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백작님! 부인께서 다치셨다고요?”
에리얼의 방 앞에서 치료가 끝나길 기다리던 중, 소식을 들은 셰인이 놀란 얼굴로 베르트발드에게 뛰어왔다.
함께 달려온 바이온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방 안을 살피며 물었다.
“어쨌든 크게 다치신 건 아닌 것 같아 안심입니다.”
“그래. 그런데 발목이 부어서 당분간은 요양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
“저런…. 안 그래도 몸이 불편하신데 걷는 것도 요원해지시다니….”
씁쓸한 어조로 셰인이 중얼거리자 바이온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셰인의 옆구리를 툭 쳤다. 뒤늦게 실수를 알아차린 셰인은 아차 싶은 얼굴로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원래도 건강하시니 금방 나으시겠지요! 평소에도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으니, 따로 지팡이를 살 필요는 없겠습니다, 하하.”
“…….”
“…….”
바이온과 베르트발드, 두 쌍의 차가운 눈빛이 여과 없이 셰인에게 쏟아졌다.
눈치 없는 셰인의 발언을 항상 묵과하던 베르트발드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용인되지 않던 모양이었다. 셰인은 한기가 느껴지는 시선을 외면하며 그냥 닥치고 있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이온은 조금 누그러진 눈빛으로 셰인을 쳐다본 다음 포켓에서 시계를 꺼내 들었다.
“백작님. 부인께서 당하신 사고는 무척 유감입니다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출발할 채비를 서두르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좋든 싫든 오늘 안에는 수도로 출발해야 한다. 베르트발드는 미간을 찡그린 채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저런 농을 대해며 가기 싫다 했지만, 의회에 집정관이 불참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하지만 에리얼이 마음에 걸렸다.
수도로 가는 이상 아무리 직무를 빨리 해치운다 해도 한 달은 머물러 있어야 할 터였다. 영지로 오자마자 쓸데없는 칙령 때문에 시간을 허비했는데, 또다시 한 달이나 떨어져 있어야 하다니.
이걸 어쩐다….
마음 같아서는 에리얼도 함께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그게 영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귀족가의 새 안주인이 들어오면 그동안 집안을 관리하던 집사에게 저택 내정에 관한 인수인계를 거쳐야 한다.
저택과 관리할 재산목록과 사용인 관리를 거쳐 영지 운영에 관한 일들과 제식 관련 일까지. 모든 인수인계가 끝난 뒤 저택 지하의 납골당 열쇠를 받는 게 귀족가의 보편적인 절차였다. 그 과정이 끝나야 비로소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사용인들에게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에리얼은 눈이 보이지 않았다.
장부를 쓸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기에 집사인 레오도 그녀에게 인계할 직무들을 유보해둔 상태였다.
게다가 남부에 내려온 지 보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은 낯선 곳에 적응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써도 모자랄 때였다.
베르트발드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이걸 어떻게 둘러대면 좋을까.
그리고 잠시 후, 집사와 하녀장을 소환했다.
“가주님.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백작 부인의 사고에 대해 호통을 들을까 싶어 잔뜩 주눅 들어 있던 에바가 눈치를 살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눈앞의 도련님이 어린 시절부터 상벌에 엄격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저 푸른 눈동자가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낼 때면 반드시 추궁이 날아오리라는 것도 잘 알았다. 마치, 지금처럼.
“큰일은 아니고 제안할 게 있어서.”
물끄러미 에바를 쳐다보던 베르트발드가 옆에 서 있던 집사, 레오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매우 유감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부인을 수도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은데.”
입가를 가린 채 깊게 한숨을 내쉬며 베르트발드가 슬쩍 아래로 시선을 떨궜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는 듯 뜸을 들이다가, 미간을 좁힌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낯선 타향에 와서 고생 중이시건만. 눈도 불편한데 거동까지 힘들면 어찌 정을 붙이겠나. 당분간은 나와 함께 수도 저택에서 생활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닙니다, 가주님. 지금은 마님께서도 저택에 많이 익숙해지셨습니다. 이동하는 길이 고되어 괜히 덧나실까 봐 염려됩니다만….”
