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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13화 (13/145)

13화

“2황녀? 쿠델라이야 황녀?”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뻐끔거리던 셰인이 베르트발드와 바이온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떠듬거리며 말을 뱉었다.

“…어떻, 아니 황녀 성격에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긴 했는데.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근위병이야 어떻게 대응한다고 쳐도 황녀에게 칼을 들 수는 없지. 다행히 백작님께서 잘 돌려보내신 모양이긴 한데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를 일이지.”

바이온은 눈치를 살피듯 한결 낮아진 톤으로 말하며 베르트발드를 힐끗 주시했다.

베르트발드는 의자에 몸을 깊이 묻고서 미간을 짚었다.

“자네들이 나를 우둔한 상관으로 쳐다보는 일에는 이미 익숙하지만. 설마 그런 하찮은 일 때문에 수도에 가지 않겠다 떼를 쓰겠나. 뭐… 어느 정도 영향이 없진 않지만.”

축하해주러 왔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2황녀는 근위병들을 이끌고 당당히 상석에 앉아 베르트발드에게 웃어 보였다.

직위상, 그리고 황가에게 충성해야 하는 가신으로서 늘 상냥한 모습을 보여왔던 베르트발드였지만 그날만큼은 자신의 본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다그쳐놨으니 괜찮겠지. 폐하를 앞세워 피곤한 짓을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쿠델라이야가 머저리가 아닌 이상 수도에서까지 그런 미친 짓을 하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도록.”

잊고 있었는데 또다시 떠올리니 기분이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베르트발드는 미간의 주름을 꾹꾹 누르며 솟아오르는 분노를 다시 삼켰다.

그 결혼식이 어떤 결혼식인데 그걸 망칠 생각으로 찾아오다니.

소문의 장님 공녀가 제국의 집정관과 결혼한다는 소식은 무료함에 젖어 있던 제국 귀족들에게 아주 흥미로운 화젯거리가 되었다. 결혼식에 참석한 귀족들 반은 눈치로, 반은 호기심으로 온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베르트발드는 그들의 입을 닥치게 하기 위해서라도, 또 자신의 아내가 될 에리얼을 위해서라도 최고의 결혼식을 준비했다.

결혼식장과 피로연장의 인테리어는 명장으로 유명한 목수 비세르체와 휘하의 제자들에게 일임하고 꽃과 가구, 장식들은 세퍼에이드 상단의 배를 이용해 모두 수입품으로만 채웠다.

요리사들 또한 일류 레스토랑으로 유명한 포쉐앙의 쉐프 진들을 모두 초빙해서 플레이트 별로 따로따로 요리를 담아오게 했다.

그 밖에도 답례품, 초대장, 마차와 마부들, 주례를 맡은 성당의 기부금과 원로원 내의 축하 선물 등등….

이 모든 과정에 천문학적인 비용과 꽤 많은 노동이 들어갔지만 베르트발드는 개의치 않았다. 긴 세월 동안 에리얼을 제 품으로 끌어오기 위해 들인 노동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골 빈 황녀가 장애물이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망할 쿠델라이야. 입 안으로 욕을 씹어 삼킨 베르트발드가 한숨을 내쉬며 우아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농은 그만두고 일어날까. 싫어도 직무는 수행해야 입에 풀칠이나마 하고 살지 않겠나. 가족도 늘었으니 더 힘내야겠지.”

가난한 소작농이 할 법할 말을 나불대는 상관이 얄미워 셰인이 눈을 뾰족하게 세웠다. ‘백작님은 풀칠이 아니라 금칠이겠죠.’ 셰인의 투덜거림을 뒤로한 채 베르트발드가 겉옷을 집어 들었다. 출발하자는 뜻을 읽은 바이온이 집무실 문 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마님-!”

갑자기 창가로부터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모두 발걸음을 멈춘 상태에서 가장 먼저 베르트발드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창가로 달려간 셰인이 아래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흘리듯 말을 뱉었다.

“동쪽 정원수 아래에 사용인들이 모여있군요. 하녀장도 있고… 어라, 저 어린 하녀는 백작 부인의 전담 하녀 아닙니까?”

