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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10화 (10/145)

10화

에리얼은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실루엣만 있어 얼굴은 알아볼 수 없지만 지금은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눈이 제대로 보였다면, 남자를 마주하자마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을지도 모르니까.

대화하자는 것도 신기한데 목소리를 듣고 싶다니. 꼭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것만 같은 태도였다.

“벼, 별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도 없는걸요. 제가 얘기하면 지루하기만 하실 텐데….”

“목소리가 어여쁘시니 어떤 이야기든 달갑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없는 동안 저택에서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냥 밥 먹고요, 가끔 산책도 하고….”

“어디를 산책하셨습니까.”

“저택 아래쪽에 해안 정원하고 바닷가 근처를 자주 갔어요. 꽃이 많이 피어 있어서 향기가 좋더라고요.”

“걷기 편하시라고 해안 쪽을 새로 정비했는데, 의미가 있었나 봅니다.”

베르트발드가 창가 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꾸를 이어갔다. 반면, 그를 바라보는 에리얼의 얼굴은 점차 시무룩해졌다.

이상했다. 그녀가 아는 얀셀 백작의 정보는 이렇지 않았다. 관심 있는 것 외에는 아무런 호감도 주지 않는 남자. 말은 용건만 간단히, 여자는 길거리의 돌멩이 쳐다보듯 하는 무심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런 사람이… 이렇게 다정하게 말을 걸 리가 없는데.

이유 없이 다정한 사람은 늘 상처를 남기고 그녀 곁을 떠나갔다. 긴 세월 동안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에리얼의 입장에서 급작스러운 호의에는 무조건 날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 나를 놀리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의뭉스러운 눈빛을 알아챈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삐뚜름히 세우고 에리얼에게 시선을 되돌렸다.

눈빛이 맞닿은 자리 위로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에리얼은 보이지 않는 두 눈으로 빤히 남자를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저기, 백작님.”

“예.”

“아시다시피 저는 태어날 때부터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성에서만 갇혀 살았어요.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사교적이지도 않고 눈치도 빠르지 못해요. 다른 사람들이라면 금세 알아챌 만한 일도 한참 후에나 깨닫곤 하거든요.”

“…예.”

“그래서 제게 뭔가를 전하고 싶으시다면… 이렇게 떠보는 것처럼 조롱하지 마시고 부디 직접적으로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말을 쏟아낸 에리얼이 입을 다물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물을 때마다 상처가 되는 물음을 입에 담고 있다가, 날숨과 함께 나직이 내뱉었다.

“저를 동정해서 굳이 다정하게 대해주실 필요는 없답니다. 상냥함은 좋지만, 거짓으로 포장된 상냥함은 거북하거든요. 그냥 용건만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이런 일에 상처 받을 만큼 어린 숙녀가 아니니까요.”

공기가 차가워지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에리얼은 숨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온화한 분위기가 삽시간에 사라지고 서늘한 적막이 빈자리를 대신했다.

베르트발드는 혼란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자신이 말실수라도 한 건가 싶었다.

온갖 감정이 켜켜이 쌓인 눈동자가 에리얼의 정수리로 시선을 향했다. 푸른 눈동자가 감정의 그림자로 인해 본래의 빛을 잃고 탁한 빛을 뿜어냈다. 혼란이 가라앉은 자리에 이유 모를 갈증이 슬금슬금 밀려들었다.

“…제가, 부인을 동정한다 느끼셨다면 무척 유감입니다.”

간신히 내뱉은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베르트발드는 에리얼의 입장을 돌이켜보며 동요를 삼켰다.

세상에 잣대를 기준 삼아 봤을 때 관계의 우위에 서 있는 건 베르트발드가 아닌 에리얼이었다. 그녀는 아이기스 공작가의 장녀였고, 가문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황비나 왕비가 되었을 몸이지 백작가의 안주인으로 끝날 인생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놓고 보면 그녀는 시각 장애자임과 동시에 결혼 시장에서 퇴출된 하자품이었다.

반면 베르트발드는 원로원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명문가의 가주이자 최연소 집정관으로서 제국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었다.

서로의 입장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거리를 좁히는 자신의 방식이 문제였을까.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베르트발드는 팔짱 낀 손을 들어 턱을 쓸어내렸다.

“부인께서 지금 대단히 큰 착각을 하고 계신 듯하니 우선 말씀드리자면. 저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부인을 동정한 적 없습니다.”

“네?”

“부인께서 알고 계신 베르트발드 얀셀은 어떤 인간입니까?”

에리얼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베르트발드는 시선을 허공에 유지한 채 끄는 듯한 목소리로 대신 답했다.

“부인께서 소문에 어둡다 하신들 아무런 정보 없이 혼인하셨다 믿을 만큼 제가 순진한 사람은 아닙니다. 수도 사교계에서 가장 오만한 푸른 피, 세상 만물을 이해득실로만 구분하는 기회주의자. 세간에서는 저를 그렇게 부르더군요.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리고 그 세평에 따른 베르트발드 얀셀이라면, 결혼이라는 거래를 통해 최대의 이익을 볼 수 있는 상대는 부인이 아닌 제2황녀 전하셨겠지요.”