조심스러운 어조로 레오가 반박하자 베르트발드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에 동조했다.
“그래. 나도 그게 가장 걱정이었네. 하지만 수도까지는 이틀밖에 걸리지 않으니 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잖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수도에 아주 유명한 치료사가 있다는 말이 떠올라서 말이지. 귀족들에게만 예약제로 운영되는 곳인데 그곳에 부인을 모시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엇, 그런 곳이 있었습니까? 저도 소개 좀….’ 하며 셰인이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으나 베르트발드는 시선도 주지 않고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의회는 일주일 동안만 개최되니까 그 이후로 직무를 전부 마치면 한 달이 못 되어 다시 돌아올 수 있지. 레오, 자네에게 미안하지만 안주인의 교육은 좀 더 미뤄주었으면 하네. 이례적인 상황이지 않나.”
레오는 눈을 감은 채 하얀 턱수염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그 말대로 건강이 제일 중요하지 관례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레오는 가주의 말에 반박할 거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어떤 상황이든 마님의 건강이 최우선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미뤄야지요. 제 염려는 하실 필요 없습니다, 가주님.”
“이해해주니 고맙군. 당분간 저택을 잘 부탁하네.”
재빨리 말을 마무리한 베르트발드가 다시 에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에바.”
“예, 가주님.”
“비 때문에 수도로 가는 길을 우회해서 가야 할 것 같아. 파하르를 벗어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으니 부인과 둘만 바로 출발하는 게 좋을 듯싶은데. 급한 짐은 바로 준비해주고 나머지 짐은 후발 마차로 보내줘.”
“아, 예! 바로 준비하지요.”
명을 받은 하녀장과 집사가 채비를 위해 허둥지둥 자리를 벗어나고, 셰인도 대리인 인감을 가지러 간답시고 집무실로 돌아갔다.
방 앞에는 베르트발드와 바이온 두 사람만이 남았다.
방금 전의 소란이 무색하리만치 복도는 기이한 정적에 휩싸여있었다.
침묵이 어색했던 베르트발드가 자신도 모르게 슬쩍 고개를 돌리자 바이온이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눈초리를 그에게 쏟아냈다.
“수도에 아주 유명한 치료사가 어디에 있는지 저도 궁금하군요.”
“나도 몰라. 아픈 적이 없는데 내가 치료사를 어찌 알겠나. 데려가고 싶어서 대충 둘러댄 거지.”
“…고작 한 달을 떨어져 있기 싫어서 거짓말을 다 하십니까. 대체 어떻게 그 긴 세월을 견디셨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 긴 세월을 견뎠는데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어야 본전을 뽑지. 안 그런가?”
태연한 대꾸에 바이온이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에리얼 아이기스가 주군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 괜한 말을 했구나 싶었다.
오묘한 미소와 함께 바이온을 주시하던 베르트발드가 문득, 손가락 마디로 입술을 꾹 누르며 미간을 좁혔다.
“이런. 셰인에게 관세 변경안을 인계했어야 했는데 깜박하고 있었군.”
“아직 집무실에 있을 겁니다. 제가 전할까요?”
“아니. 분류 기준이 꽤 까다로워서 내가 직접 알려주는 게 낫겠어. 자네는 출발 준비를 서두르게. 아, 그리고 부인께도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해드리고.”
눈을 살짝 치뜬 채 ‘제가요?’ 하는 시선으로 주군을 돌아보았으나 그는 이미 등을 돌린 채 집무실 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바이온은 이마를 쓸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백작의 호위관이자 은밀한 일을 주로 맡는 업무 처리 분대의 대장으로서, 바이온은 주군 이상으로 에리얼을 잘 알고 있었다.