“전담 하녀? 부인께서는?”

“하녀만 있고 부인께서는 안 계시는 것 같습니다.”

안색을 굳힌 베르트발드가 다급히 창가로 다가가 셰인을 밀어냈다.

대여섯 명의 사용인들 모두가 놀란 낯으로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야를 따라 베르트발드 또한 재빨리 시선을 이동했다.

하얀 꽃이 가득 핀 나무 아래, 누군가가 웅크려 있는 모습이 시야 속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체구가 작은 걸 보니 여자인 듯싶었다.

설마 저게 에리얼은 아니겠지.

다시 눈을 돌렸다. 나무 그늘 바깥에 서 있던 에바가 사용인들에게 뭐라 지시하더니 허옇게 뜬 얼굴로 저택 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늘 품위를 우선시하는 얀셀 백작가의 하녀장이 저렇게 치마를 걷어 올린 채 뛰다니. 여간 다급한 일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에바가 한 발자국 도약할 때마다 베르트발드의 심장 박동도 쿵쿵 커졌다.

“느낌이 안 좋은데.”

방금, 마님이라고 하지 않았나.

앞이 안 보이는 문제 때문에 베르트발드는 밖에 나올 때에는 늘 전담 하녀가 그녀 곁에 붙어 있을 것을 명했다. 의중을 파악한 에바 또한 전담 하녀가 부재중일 시 자신이라도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겠다 말했고, 결과적으로 전담 하녀와 에바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에리얼 곁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백작님!”

셰인의 외침을 뒤로 흘리며 베르트발드가 집무실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긴 다리를 성큼성큼 뻗어 순식간에 계단을 내려와 1층에 도달했다.

별일 아닐 거라는 낙관적인 생각은, 무슨 일이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계획을 짜는 베르트발드의 본성과 충돌해 먼지처럼 산화되어 버렸다.

베르트발드는 바짝 굳은 표정으로 정원을 향해 뛰었다.

“가주님!”

회랑에 발을 내딛던 에바가 가주를 마주치고 화들짝 놀랐다. 베르트발드는 숨을 고르며 소란이 일어난 정원 쪽으로 눈길을 향했다.

“무슨 일이지?”

“그게, 사고가 나서요. 마님께서 지팡이를 주우시려다가….”

마님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베르트발드가 다시 정원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머, 가주님! 에바와 하녀들의 외침이 그의 귓가에 채 닿지도 못하고 허공에 흩어졌다.

꽃나무가 점점 가까워지고, 베르트발드는 쓰러진 이를 빙 둘러싸고 있던 사용인들을 모두 옆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바닥 한가운데에 몸을 웅크린 채 주저앉아 있는 에리얼을 발견했다.

“부인!”

“어머, 백작님?”

허겁지겁 뛰어온 게 무색하리만치 너무나도 평온한 말투였다. 베르트발드는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그녀의 상태를 눈으로 훑었다.

흐트러진 흑발에 나뭇잎과 나뭇가지들이 듬성듬성 꽂혀 있었다. 맑게 빛나던 하얀 피부 위에는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했고, 드레스도 옆쪽이 찢어진 건지 하얀 페티코트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그의 부인은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영원과도 같은 찰나가 지났다. 눈동자만 내려 그녀를 바라보던 베르트발드가 길게 숨을 내쉬며 가슴 부근을 어루만졌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감정을 숨기는 일에 능숙한 그답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목소리는 평소처럼 고요했다.

베르트발드가 한쪽 무릎을 꿇고 에리얼과 시선을 맞췄다. 잿빛 눈동자 속에 늘 그렇듯 무감한 표정의 자신이 비치는 걸 확인한 뒤에야 베르트발드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어제 천둥이 쳐서요. 여기, 나무줄기가 부러졌거든요.”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에리얼이 손가락으로 나무를 가리켰다.

흰 꽃이 만개한 플루메리아 나무 안쪽, 잔가지들을 지탱하는 줄기 두 개 중 하나가 빈자리로 남아 하얗게 나이테를 드러내고 있었다.