에리얼은 입을 다물고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2황녀, 쿠델라이야가 어렸을 때부터 베르트발드를 쫓아다니며 구애에 열을 올렸다는 건 귀족들 사이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사관학교에 재교 중이던 베르트발드를 만나기 위해 혼자서 황궁을 뛰쳐나갔다던 황녀의 기행은, 생도병을 대동해 황녀를 포박했다던 베르트발드의 무용과 맞물려 전설 아닌 전설이 되었을 정도였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다만, 굳이 황녀까지 뿌리치고 자신과 결혼한 데에는 아이기스 공작과의 그만한 거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황녀와 결혼하는 게 그를 위한 선택이었을 테니까.

에리얼은 안고 있던 리라를 슬며시 쓸어내렸다. 손가락으로 바닥에 새겨진 음각을 아로새겨 보았다.

어쩌면, 자신의 기대가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생겼다.

“저를 동정하지 않으신다고요?”

“예.”

“저를 싫어하시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저를 좋아하시나요’겠지만 그런 걸 뻔뻔스레 물을 만큼 에리얼은 자존감이 높지 않았다.

에리얼은 입술을 꾹꾹 씹다가 슬그머니 눈을 들어 베르트발드를 쳐다보았다.

쉴 새 없이 일렁이던 붉은 회오리가 자취를 감추고 평소처럼 짙은 붉은색의 인영이 자신을 바라보며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리얼이 슬그머니 입매를 당겨 미소를 띠었다. 그가 정말로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백작님, 이 리라요. 아까 아버지께 언질을 듣고 구입했다고 하셨죠?”

“예.”

“어떻게요? 악기상에 이 리라가 놓여 있던가요?”

“예. 적당히 골라왔습니다.”

입가에 머물러있던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차분해지려고 노력했지만 질금질금 새어 나오는 웃음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에리얼은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평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둥글게 휜 눈시울은 여전히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의아해하는 베르트발드를 무시하며 에리얼은 흠, 헛기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악기에 굉장히 까다롭답니다.”

심심할 때에는 아무거나 손으로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주제에 에리얼은 턱을 들어 올린 채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그녀를 주시하던 베르트발드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리라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보군요. 새로 주문하겠습니다.”

“아니, 아니요! 그게, 끝까지 들어주세요….”

거침없는 답변에 에리얼이 꼬리 내린 강아지 같은 얼굴로 베르트발드를 올려다보았다. 예, 대답을 듣자마자 다시 얼굴이 환해지는 모양새가 진심으로 강아지를 연상케 했다.

보이지 않는 귀를 쫑긋거리며 에리얼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까다롭지는 않은데요. 음. 리라는 워낙 애착이 강해서 여러 종류를 연주해봤어요.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리라가… 이 리라예요.”

“그렇습니까. 그저 외양이 하얗고 아름답길래 골라봤는데 부인께서 귀하게 여기시던 악기와 같은 거라니. 대단한 우연이군요.”

태연한 목소리를 듣고서 에리얼이 입술을 오므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에리얼은 웃음을 삼키고서 힘차게 리라를 들어 올렸다.

“백작님. 여기, 여기 보이세요?”

베르트발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이 가리킨 자리로 시선을 향했다. 리라의 바닥면 한가운데에, 나뭇잎 모양과 함께 아주 자그마한 글씨로 뭔가가 새겨져 있었다.

작고 메마른 손가락이 소중한 것을 매만지듯 조심스럽게 음각을 쓸었다. 에리얼은 얼굴 가득 화사한 웃음을 피운 채 베르트발드를 바라보았다.

손가락이 지나간 자취를 따라 베르트발드도 조심스레 음각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거칠게 각인된 이름을 띄엄띄엄 불러보았다.

“백색 숲의 목수… 치르콴. 45? 암호 같군요.”

“무슨 말인지 알아보기가 어렵죠? 치르콴은 이 악기를 만든 사람의 이름이에요.”

“유명한 명장인가 봅니다.”

“어머, 전혀요. 여기 쓰인 대로 이 사람의 직업은 목수예요. 동북부 제일 끄트머리에 크트바라는 자작나무 숲이 있는데요. 치르콴은 거기 숲지기이자 목수예요.”

“…그렇습니까.”

“악기는 취미로 만들기 때문에 주문하지 않으면 아예 만들지 않아요. 그리고 품질도 썩 좋은 편이 아니고요.”

베르트발드는 입을 다문 채 느린 손길로 입가를 쓸었다.

에리얼이 악기에 대해서 이렇게 해박한 사람이었던가….

동요를 알아차린 에리얼은 잠시 그의 기색을 살피다가, 붉은색이 변함없는 걸 보고 안심하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자작나무의 향기도, 거친 마감도 마음에 들어서 이분 악기를 제일 좋아했어요. 제 거는 8번이었는데 벌써 45번까지 나온 걸 보니 신기하네요.”

에리얼이 차분한 손길로 리라를 쓸어내렸다.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둥그런 곡선과 섬세한 문양은 예전 리라와 동일했지만, 나무의 거칠거칠한 느낌이 손을 타지 않은 새것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에리얼은 고개를 살짝 꺾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만연한 미소가 앞으로 나올 말들을 미리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백작님.”

“부인.”

베르트발드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시야에서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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