆에서 손만 살랑살랑 흔드는 펠만에게 베르트발드가 수고하라는 눈짓을 전했다.
느슨하게 접혀 있던 눈매가 한결 또렷한 빛을 품고 정면을 응시했다. 베르트발드는 옷깃을 정돈한 뒤에 홀로 풍경이 울리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의회 개최를 촉구하는 풍경 소리는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수석 집정관이 개최를 알리기 전까지 계속 울릴 소리이기도 했다. 자신을 부르는 고아한 음색에 문득, 에리얼의 리라 소리가 떠올랐다.
“솜씨가 꽤 괜찮았는데. 또 들려달라고 해 볼까.”
이번에는 좀 더 밝은 노래로.
가지런히 머리를 쓸어올린 뒤 곧은 자세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풍경 소리, 천천히 가까워지는 웅성거림. 대회의장에 한 발자국 가까워질수록 난잡스러운 생각과 감정들 모두가 보이지 않는 심연 속으로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래. 오늘.
돌아가면 연주를 들려달라고 하자. 활짝 웃으면서 ‘어떤 노래 좋아하세요?’라고 되묻겠지. 그럼 나는 노래 대신….
…좋군. 아주 좋아.
결정과 동시에 머릿속에 남아 있던 상념을 깨끗이 비웠다. 베르트발드는 허리를 곧추세운 뒤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회의장에 입장했다.
반원 모양의 대회의장 내에는 주요 원로원 삼백 명이 모두 자리에 착석한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원로원 대부분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이었지만 드문드문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귀족들도 있었다.
물론 젊은 귀족의 대부분은 의결권 없이 거수권만 가진 낮은 권위의 귀족들이었다.
그와 비슷한 또래에 의결권을 가진 귀족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20대에 집정관까지 이른 이는 제국 역사상 베르트발드가 유일했다. 어지간한 천재가 아닌 이상 앞으로도 유일할 것이다.
풍경 소리가 멎었다, 베르트발드는 의례적인 웃음을 띤 채 의장석이 있는 단상 위로 올라섰다.
양옆에 앉아 있는 집정관들에게 가벼이 묵례한 후 베르트발드가 의장석 중심에 서서 우아한 손길로 성호를 그었다.
의회에 그 어떤 부정적인 개입도 없으리라는 의식 다음으로 수석 집정관의 나직한 선포가 이어졌다.
“제322회 정례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주시기 바랍니다.”
* * *
수도 드란델의 중심가는 황궁과 의회당이 있는 북쪽이 아닌 남쪽의 다벨 상업 지구였다.
정비된 도로 곳곳에 수도의 상징인 제라늄이 피어 있고 희귀 광물인 백열석이 가로수 아래 매달려 사시사철 밝은 빛을 뿜어냈다.
그 아래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밤낮없이 바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은 해가 지지 않는 도시라는 드란델의 명성이 과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상업 지구 너머 아틀리에가 즐비한 예술의 거리를 올라가면 포플러 나무가 늘어선 작은 언덕이 나온다. 다이아몬드 힐즈라고 불리는 이 언덕은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인 다벨 지구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가까운 입지 덕택에 많은 부호들이 이곳에 저택을 장만했고, 얀셀가의 수도 저택인 화이트 하우스 또한 이곳에 있었다.
“향기가 나.”
창가로 흘러드는 은은한 향기에 에리얼이 코끝을 쫑긋거리며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포플러 나무의 그림자들이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너울너울 시야를 어지럽혔다.
시야를 내려 정원을 봐도 온통 회색빛 그림자들 뿐이었지만, 향기의 발원지는 정원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했다.
“공작성에서도 이거랑 비슷한 향기의 꽃이 있었는데.”
북부에서만 피는 꽃인 줄 알았는데 수도에서도 피는 걸까? 운이 좋네.
뜻밖의 행운이라 생각하며 에리얼이 창가 위로 폴짝 뛰어 앉았다. 향긋한 꽃내음에 이어 초록의 싱그러운 향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봄이구나.
손을 내려 창틀에 새겨진 부조를 슬슬 쓸어보았다. 그랑파하르의 백작저에도 포도 덩굴무늬가 새겨져 있더니 지금 이 창틀에도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백작저의 상징은 세이렌이라고 했는데, 여기저기 새겨진 포도 덩굴무늬는 그냥 선대의 취향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장식용인 걸까.
…그래. 그냥 장식용일지도.
지나친 사치를 지양하는 여느 귀족들의 저택과 달리 다이아몬드 힐즈의 저택들은 온갖 자재들을 동원하여 호화찬란하게 지어져 있었다. 이 저택도 그를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것 같았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에리얼도 저 현관 앞의 분수와 유리 정원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에리얼은 양 무릎을 꼬옥 끌어안고 생각에 잠겼다.
백작님은 어떻게 돈을 버는 걸까?
무역항에서 꽤 많은 세금을 걷는다고 듣긴 했는데. 영지민들에게 걷는 세금과 그렇게 차이가 큰가?
발가락을 꼼질거리며 생각의 편린을 맞춰가던 중, 저 멀리 정원 입구에서부터 도도도 달려오는 작은 실루엣이 보였다.
에리얼은 가늘게 좁아 든 눈으로 다가오는 이를 유심히 관찰했다.
2층의 정중앙, 그것도 창틀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현관으로 달려오는 잿빛 실루엣이 점차 선명하게 보였다.
“우체부였구나.”
머리에 납작한 무언가를 쓰고 손에는 네모진 무언가를 들고 달려오는 사람.
하지만 이 작은 우체부의 특이한 점이라면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커다란 자루가 보이지 않는 점이었다.
자세히 보니 옷자락이 펄럭이는 모양새가 여느 우체부 아이들과는 다른 것 같았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아마도 귀족가에서 일하는 페이퍼 보이일지도 모르겠다.
“맞다. 어머니께 쓴 편지도 빨리 보내야 하는데.”
아니지. 일단 발부터 빨리 나아야지.
수도에 올라온 지 이틀째. 퉁퉁 부어 있던 발목은 많이 가라앉았지만 아직 제대로 걷는 건 무리였다.
어차피 평소에도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터라 움직이는 데 무리는 없었지만, 조금만 걸어 다녀도 사용인들에게 붙들려 방으로 끌려오기가 일수였다. 베르트발드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완치되기 전까지 절대 걷지 못하시게 해라. 정원은 특히 위험하니 저택 안에서만 모시도록 하고.」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꽤 훈훈한 분위기였는데, 단호하게 못 박는 모습에 에리얼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걱정하는 것 같은 말이었지만 실상은 연금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게다가 정작 자신은 저택에 가둬두고 백작은 일을 핑계로 얼굴도 내보이지 않았다.
…이럴 거면 상냥하게 굴지나 말지. 괜한 오해를 할 뻔했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의 호의를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슬프게도 에리얼이 받는 호의의 대부분은 순수함이 결여된, 공녀라는 입장과 동정심에 기반한 호의뿐이었다.
그런 형식적인 친절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물론, 에리얼도 원하지 않았다.
위선. 언젠가 그웬이 사전에서 그 단어의 뜻을 알려주었을 때 에리얼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베푸는 이유 없는 친절이 모두 위선이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걸 위선이라 규정하지 않고 선의나 호의라는 말로 포장했다. 불쌍하게 태어난 장님 공녀는 그들의 호의를 받아줘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백작님은 다를 줄 알았는데.
그 사람도 그냥 형식적으로 나를 대하던 것뿐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