베르트발드가 그녀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한 이후 내내 에리얼의 사찰을 도맡은 사람이 바로 바이온이었으니까.
그녀가 즐겨 마시는 차, 좋아하는 과일, 신발 사이즈, 잠들기 전에 무슨 노래를 주로 흥얼거리는가 등등, 에리얼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감정이 드문 얼굴 위로 묘한 긴장이 서렸다. 바이온은 짧게 심호흡한 뒤 중후한 걸음걸이로 방 안에 들어섰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새카만 흑발에 위압적인 거구, 거기에 사나운 인상까지 더해져 바이온의 외양은 빈말로라도 호감 가는 타입이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바이온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도구를 정리하던 주치의가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바이온을 마주치는 사람이라면 으레 그렇듯, 주치의 또한 본능적으로 그의 사나운 인상에 겁을 집어먹은 게 분명했다.
바이온은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걸었다.
“치료는 다 끝난 것 같은데 따로 주의해야 할 사항은 없습니까.”
“아, 예에. 그, 단단히 고정해 놨으니 사나흘은 괜찮으실 겁니다. 가급적 움직임을 삼가시게 하고… 그, 다리를 높게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주치의는 재빨리 자리를 정돈한 뒤 의례적인 인사를 남기고 방을 빠져나갔다.
눈을 끔벅거리며 상황을 지켜보던 에리얼이 어떻게 운을 띄워야 할지 고민하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기… 누구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부인. 저는 백작님의 호위관인 바이온 쉬크네치드라고 합니다.”
“아, 호위관님! 저도 처음 뵙겠습니다.”
바이온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가 다시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혼담이 오갈 때 백작님의 전령으로 몇 번 뵈었습니다만. 기억나지 않으시나 보군요.”
에리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이온의 목소리를 뇌리에 상기했다.
누구였더라.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유난히 커다란 실루엣, 그리고 웅웅 울리는 허스키한 목소리. 뿌연 기억 속에서 바이온에 대한 정보가 둥실 떠올랐다.
“아, 아아! 꽃바구니와 약혼반지를 전해주신 분이시군요. 그냥 인사만 하고 가시길래 심부름꾼인 줄 알았는데 호위관이셨다니… 제가 무례했네요. 그때는 감사했어요, 바이온.”
“괜찮습니다. 그보다 저는 아랫사람이니 편히 하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머, 호위관은 무관 중에서도 아주 높은 직급이라고 들었어요. 아무리 제가 백작님의 안사람이라고 해도 함부로 하대할 수는 없지요. 저는 이게 편하답니다.”
바이온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참,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여자다.
저렇게 둘러대고 있지만 에리얼이 비슷한 또래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습관처럼 존대를 한다는 걸 바이온은 잘 알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거만하고 나쁘게 말하면 재수 없는 그 고고한 아이기스 공작에게서 저렇게 겸손한 딸이 나올 줄이야. 참 아이러니하다 생각하며 바이온이 화제를 돌렸다.
“편찮으신데 말씀드리기가 송구하지만, 부인께서는 지금 백작님과 함께 수도로 출발하셔야 할 듯싶습니다.”
“…네? 드란델에요?”
“예.”
“곧 의회 때문에 백작님께서 수도로 돌아가신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저도 같이요?”
“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에리얼은 그가 움직일 기색이 없어 보인다는 걸 깨닫고 아연해 물었다.
“지금 당장요?”
“예.”
“저는 여기 남아서 백작님 대신 영지 관리를… 아니, 아직 납골당 열쇠도 받지 못했는걸요.”
바이온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베르트발드의 말을 인용하기로 결정했다.
“방금 일어난 사고로 백작님께서 많이 놀라신 것 같습니다. 수도에 좋은 의원들이 많이 있으니 그곳에서 치료를 받게 하시려나 봅니다.”
에리얼은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리며 미심쩍은 기색을 내비쳤다.
이상하다. 굳이 수도로 가서 치료를 받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