“위험할까 봐 메슈에게 가지 정리를 부탁했는데 지팡이를 깜박한 걸 깨달았거든요. 주우러 달려갔다가 하필이면 나뭇가지에 맞는 바람에.”

“정원사가 부주의해서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앗, 그건 절대 아니에요! 메슈는 계속 위험하니까 오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깜박하고….”

에리얼이 고개를 치켜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중 커다란 모자를 손에 든 채 진한 보라색 파동을 내뿜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정원사인 메슈일 텐데.

아, 있다.

회색빛 실루엣 한가운데에 아주 진한 보라색이 음파처럼 둥둥 울리고 있었다.

메슈를 확인한 에리얼은 표정을 굳히고 괜찮다는 눈빛을 전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내려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베르트발드를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백작님. 작은 나뭇가지에 스친 거라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어요.”

“외관은 그래 보입니다만 몸을 숙이고 계신 걸 보니 다른 곳은 괜찮지 않아 보이는군요. 다리입니까?”

“그게… 네. 피하려다가 발목을 살짝 삐끗해서요.”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그녀의 하체로 시선을 향했다.

패티코트 아래, 가느다란 발목에 시선이 닿은 순간 에리얼이 안색을 붉히며 슬그머니 발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곧 에그그, 앓는 소리를 내며 움직임을 멈췄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제지하며 베르트발드가 손을 들어 에리얼의 발목을 붙잡았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발목은 늘 안쓰러움을 동반하는 그녀의 눈동자처럼 어딘지 가녀리고 애처로워 보였다.

“윽…!”

살짝 손에 힘을 주자 에리얼이 주먹을 바르르 떨며 울먹이는 얼굴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백작님! 아파요, 아파!”

무던하던 베르트발드의 얼굴 위로 잔잔하게 파문이 일었다.

눈물을 매단 채 일그러진 눈가가 오롯이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다. 눈을 마주하자 속에서 어떤 감정이 파삭, 하고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베르트발드는 자신이 가학적인 성향이 있었던가 짧게 고민하다가 이내 상념을 떨쳐내고 덤덤하게 물었다.

“이쪽 말고 달리 아픈 곳은 없으십니까.”

“아, 네. 일단은요.”

느릿하게 그녀를 훑은 베리트발드가 에리얼의 오금 아래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가볍게 에리얼을 안아 들고서, 그대로 저택 쪽으로 빠르게 발을 옮기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부인. 목을 꼭 안으십시오. 조금 흔들릴 테니 놀라지 마시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리얼의 몸이 뒤쪽으로 확 쏠렸다.

놀랄 새도 없이 에리얼은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물론 좋아서가 아니라, 끌어안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안아주면 대부분의 숙녀들은 속으로 환호하며 새침을 떨 테지만 에리얼에게는 그럴 계제가 없었다. 덜렁거리는 발목은 아파 죽겠고 손을 놓으면 떨어질 것 같아서 무섭기만 했다. 에리얼은 그저 목에 매달린 채 가쁘게 숨을 내뱉기 바빴다.

“배, 백작님. 천천히 가셔도 괜찮은데요!”

“괜찮을 겁니다, 부인. 떨어지지 않게 꼭 안으십시오.”

겁먹은 에리얼의 행동을 베르트발드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다.

놀랐겠지. 내가 와서 안심이 되었나 보군. 속으로 안도하며 힐끗 에리얼을 내려다보았다.

나뭇잎이 드문드문 붙어 있는 검은 머리카락 아래, 두 눈을 꼭 감고 매달려 있는 모습이 마치 귀를 늘어뜨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겁먹은 토끼 같았다.

풀 향이 섞인 라벤더 향기가 은은하게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잘게 떨리는 팔이 목에 닿아 체온을 전하고, 시야 속에는 이미 한참 전부터 그녀만이 담겨 있었다.

모든 오감이 에리얼을 담은 채 베르트발드의 이성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베르트발드는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어 그녀와 더욱 밀착했다. 하지만 시선은 앞으로 고정한 채 묵묵히 달리기만 했다.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면, 작은 이마에 입 맞추고 싶어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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